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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산당

사회주의와의 첫 번째 만남

미상

고려공산당 대표 이미지

고려공산당의 주역 이동휘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사회주의는 처세의 상식

1920년대 중반 조선의 서점가를 달군 베스트셀러 가운데 『사회주의학설대요』란 책이 있다. 이 책은 개벽사 출판부에서 발행하였는데 일본의 사회주의자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가 지은 것으로 정백(鄭栢)이 번역하였다. 개벽사에서는 자사에서 발행하던 잡지인 『개벽』과 『별건곤』 등의 지면을 통해 이 책을 대대적으로 광고하였다. 당시 이 광고의 메인 카피는 ‘사회주의는 처세의 상식’이었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지식인으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광고 전략이 주효했던 것인지 이 책은 꽤 많이 팔렸다. 1926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대구 무영당 서점에서 집계한 베스트셀러 가운데 사상 방면 1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 사회주의라는 신사상이 조선에 광범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바탕으로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어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었다. 1921년에 창당한 중국공산당, 1922년 창당한 일본공산당에 비해서 다소 늦은 편이다.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곡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지기까지 징검다리 역할을 한 조직들이 있었다. 연해주에서 만들어진 한인사회당, 국내에서 만들어진 사회혁명당 그리고 양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고려공산당이 바로 그것이다.

2 한국인, 러시아에서 혁명에 휘말리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연해주 지역까지 파급되면서 그곳에 살고 있던 한인들도 여기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사회주의와 대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0월 혁명 이후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에는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소비에트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당시 극동의 볼셰비키 가운데는 김알렉산드라를 비롯한 한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18년에 들어서면 이들 한인 볼셰비키들은 당시 신한촌에서 발행되던 『한인신보』를 중심으로 결집한 망명세력과 손을 잡기 시작하였다. 한인신보 그룹을 대표하던 인물이 이동휘(李東輝)였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1918년 4월 28일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한인사회당은 한국인들이 최초로 조직한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인사회당에는 이동휘와 김알렉산드라 이외에 박애(朴愛, 朴마다베이), 박진순(朴鎭淳, 미하이朴), 이한영(李翰榮), 김립(金立) 등의 인물이 참여하였다.

이동휘는 함경도 단천 출신 무관으로 일찍이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바 있다. 그는 석방된 후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하여 권업회에 가담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추방되었다가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후 연해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의 한인계 사회주의 운동가로 본명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이다. 시베리아 우수리스크에 태어나 블라디보스톡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한인 노동자들이 대거 우랄지방의 벌목장에 동원되었는데 이곳에서 통역으로 활동하면서 볼셰비키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917년에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정식 입당하였으며 극동의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자 외교부장으로 활약하였다.

한인사회당은 창당 즉시 러시아내전에 휘말렸다. 한인사회당은 100여 명의 적위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부대는 하바로프스크 제1국제연대에 속해있는 블라디보스톡 국제군에 편입되어 볼셰비키와 함께 우수리전투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백군 편으로 기울었다. 극동의 소비에트정부는 붕괴되었고 한인사회당 구성원들은 흑룡강을 따라 후퇴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김알렉산드라는 백군에게 넘겨져 처형되었으며 유동열(柳東說), 김립 등 간부들은 중국인 노동자로 가장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한인사회당은 사실상 궤멸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3 3·1 운동 직후 만들어진 사회혁명당

한편 삼일운동의 파고가 한풀 잦아든 1920년 6월 국내에서 사회혁명당이란 정당이 조직되었다. 이 정당은 국내에서 최초로 계급과 사유재산의 타파를 주장한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사회혁명당은 김명식(金明植), 김철수(金錣洙), 장덕수(張德秀), 최팔용(崔八鏞), 이봉수(李鳳洙) 등 일본 유학생 출신과 윤자영(尹滋暎), 한위건(韓偉健) 등 국내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일본 유학생 그룹은 대부분 신아동맹단이란 조직의 구성원이었다. 신아동맹단은 1916년 일본 동경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이다. 조선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중국, 타이완, 베트남 등 아시아계 유학생 30여명이 모여서 만든 단체이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 간 평등에 바탕한 새로운 아시아를 세우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을 결의하였다. 신아동맹단에 참여했던 중국인들은 귀국한 후 상해에서 대동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신아동맹단 조선 지부는 1920년 6월 제5차 대회를 통해 조직의 명칭을 사회혁명당으로 바꾸면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사회혁명당은 창립대회에서 선언서를 통해 ‘계급과 사유재산의 타파, 프롤레타리아독재와 전국 10분의 7이 되는 무산자와 함께 혁명운동을 실행할 것’ 등을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공산주의 정당임을 분명히 표방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비밀독서회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혁명당은 국외에서 조직된 한인사회당 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그 위상과 역할이 크게 확대되었다.

