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향리

향리

고려·조선 시대 지방 행정 실무 담당자

미상

1 개요

향리란 고려에서 조선 시기에 걸쳐 지방 행정 사무를 담당한 계층이다.

고려 시대에는 장리(長吏) 또는 외리(外吏)라고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인리(人吏), 또는 외아전(外衙前)으로도 불렸다. 외아전은 지방 수령의 관아 밖에 위치한 작청(作廳)이라는 건물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경아전(京衙前)은 중앙 관청에서 근무하는 하급 관리를 지칭한다.

2 향리제도의 성립

신라 말에는 지방의 행정질서가 무너지면서, 성주(城主)·장군(將軍) 등을 칭한 지방 유력자, 소위 호족들이 지역의 지배계층으로서 자위집단을 구성하며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상당한 지배력을 갖춘 세력으로 남아 있었고, 고려에서는 이들 세력을 정권으로 끌어들이는 한편으로, 적절히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 시기의 향리 제도는 이러한 지방 세력을 이용하면서도, 이들을 중앙의 통치체제 속으로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향리 제도는 고려 성종대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정비되었다.

성종대에는 향리의 수장으로 호장(戶長)·부호장(副戶長)을 두고 그 밑에 일반서무를 관장하는 호정(戶正)·부호정(副戶正)·사(史)의 사호(司戶) 계열과 지방 주현군(州縣軍)과 관련된 사병(司兵) 계열, 그리고 조세·공부(貢賦)의 보관 및 운수와 관련된 창정(倉正)·부창정(副倉正)·창사(倉史) 등이 속한 사창(司倉) 계열로 조직되었다. 이와 같은 향직(鄕職) 수여와 함께, 중앙의 문산계(文散階)에 대비되는 무산계(武散階)를 부여해줌으로써 중앙에 비견되는 관료질서 속으로 포섭하였다.

1018년(현종 9)에는 지방제도의 정비와 함께 향리의 정원제(定員制)·공복제(公服制)가 시행되었으며, 1051년(문종 5) 10월에는 향리의 승진규정을 정하였다. 이를 통해 주·현의 향리는 후단사(後壇史)부터 호장까지 9단계에 걸쳐 승진할 수 있게 하였다.

고려의 지방제도상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하는 속현이나 향, 소, 부곡 등이 상당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향리들이 대부분의 실무를 자치적으로 집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들을 통해 향리층을 적절히 지역의 지배세력으로 인정해주면서도 이를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3 고려 향리제도의 동요

고려 초기의 향리 제도는 12세기 무렵부터 지방질서가 크게 변화하면서 함께 요동치기 시작한다. 농장이 확대되고, 부세 수취가 편중되고 과도해지면서 농민들이 유망하였고, 이에 대한 관리책임을 가진 향리들 역시 부담이 가중되자 유망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지역들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감무 파견 자체가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으나, 본관을 근거로 한 지방질서가 무너지는 경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중앙이 직접적으로 지방을 통제하려는 지향은 지속되었다.

한편 광종대 과거제를 실시한 이후, 상층 향리층들이 중앙 관료로 변모하면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사족(士族)으로 변모해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중앙으로 진출하거나 재지품관(在地品官)으로 바뀜에 따라 지방의 향리들은 수적으로 감소하게 되었으며, 남은 향역(鄕役) 역시 소수에게 집중됨으로써 매우 고된 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에 진출하거나 재지품관으로 변모한 향리들과 향역을 진 향리들 사이의 단절도 점차 심해졌다. 또한 몽골 항쟁과 왜구 침입 등을 거치면서 지역 자체가 기반을 잃거나 변동되어 향리들이 토착 기반을 상실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고려 후기 향리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그들이 담당한 직무도 향촌의 자율적 지배를 보장받던 것에서부터 국가로부터 부과된 역을 수행하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4 조선의 향리제도 재편

조선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수렴하며 중앙집권화를 강화하며 새로운 지방 통치 질서를 구축하였다. 전국의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고 이들의 권한을 강화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지방의 토착세력이었던 향리에 대해서는 규제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본관지를 이탈한 향리들을 대대적으로 이속하여 토착 기반에서 유리시켰다.

