•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의정부

의정부

조선 시대 최고 정책 심의 기구

1400년(정종 2) ~ 1907년(고종 44)

의정부 대표 이미지

의정부등록 표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의정부란?

의정부(議政府)는 모든 관료들을 통솔하고 국정의 제반 업무를 관장하였던 조선 시대 최고의 정책 심의 기구이다. 의정부를 부르던 다른 명칭은 도당(都堂)·묘당(廟堂)·정부(政府)・황각(黃閣) 등이 있다. 의정부는 고려시대에 고위 관료들이 모여 국정 전반을 논의하던 합좌기구인 도평의사사가 조선 개국 후 1400년(정종 2)에 개칭되면서 만들어졌으며, 이후 1907년(순종 1) 내각으로 개편될 때까지 조선 관료체계 내에서 최상위의 행정・정치 기구로 운영되었다.

2 의정부의 성립과 변천

의정부는 조선의 최고 국정기관이며 관료의 우두머리인 재상들이 속한 기구이다. 재상 제도의 연원은 멀리 중국 주(周)로 거슬러갈 수 있다. 주의 문물과 제도를 전하는 책인 『주례(周禮)』에서는 ‘총재’라는 만조백관을 총괄하는 우두머리의 존재를 규정하였다. 진(秦)에 들어서는 승상부가 만들어졌으며, 당(唐) 때에는 상서성・중서성・문하성이 생겨 재상부의 역할을 하였는데 송(宋)에도 이어지다가 원(元)에 이르러서는 중서성으로 통합되었다. 명(明) 때에는 중서성이 없어지고 실무를 관장하는 육부가 직접 황제의 지휘 아래에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삼국시대에는 최고 행정기구가 아닌 귀족회의나 합의기구가 있었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당의 3성 제도의 영향을 받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이 재상부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도병마사(都兵馬使)(또는 도평의사사)에 최고 관료들이 모여 군사와 국정의 중대사를 운영하게 되었다. 조선의 의정부는 최고기구인 도평의사사를 개편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의 도평의사사가 중서문하성과 중추원(中樞院)의 고위 관직자들이 모인 기구였다면 의정부는 의정부 내의 관직자로만 구성이 되었다는 점에서 독자적 위계를 가진 상설기구라는 성격이 강조되었다.

1400년(정종 2) 세워진 의정부 소속 관원의 명칭은 판문하부사・문하좌정승・문하우정승이었으며, 판문하부사 이하의 관직이 중심이 된 삼사 판사와 좌우사의 합좌기관 같은 의정부의 성격 등으로 볼 때 고려 후기 문하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대와 세종대 관제개편을 거치면서 점점 그 형태와 성격이 변하게 되었다.

1436년(세종 18)의 변화된 의정부 관원의 명칭을 보면 영의정부사・좌의정・우의정, 좌우찬성, 좌우참찬 등으로 『주례』에 전하는 3공 및 3공을 보좌하는 3고(三孤)의 제도와 비슷하다. 조선은 성리학의 정치・경세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개국 초 각종 제도를 정비할 때에는 성리학적 제도개혁을 실현하기에 알맞은 경전을 바탕으로 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관직제도는 유교의 경전, 그 중에서도 유교문물과 제도의 핵심을 전한다는 『주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주례』에서 지향하는 정치 형태는 재상이 관료제의 우두머리로서 재상 이하 모든 관료가 소속된 관서를 중심으로 담당 업무를 수행하는 위계적인 시스템이었다. 세종대에 의정부 관원의 명칭이 변하면서 의정부 부서 자체의 기능도 체계화・세분화 되었는데, 이는 의정부의 역할이 이전에 비하여 강화된 의정부서사제의 실시와 관련된 것이다. 의정부서사제는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육조에서 각기 해당 업무를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에서 이를 심의하여 다시 국왕에게 보고하는 제도이다. 육조에서 해당 업무를 바로 국왕에게 보고하는 육조직계제에 비하여 재상의 기능이 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세종대의 안정적인 정치질서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주례』에서 강조된 관료제의 위계적이고도 체계적인 질서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법제적 질서가 최초로 명문화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된 성종 대에는 3정승 등 의정부 소속 관원들의 수와 그들에게 지급되는 녹봉과 직전(職田)・택지의 결수, 차노비와 근수노의 명수, 관복과 의장품이 세세하게 규정되었다. 당연히 의정부가 하는 일도 법적으로 규정되어서 ‘백관을 통솔하고 여러 국정과 관련된 업무를 다스리며 음양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영한다.’는 구절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관련 업무를 세세하게 규정했다기보다는 의정부가 하는 일의 대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이며, 의정부의 업무는 이때 비로소 정해졌다기보다는 이전에 이미 확립된 기능이 명문화 된 것으로 해석한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경국대전』을 수정하여 만든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에 나타난 의정부 관원의 구성은 큰 변화가 없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3 의정부의 업무