4 두 개의 고려공산당

한때 궤멸 직전까지 갔던 한인사회당은 1919년에 들어서면서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3·1 운동으로 인한 연해주 한인사회의 혁명적 고양,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이 반격을 시작한 점 등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한인사회당이 활력을 되찾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이동휘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추대된 것이었다. 한인사회당은 1919년 6월말 간부회합에서 이러한 계기를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동휘로 하여금 국무총리에 취임하도록 설득하는 한편 박진순을 모스크바로 파견하는 등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동휘가 상해로 건너가 국무총리에 취임하자 그는 일약 상해 정계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당시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은 러시아의 소비에트 정부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동휘가 소비에트 정부와의 연결고리를 선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동휘는 1920년 5월 초 상해로 건너온 대한국민의회 부의장 김만겸(金萬謙)과 함께 이른바 ‘한인공산주의그룹’을 형성하였다. 이 그룹은 박진순, 김립, 이한영 등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 그룹은 이후 여운형(呂運亨), 조완구(趙琬九), 신채호(申采浩), 안병찬(安秉瓚), 조동호(趙東祜), 선우혁(鮮于赫), 윤기섭(尹琦燮), 김두봉(金枓奉) 등 임시정부 관계자들까지 끌어들여 (가칭)한인공산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당시 간부진은 책임비서 이동휘, 중앙위원 김립 이한영 김만겸 안병찬, 번역부 위원 여운형, 출판부 위원 조동호 등이었다.

한인사회당은 이른바 (가칭)한인공산당 단계를 거친 후 1921년 5월에는 고려공산당대표자 대회를 소집하여 정식으로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이 공산당은 상해에서 조직되었다고 해서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간부진은 위원장 이동휘, 부위원장 김규면(金圭冕) , 총서기 김립, 재무부장 박진순, 연락부장 김하구(金河球) 등이었다. 고려공산당은 명목상 (가칭)한인공산당을 확대 개편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탈하였다.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김만겸, 안병찬, 여운형 등 비한인사회당계 인사들이 대거 이탈하였다.

당시 러시아 바이칼호 연안에 있는 이르쿠츠크에서는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또 다른 고려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이 정당은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되었다고 해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고 부른다. 당시 2개의 고려공산당이 동시에 존재했던 셈이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이르쿠츠크파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상해 지부를 구성하였다. 김만겸이 책임비서, 여운형와 조동호가 위원, 김단야(金丹冶) 임원근(林元根) 박헌영(朴憲永) 등이 당원이었다. 이렇게 하여 2개의 고려공산당이 팽팽히 대치하게 된 것이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이탈한 세력도 있었지만 새로 참여한 세력도 있었다. 국내에서 조직된 사회혁명당 세력이 들어와 빈 자리를 채웠다. 고려공산당 창당대회 당시 사회혁명당은 김철수, 이봉수, 주종건(朱鍾建) 등 8명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고려공산당의 간부진에 사회혁명당 세력들이 대거 포진하게 되었다. 중앙위원 12인 중 7인, 내지간부 전원, 기관지담당 전원이 사회혁명당 출신이었다. 이렇게 연해주에서 출발한 한인사회당 세력과 국내에서 조직된 사회혁명당이 힘을 합쳐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만든 셈이다.

5 상해파, 먼저 주도권을 잡다

2개의 고려공산당 가운데 먼저 주도권을 잡은 것은 상해파였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이동휘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았기 때문에 임시정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의 소비에트정부와의 외교도 박진순, 한형권(韓馨權), 김립 등 상해파가 도맡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레닌정부는 200만 루블의 자금 지원까지 약속하였다. 이 자금을 수령하여 배분하는 일도 상해파가 장악했기 때문에 타 정파에 비해서 재정적 기반이 튼튼한 편이었다.