또한 향리들의 권한을 제어할 수 있는 규제를 제정하는데, 수령을 조롱하거나, 인민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는 등의 향리를 처벌하기 위한 원악향리처벌법(元惡鄕吏處罰法) 과 재지품관·향리·백성들이 수령을 고소할 수 없게 한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 대표적이다. 전자가 향리들의 토호성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수령의 권위를 매우 높일 수 있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1445년(세종 27)에 인리(人吏) 즉 향리의 위전(位田)을 혁파함으로써 , 하급향리의 물적 기반을 제거하는 동시에, 향리가 중앙의 관직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직역 담당자로서의 지위만을 확고히 하였다. 이러한 제반 조처들과 향역 관련 규정은 『경제육전(經濟六典)』과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확정되었으며, 원칙적으로 향역에 긴박하도록 규정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향리는 신분유동에 상당한 제약을 가지게 되어 신분상승의 기회가 박탈되어 중인 신분으로 정착되었다.

5 조선 시대 향리의 성격

조선 전기의 향리는 호장·기관(記官)·장교(將校)·통인(通引) 등 대체로 네 계열로 구분되는데, 고려 이래 호장은 조선 시기에도 최고위 향리직으로서 집무처인 읍사(邑司)에서 인신(印信)을 가지고 대부분의 지방행정사무를 집행하였다. 기관은 호장의 밑에서 분담된 업무를 수행하는 일반 향리들로서 호장보다 격이 낮았으나, 기관층의 수석인 상조문기관(上詔文記官)은 국왕의 조칙을 전달하고, 기관층을 통괄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이들은 호장직 중의 가장 높은 지위인 수호장에 버금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중앙의 육조 조직을 모방하여 기관 역시 육방(六房)으로 분담하기는 하였으나, 지방에 따라 편차가 있었다.

장교는 고려의 주·현·군 장교직을 겸한 향리에 그 계보를 둔다. 고려 시기에는 도군(都軍)이라 부르고, 조선 시기에는 장교라 하였다. 이 밖에 통인(通引)은 지방관아에서 보고의 업무나 인신을 맡아보는 등의 사환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들 향리는 사족들의 명부인 향안(鄕案)과 비견되는 단안(壇案)이라는 자체 명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단안에 등록된 자만이 호장·기관·장교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은 삼공형(三公兄)이라 하여 조선시대 향리층의 중심이었는데, 이를 삼반(三班) 체제라 칭하기도 한다.

향리의 집무처는 공식적으로 인리청(人吏廳) 또는 이청(吏廳)·아전청(衙前廳)이라 했고, 일반적으로 작청(作廳) 또는 성청(星廳)이라 일컬었다. 이러한 작청은 조선 중기 이래 호장 이외의 일반 향리들의 직무활동의 중심 기구였다. 조선 후기에는 호장이 머물던 읍사의 기능이 약화되는 대신 작청이 이를 대치하면서 향리 집단의 중심 기구가 되었다.

고려 시대 이래 향리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일정한 토지소유자로서, 토착 지역에 확고한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국가에서는 향리들의 세력을 규제하기 위해 외역전(外役田)을 혁파하고 녹봉(祿俸)도 지급하지 않아 경제적 보장 없이 향역을 수행하게 하고, 지방관아의 각종 유지`운영비를 부담하게 하여, 이것이 향리층에 상당한 부담으로 전가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향리들이 필요한 재원을 스스로 확보하며, 이를 제도화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조선 시기 향리는 지방 각지에서 이족으로 고정화되어 신분과 역을 세습하고, 지방 사족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자치조직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지위상 사족들의 하위에 머물러 있었다. 이로 인하여 향리 자제 셋 중 한명만 잡과(雜科)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거나, 향리는 사서(四書)와 일경(一經)의 강시(講試)를 더 하게 하여 과거 응시를 크게 제약하였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