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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흥학회

기호 지역 지식인들, 교육 구국 운동 단체를 결성하다

1908년(순종 2) ~ 1910년(순종 4)

기호흥학회 대표 이미지

기호흥학회월보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는 1908년 1월 19일 한성부에서 이용직(李容稙), 지석영(池錫永), 정영택(鄭永澤) 등 경기도 및 충청도의 기호지방(畿湖地方) 인사 105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기호흥학회의 설립취지는 민족자강을 위한 학문 진흥에 있었으며, 정치적 활동보다는 교육운동에 주력하였다. 기관지로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를 발간하였고, 기호학교(畿湖學校)를 설립하였다. 1910년 일제의 한국병합 이후 조선총독부가 각종 사회단체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2 기호흥학회의 설립배경

을사늑약(1905년) 체결을 전후하여 일본이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펼치면서 대한 제국의 운명은 실로 위태로워졌다. 이처럼 절박한 시대상황 하에서 구국갱생의 활로를 찾기 위하여 다양한 형태의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을사늑약 체결 이전까지 민족운동은 젊은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서구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달성하자는 개화운동의 성격을 보였다. 그러나 을사늑약 체결을 기점으로 민족운동의 성격은 크게 전환되어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는 구국운동이 중심이 된다. 이 시기의 구국운동은 크게 항일의병투쟁에 의한 노선과 대한자강회 등 각종 단체들에 의해 추진된 애국계몽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노선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애국계몽운동노선은 국권회복의 길은 오직 실력양성을 통한 자강(自强)에 있다는 입장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애국계몽운동은 다시 민족 산업의 육성을 도모하는 식산흥업(殖産興業)운동과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려는 학문진흥(學文振興)운동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학문진흥운동이 추구하는 교육이란 종래의 전통적 유교교육이 아니라 서구 신문물을 익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교육이었으며,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이었다.

시세(時勢)의 변화에 따른 교육개혁의 필요성은 이미 청과 일본의 교육제도 개혁이나 선교사들이 설립한 사학 등을 통하여 인식되어 왔다. 정부도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시작으로 한 근대적 공립교육기관을 설치,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홍범14조(洪範十四條)반포, 교육에 관한 조칙(詔勅) 등을 통하여 자주독립의 기초가 될 교육을 권장하였으며, 근대적 교육제도를 마련하기 위하여 1904년에 이르기까지 13개에 달하는 법령을 제정, 공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수립한 신학제란 주로 일본의 학제를 참고해 모방한 것으로, 제도상의 변화를 가져온 것일 뿐 실제적 개혁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출세나 취직이 보장되는 소수의 학교 외에 다른 공립학교의 성과는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선교사나 민간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가 크게 발전하여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데, 특히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민간사립학교의 융성이 눈에 띈다.

사립학교에 의해 주도된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은 1906년경부터 새로운 흐름을 맞이한다. 소수의 선각자에 의한 개인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지던 교육구국운동이 이 시기부터는 애국계몽운동단체에 의한 집단적 운동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 시기의 교육구국운동은 학교의 설립은 물론 회보발행과 같은 언론활동, 강연회 개최 등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지역별로 여러 단체가 설립되어 지역의 교육진흥사업이 추진되었다. 기호흥학회는 그 중 하나로서 서우학회(西友學會)·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호남학회(湖南學會)에 이어 설립되었다. 그러나 조선인의 우민화를 지배력 강화의 핵심으로 생각하였던 일제 통감부는 이러한 흐름을 좌시하지 않고 전면적인 탄압을 시작하게 된다.

기호흥학회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집단적인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학문진흥의 기치를 걸고 창립된 것이다.

3 기호흥학회의 설립목적과 취지

기호흥학회 규칙 제2조는 “본회는 경기도 및 충청남북도에 흥학(興學)하기로 목적함”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3조는 “본회는 전조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학업을 권장하며 회보를 간행하여 일반 인사(人士)의 지식을 주입하며 경기도 및 충청남북도 각군(各郡)에 교육을 발전케 함”이라 규정하고 있다.

기호흥학회의 창립 취지의 구체적인 설명은 『기호흥학회월보』 제1호에 게재된 「본회 취지서」 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취지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본회 인사들은 국권상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특히 다른 지방과 달리 정치·문화·사회적으로 중심이 되는 기호지방 인사들이 선각자의 역할을 맡아 시대적 조류를 개척하여 국가발전과 민족교육에 앞장서야 한다.
② 본회의 정신은 흥학에 있으며,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이들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청년들을 계도하도록 한다.
③ 본회의 궁극적 목적은 국권회복과 민족갱생에 있으므로, 기호지방 인사들은 일심전력하여 분발하여야 한다.