‘모든 관료를 통솔하고 여러 국정의 업무를 다스리고 음양을 고르게 하며 나라 안을 경영한다.’라는 『경국대전』 속의 의정부 업무는 법제적・상징적인 문구로 업무를 규정한 것이다. 의정부는 최고의 정치기관으로서 시기별로 변동은 있지만 대체적으로 관료선발・군사・외교・의례・형정과 노비・진휼과 구료・교육과 과거・제도 개혁 등 국정의 모든 분야를 관장하였고, 육조의 업무에 관한 거의 모든 사항에 관여하였다.

특히 조선 중후기에 작성된 『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을 통해서는 조선후기 의정부가 구체적으로 무슨 활동을 했는지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경국대전』에 전하는 조선전기 의정부 업무에 대한 법제적 규정을 보완하여 탐구할 수 있다. 이 책에 기록된 조선후기 의정부의 활동을 보면, 외교나 관료선발, 형옥 등에 대한 활동 보다는 각종 국가 의례나 왕실 인사의 안부 챙기기, 관리의 동정에 관한 활동, 사신 일행의 준비과정 챙기기, 감사나 병사 추천이 주가 되었다. 특히 국왕과 왕실 인사들과 관련된 각종 활동이 활발하였다. 백관을 거느리고 왕과 왕실 어른들에게 문안인사를 올리거나 경사가 있을 때 하례를 올린다거나 약방을 거느리고 병문안을 하는 것은 의정부의 수장이 해야 할 일이었다. 국가의 제사가 있을 때 제헌관으로 참여하거나, 왕이 궁 밖을 행차할 때 어가를 따라 보좌하는 것도 의정부의 주된 임무였다. 또한 가뭄이나 홍수 등 각종 기상이변이 일어나면 왕을 보좌하는 재상이 책임을 지고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야 했다.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에서 ‘음양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륜한다.’고 한 『경국대전』 속의 의정부 업무를 생각하면 국가의 제사나 기상이변에 대한 관리가 당연히 의정부의 소관이라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특별한 업무 말고는 의정부의 업무가 육조나 승정원 등 다른 부서들처럼 고유한 업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정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며 관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종류는 실로 방대하였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의정부와 더불어 비변사(備邊司)가 최고의 정무기관의 역할을 하면서 의정부의 기능과 지위는 이전과 비교해서도 비변사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하락하였다. 비변사는 명종대에 상설기구로 성립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가 존망이 걸린 전쟁을 겪으면서 군국기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변사는 육조(六曹)를 지휘하고 정치 외교 군사 등 국정의 여러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는 비변사를 통해 전후 복구와 국방의 재건을 꾀하면서 국가의 역량이 총동원되었고, 자연스럽게 문무 고위 관료들이 비변사에 모여 국정 전반에 대하여 논의하고 합의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의정부는 비변사의 국정총관과 비변사 중심의 국정운영에 따라 이전의 정치적・행정적 기능을 상당 부분 빼앗기고 국가 의례의 수행이나 왕실 인사들의 안위에 관련된 상징적인 기능 정도를 담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종(高宗)대에 이르면 비변사가 폐지되면서 의정부에 그 기능이 이관되어 명목상 최고 정치기관의 위상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1894년의 갑오개혁(甲午改革)에 수반된 근대식 관제개혁으로 의정부는 궁내부 체제로 개편되었고, 1년 뒤에 의정부는 내각제로 개편되면서 혁파되었다.

