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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파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보수적 정치 세력

미상

1 개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정치세력으로, 세조(世祖)의 집권을 도와 공신에 책봉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본래 훈구(勳舊)라는 용어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원훈(元勳) 과 오랜 시간 조정의 정사에 참여한 구신(舊臣) 이라는 말에서 연유한 것으로, 공신(功臣) 혹은 그에 필적하는 업적이나 덕망을 갖춘 노성한 신하를 지칭한다. 따라서 훈구라는 용어는 조선 전시기에 걸쳐 사용될 수 있는 통시대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 훈구라고 지칭될 때는 세조대를 기점으로 형성된 정치세력, 즉 훈구파를 가리킨다. 이는 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 등 세조를 도와 집권에 성공했던 인사들이 세조~성종 초에 걸쳐 다섯 차례에 걸친 공신 책봉에 중첩적으로 참여하면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공신과 노성 대신을 의미하는 훈구·원훈이라는 용어가 세조대 이래 지속적으로 권력을 장악해 간 공신 출신의 대신들을 가리키며 훈구파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훈구파의 범주에 세조대 이전에 공신에 책봉되었던 사람들, 즉 국초의 개국공신(태조 1)·정사공신(정종 1)·좌명공신(태종 1) 등에 책봉된 사람들과 그 후예들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는 사림파의 연원이 고려 말의 온건개혁파에 맞닿아 있다고 인식하는 것처럼, 훈구파의 연원 역시 조선의 건국을 주도했던 인사들에 모태를 두고 있다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이 같은 측면에서 훈구파는 조선 왕조의 개창에 참여한 뒤 이후 계속되는 정변과 그에 따른 공신 책봉에 참여하며 집권 세력으로 자리 잡았던 신료들과 그들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을 기본적인 범주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집권층 내부에서 거가대족(巨家大族)과 같은 명족(名族) 의식이 강화되고 있었던 것도 그 같은 측면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훈구파의 형성

훈구파의 형성은 세조의 집권을 결정지었던 계유정난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공신에 책봉된 사람 중에서도 핵심적 위치에 있던 한명회‧정인지‧신숙주 등은, 정난공신(단종 1)을 시작으로 좌익공신(세조 1)·적개공신(세조 13)·익대공신(예종 1)·좌리공신(성종 2) 등 총 다섯 차례 걸친 공신 책봉 가운데, 적개공신을 제외한 4차례의 공신책봉에 참여하고 있었다. 적개공신의 경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세워진 공신인데, 이시애(李施愛) 측의 반간계로 한명회와 신숙주가 난에 가담한 것처럼 보고되어 일시적으로 실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들의 가담이 무고임이 밝혀지고, 곧이어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남이의 옥을 통해 익대공신에 추대됨으로써 세력을 만회할 수 있었다. 아울러 성종(成宗)의 즉위 직후 이루어진 좌리공신에의 참여 와 원상제의 시행으로 한명회 등은 오히려 세조 치하에서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훈구파는 계유정난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사들이 성종대까지 공신에 거듭해서 참여하게 됨에 따라, 권력이 이들 공신 집단에게 집중되면서 형성된 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성종대 이후의 훈구파

세조대의 훈구파는 정난공신 출신의 핵심인사들을 중심으로 강한 구심력을 발휘하며 공고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성종 후반에 이르러 이러한 분위기는 크게 바뀌게 된다. 일차적으로 신숙주·정인지·한명회 등과 같은 핵심 인사들이 하나 둘 사망해 가며 그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감소해 갔다. 아울러 성종의 비호 하에 사림파가 새롭게 등장하여 훈구파와 맞서게 되면서 위축의 추세는 더욱 더 가속화 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훈구파는 점차 약해져 가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사화와 같은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사림파를 제거하고자 노력했다.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연산군대의 무오사화와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주도한 중종대의 기묘사화는 그러한 기획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차례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훈구파의 정국 장악력은 세조대의 성세를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일차적으로 세조대 이래의 거듭된 공신 책봉과 특정 인사들의 중복된 책봉에 기초한 훈구파의 성세는 공신 책봉이 꾸준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약화되는 측면이 있었다. 성종 2년의 좌리공신 책봉 이후 명종 대까지의 약 80여 년 동안 3차례의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세조 대의 책봉에 비해서는 매우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며, 공신들 사이의 응집력 역시 정난공신들에 비해 약했다. 한편, 사림파의 청요직 장악과 그에 따른 영향력 증대도 훈구파 세력의 약화를 부추기고 있었다. 재상에 이르는 핵심 경로인 청요직을 사림파가 장악하게 됨에 따라 훈구파의 권력 재생산은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훈구파는 사화를 통해 일시적으로 권력을 회복하더라도 향촌에 기반을 둔 사림파가 지속적으로 자신들을 압박해 오는 상황이 되풀이됨에 따라, 그만큼 세력이 약화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명종대 사림파를 제거하고 척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국정이 난맥상에 빠져 사회 혼란이 가중되고 민심이 이반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아울러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사망으로 외척정권의 배후를 상실하고, 명종(明宗) 또한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운명함으로써 척신권력에 기대고 있던 훈구파는 더 이상의 명맥을 유지하지 못한 채 정파로서의 생명력을 잃어 갔다.

4 훈구파의 개념에 대한 이견

하지만 훈구파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몇 가지 지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 우선, 훈구파라는 개념이 훈구파 자체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도출된 것이라기보다는, 사림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림파에 상대되는 세력으로 규정되어 개념이 설정됨에 따라, 세조대~명종대에 이르는 시기에 훈구파로 지칭되는 인사들이 과연 하나의 정파로 묶일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가 일고 있다. 아울러, 성종대 이후 훈구파로 지칭되는 인사들이 대체로 젊어서는 대간이나 홍문관과 같은 청요직에 머물면서 날선 비판을 제기하다가 재상에 오른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는 대간으로부터 탄핵 받는 인사들은 훈구파이고, 탄핵을 제기하는 인사들은 사림파라는 단순한 구분이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향후 관료조직의 운영원리에 대한 충분한 검토 위에 정치세력에 대한 보다 세밀한 규정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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