정리하면, 기호흥학회는 국권회복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의 양성이 시급하다고 보고 흥학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특히 기호지방 인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러한 창립취지는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지역기반의 학회인 서우학회, 서북학회(西北學會), 호남학회,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등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대체로 ① 청소년 교육을 권면(勸勉)하고, ② 지방교육을 진흥하며, ③ 지역사회를 발전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4 기호흥학회의 조직

기호흥학회는 중앙본회와 지회로 구성되었다. 중앙본회는 회장과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 간사 등 임원진과 평의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의원은 20인, 임원은 직위별 각 1인으로 구성되었다. 평의원들로 평의원회를 구성하는데, 총회에서 위임된 중요사항을 처리하도록 되어 있어 기호흥학회의 활동은 평의원회의 의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호흥학회 규칙에는 지회설립에 관한 규정이 없으나, 『기호흥학회월보』 제1호에 실린 「본회 기사」에서는 “지회설립규칙 제3조 청원서식을 개정 후 가납(可納)하다”라는 언급이 있다. 이를 보면 지회설립에 관한 별도의 규칙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회의 설립은 기호흥학회의 중요한 사업목표 중 하나였다. 한성에 본부를 두고 있는 기호흥학회는 지방의 실태를 파악하여 교육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현지의 조직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기호흥학회월보』를 통해 독자들에게 지회와 학교를 설립함으로써 흥학선도(興學先導)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각군마다 권유위원(勸誘委員)을 두어 지회설립을 지원하도록 했다. 『기호흥학회월보』 제12호(1909년 7월 25일 발행)에 따르면 경기도에서는 광주, 수원, 양근, 장단, 교하, 강화의 6개 군에, 충청북도에서는 청주, 충주, 청양, 풍덕의 4개 군에 지회가 설립되었고, 충청남도에서는 서산, 공주, 연산, 당진, 해미, 목천, 홍주의 7개 군에 지회가 설립되어 총 17개소의 지회가 설립된 것으로 나타난다. 폐간 이후의 기록은 없으나 지회가 추가 설립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지회의 설립은 먼저 해당지방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지회 설립을 중앙본회에 청원하고, 중앙본회에서 실지 탐방을 실시하여 그 결과 보고에 따라 지회 설립을 인허하는 방식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탐방 절차를 생략하고 청원 즉시 지회설립을 인허해 준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기호흥학회의 창립 당시 참석자는 105인에 불과하였으나, 『기호흥학회월보』 제12호의 기록에 의하면 회원 총수가 1,462인으로 나타난다. 폐간 이후에도 회원 수는 다소간 증가하였으리라 생각된다.

5 기호흥학회의 활동

이처럼 빠르게 성장한 기호흥학회의 중심활동은 학교설립과 교육계몽활동에 있었다. 지회의 설립은 기실 이러한 활동을 위한 수단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기호흥학회의 활동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기호흥학회월보의 발간과 기호학교의 설립이다.

(1) 『기호흥학회월보』의 발간

『기호흥학회월보』는 1908년 8월 25일 창간되어 1909년 7월 제1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된 기호흥학회의 회보이다. 발행인은 김규동(金奎東), 편집인은 이해조(李海朝)였다.

『기호흥학회월보』의 발간 목적은 역시 흥학에 있었는데, 특히 각종 신학문의 소개에 역량을 집중하였다. 학식이 높은 회원은 물론, 전문지식을 가진 일반인사에게 강론과 기고를 부탁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신지식을 공급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신학문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많은 기고자가 필요했는데, 이용직 외 60인 이상이 저술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기호흥학회월보』의 성격에 대하여는 『기호흥학회월보』 제4호에 실린 「道德 敎育法」에서 보다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기호흥학회월보』의 기사는 대체로 「흥학강구(興學講究)」, 「학해집성(學海集成)」, 「예원수록(藝苑隨錄)」, 「잡조(雜俎)」, 「학계휘문(學界彙聞)」, 「별보(別報)」, 「본회기사(本會紀事)」의 순서로 게재되었다. 각 항목에서 다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흥학강구」에서는 학회 회원 및 일반 인사들의 흥학론과 기타 논설을 실었다. 국민정신 계도를 목표로 하는 계몽적 내용은 주로 이 부분에서 다루어졌다.

「학해집성」에서는 신학문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었는데, 관련분야에 따라 법률학, 정치학, 논리학, 경제학, 지리학, 교육학, 생리학, 화학, 광물학, 동물학, 농학 등으로 구분되었다. 눈에 띄는 것은 당대에 이미 상당히 강조되고 있던 외국어, 즉 어학 분야를 전혀 다루지 않은 점이다. 그렇지만 『기호흥학회월보』에 게재한 논설에서는 외국어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들이 있으며, 기호학교에서 일어를 정식 교과로 채택하여 교육한 점을 볼 때 이를 두고 어학을 경시(輕視)한 것이라 평가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된다.

「예원수록」과 「잡조」에서는 통상 짧은 문학작품을 수록하였다. 문학을 통하여 자주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하려 한 것이다.

「별보」에서는 당시 조령과 관보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여 전달하였다. 독자로 하여금 국가의 대소사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본회기사」에서는 기호흥학회의 제반활동상황을 전달하여 독자와 회원들의 관심과 협조를 구하고 있다.