상해파는 사회혁명당 계열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국내에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사회혁명당 계열 인사들을 주로 조직과 선전 부서에 배치하였으며 구 사회혁명당 조직을 고려공산당의 국내지부로 재편하였다. 장덕수, 김명식 등이 중심이 된 국내지부는 활동의 폭을 크게 넓혔다. 이들은 우선 『동아일보』를 자신의 표현기관으로 활용하였다. 국내 조직활동에서 역점을 둔 것은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회연합회를 통한 청년운동이었다. 1920년대 초 청년운동은 상해파가 주도하였다. 이렇게 상해파는 일찌감치 국내외에 기반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이르쿠츠크파와의 경쟁에서도 앞서갈 수 있었다.

6 문제점도 적지 않았던 상해파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조직이나 이념적인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상해파는 자신들이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 전체를 대표한다고 표방하였지만 대표성이라는 측면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창당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탈하였으며 이르쿠츠크에 별도의 고려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이렇게 2개의 고려공산당이 난립하게 된 책임이 상해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해파의 대표성에 약점이 있는 것은 명백하였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사회주의 정당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조직체계와 운영방식이라는 측면에서도 취약점이 있었다. 당시 상해파의 조직은 러시아 볼셰비키로 대표되는 전위정당과는 전혀 거리가 먼 느슨한 조직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국내에서 만들어진 사회혁명당의 경우도 초기에는 비밀독서회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념적인 측면에도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사회주의 정당을 표방하였지만 이론적 학습의 수준이 높지 못했고 심지어 사회주의적 정체성까지도 의심받을 정도였다. 한인사회당을 이끈 이동휘의 경우 과거 계몽운동 시절 기독교인으로 행세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주의도 단지 독립운동을 위한 방편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사회혁명당계의 핵심인물이었던 장덕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찍이 1910년대부터 노동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 바 있다. 하지만 분배구조를 개선하여 ‘합리적’으로 통제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지향하는 영국 신자유주의자 홉하우스(Hobhouse)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사상으로 결코 사회주의 자체는 아니었다. 장덕수의 경우도 사회주의적인 주장을 일부 수용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사회주의자라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김명식 같은 인물은 이후 학습을 통해 사회주의를 수용하였다. 하지만 사회혁명당이 초창기 이념적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7 두 고려공산당, 간판을 내리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활동 과정에서 많은 반발에 부딪쳤다. 가장 먼저 모스크바 자금 문제를 둘러싼 분란이 일어났다. 이 자금은 소비에트정부가 한인사회당에 제공한 것이었으므로 상해파가 이 자금을 수령하여 관리하였다. 그런데 이동휘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맡는 바람에 일부에서는 임시정부에게 준 자금을 이동휘 일파가 횡령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주로 임시정부 내부에서 이러한 비판이 일었으며 경쟁하고 있던 이르쿠츠크파도 이 비판에 가담하였다.

상해파는 국내에서도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사기공산당사건이었는데 돈 문제와 정체성 문제가 뒤섞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앞서 언급한 모스크바 자금의 일부가 국내에도 들어왔다. 구 사회혁명당 계열의 인사들이 이 자금을 주무를 수밖에 없었다. 사기공산당사건이란 진정한 사회주의자도 아닌 자들이 공산당인척 하면서 이 자금을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사기공산당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것이 장덕수였다. 횡령이라는 비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장덕수가 진정한 사회주의자가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구 사회혁명당 계열의 인사들은 사상적 정체성을 분명히 할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렇게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국내외에서 많은 비판과 공격에 직면해야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심각한 분파투쟁이 발생하였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 지역의 무장세력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결국 코민테른에서는 1922년 12월 고려공산당의 해산을 명령했다. 해산 명령의 대상에는 상해파 고려공산당뿐 아니라 이르쿠츠크파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신 코민테른 산하에 꼬르뷰로(高麗局)를 설치하여 조선에서의 공산당 창당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꼬르뷰로는 상해파 이동휘, 윤자영과 이르쿠츠크파 한명서(韓明瑞), 장건상(張建相), 김만겸 등으로 구성되었다. 코민테른에서 두 고려공산당을 강제로 결혼시킨 셈이다. 이렇게 두 고려공산당은 징검다리 역할을 마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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