4 의정부의 관원

전근대 왕조국가에서 정치의 최고 책임자는 국왕이었다. 국왕은 명분상 나라의 주인이면서 모든 백성들을 살피며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모든 국정의 사무를 국왕이 혼자 살펴보고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국왕은 재상을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실질적으로 국정을 관장하고 관료들을 통솔하며 국왕을 보좌하게 한다. 재상 이하 모든 관료들은 국가의 관료 시스템 속에서 각자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체제는 중국의 경전인 『주례』에 나오는 것으로 그 연원이 오래 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승상 또는 3공, 상국이라고 불리는 최고 관료가 국정을 총괄하였고, 중국의 관제가 본격적으로 수용된 고려시대에는 문하시중이 그 역할을 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국초부터의 관료제도 정비를 통하여 의정부의 우두머리인 영의정을 중심으로 하는 위계적 관료제의 운영을 확립해 나갔다. 의정부 소속 관원은 『경국대전』에 규정된 것을 기준으로 정1품 영의정・좌의정・우의정 각 1명, 종1품 좌찬성・우찬성 각 1명, 정2품 좌참찬・우참찬 각 1명, 정4품 사인 2명, 정5품 검상 1명, 정8품 사록 1명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의정부의 3정승, 즉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정도전(鄭道傳)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임금은 어리석을 수도 현명할 수도 있고, 강할 수도 약할 수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다. 그러므로 재상은 임금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려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국왕은 모든 일을 직접 관장하지 않고 단지 재상을 선발하는 인사권을 발휘하고, 실질적인 업무의 총괄은 재상이 담당한다. 재상이 정치・행정적으로 중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시기에 따라 진폭은 있었지만 조선 시대의 재상이란 국왕의 바로 다음 위치에서 국정의 운영 방향을 좌우하는 큰 자리였다.

3정승은 의정부 소속의 관원들을 지휘하면서 의정부의 업무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일을 하였다. 또한 육조를 지휘하며 국왕이 신료들을 접하는 상참과 차대・인견・소견에 항상 동석하여 사안에 대해 듣고 국왕의 요청에 따라 여러 국정의 결정과 시행에 관여하였다. 정승은 다른 부서의 직을 겸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들은 육조의 판사직, 육조 속아문과 속사의 지휘,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영사, 세자시강원사부, 승문원도제조 등을 의례적으로 겸하면서 당하관 이하의 관원의 업무평가와 추천을 하였다. 또한 의금부・봉상시・사옹원・ 내의원・군기시・군자감 등의 도제조 이하를 겸대하면서 이들 아문의 정사를 지휘하였다. 외교적인 사안을 맡아 처리하는 것도 정승이 할 일이었다. 특히 국왕이 교체되는 시기에는 국장의 시행과 의례의 진행을 담당하면서 국왕의 위임을 받아 승정원에 상주하면서 업무를 처리하여 새로운 왕이 순조롭게 대통을 잇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의정부의 3정승 자리는 국왕의 신임이 높은 인물이 차지하였으며, 결원이 생길 경우 후임자를 뽑는 복상(卜相) 때에는 같은 당파나 주변 인물을 추천하는 것이 가능했던 까닭에 그 권위가 높았다.

찬성과 참찬을 살펴보자. 이들은 3정승을 보좌하면서 의정부의 정사 논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3정승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역할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이들이 종1품과 정2품의 직질을 가진 고위관료였기 때문에 국정 운영 경험이 풍부하고 국왕의 신임을 받는다는 점에서, 그렇기 때문에 수시로 육조 판서와 교차 제수되며, 이 자리를 통하여 3정승의 자리로 진출한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또한 찬성과 참찬은 3정승과 마찬가지로 국왕을 수시로 접견하며 의견을 개진하고 겸직제도를 통하여 여러 아문의 업무를 지휘하였다.

당하관인 의정부의 사인(舍人)은 사인사의 사무를 주관하고, 의정부 내 당상관과 국왕의 중간에서 오가는 국정의 사안, 의정부와 다른 관료들 사이에서 오가는 국정의 사안을 매개하였다. 때문에 사인은 경연과 상참에 참여하여 관련 사항을 숙지하고 국왕의 명을 관료들에게 전달하였다. 의정부 검상은 사인과 함께 의정부 내의 행정사무를 담당하고 사인을 보조하는 일을 하였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