이처럼 『기호흥학회월보』는 그 내용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는 학술지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에서는 『기호흥학회월보』의 내용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구독을 거절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1908년의 통계에 따르면 『기호흥학회월보』의 발행부수는 2천 부로, 한성에서 350부, 각 지방에서 1,650부가 배부되었다. 대금은 선납하거나 등기환(登記煥)으로 보낼 수 있었는데, 납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기호흥학회는 상당한 재정난에 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재정난은 『기호흥학회월보』의 폐간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미 『기호흥학회월보』 제5호에서부터 특별광고를 통해 대금의 신속한 납부를 요청해야 했고, 제10호에서는 대금을 회수하기 위하여 각 도(各道) 관찰사와 군수 등에게 협조를 구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본회기사」로 전하고 있다. 제11호의 발간 즈음에는 재정난이 극도로 심해져 학식이 있는 자는 기고를 통해, 구독자는 대금을 지불함으로써 『기호흥학회월보』의 발행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였으나 순탄치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통감부는 기호흥학회의 애국계몽활동에 주목하면서, 『기호흥학회월보』의 기사 내용을 문제 삼아 수차례 압수하는 탄압을 가하였다. 먼저 제6호에서 이기헌(李起(金+憲))의 「學問은 不可不參互新舊」가 문제되었고, 이후에도 제9호에 게재된 김기현(金璣鉉)의 「變之又變」, 제10호에 게재된 윤상현(尹商鉉)의 「學界의 照魔鏡」, 제11호에 실린 안종화(安鍾和)의 「興學이 爲國之急務」와 윤상현의 「精神的 敎育」과 같은 글이 국권회복을 논하는 불온한 기사라는 이유로 각각 압수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재정적 어려움에 더해 일제통감부의 탄압까지 받게 되면서 『기호흥학회월보』는 제1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고 만다.

(2) 기호학교의 설립

기호흥학회는 학교설립을 통한 교육활동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서울에 기호학교를 설립하고 1909년 6월 20일 개교하였다. 기호학교의 설립 목표는 특히 교사의 부족으로 지방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자격 있는 교사를 양성하는 것에 있었다. 기호학교가 사범학교(師範學校)로 설립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목표의식은 본과 설치에 앞서 속성과(速成科)인 특별과를 설치하여 1년 반의 교육을 통해 교사자격을 얻도록 한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기호학교의 개교 당시 학생은 95명이었는데, 약 2달 뒤 가을학기 개학 시점에는 204명으로 늘었다. 1908년 8월 일제통감부가 사립학교 통제를 위하여 사립학교령을 공포함에 따라, 기호흥학회는 1909년 3월 10일 당시 회장 김윤식(金允植)의 명의로 학부(學部)에 설립인가를 신청하여 같은 해 8월 26일 인가를 받았다.

특별과는 1910년 1월 10일 최초로 61명의 졸업생을 배출함과 동시에 폐지된다. 가중된 재정난 속에서 한정된 교육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호흥학회는 회원들의 기부금을 가능한 한 기호학교의 재정에 투입하면서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에 기호학교는 융희학교를 합병하는 등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기호흥학회는 서울의 기호학교 외에 기호 각 지방의 교육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기호흥학회의 발전은 오직 교육기관인 학교와의 연계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믿음 하에, 기호학교를 표준으로 하는 지방학교의 설립과 함께 학제와 교육의 통일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교사소개소의 개설이다. 당시 각지에서 여러 학교가 설립되었으나 필요한 교사를 제 때 모집하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많았다. 이에 기호흥학회가 교사소개소를 개설하여 수요처에 교사를 연결하였다.

또한 기호흥학회는 각 지방관(地方官)과 지역사회에 공문을 발송하여 학교의 설립과 교육진흥에 노력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공주군 향교에서 일정한 교육활동이 이루어졌고, 금란의숙(金蘭義塾)을 기호학교의 지교(枝校)로 받아들이는 등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6 기호흥학회의 해체와 역사적 의미

일제는 한국 병합과 함께 사회단체를 일제히 해산시켰다. 일진회(一進會)로 대표되는 친일단체는 물론이고 교육운동을 펼치던 서북학회와 같은 애국계몽단체들도 마찬가지였다. 기호흥학회 역시 이러한 처분을 피해갈 수 없었다. 기호학교가 융희학교와 통합한 1910년 11월, 기호흥학회 회원들은 서북학회, 호남학회, 교남교육회, 관동학회(關東學會) 회원들과 각 학회를 통합하기로 결의하여 새로 중앙학회를 구성한다. 이는 지방주의적 분열상을 극복하는 첫걸음이었지만, 조선총독부의 압제가 거세어지는 시대 상황 속에서 결국 힘을 잃고 말았다.

기호흥학회는 망국(亡國)이 가시화되는 절망적 시대상황 속에서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그러나 기호흥학회의 활동은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설정한 구국보다는 오히려 그 수단이자 단기적 목표인 교육활동에 중점을 둔 것으로, 체제 순응적이고 기능적인 교육운동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권의 회복과 민권의 신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회보를 간행하여 학문을 진흥한 것이 결코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 기호학교의 후신인 중앙학교가 3·1운동을 앞두고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운동계획을 수립한 책원지(策源地)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조선왕조의 500년 도읍지로 오랜 기간 권력의 중심에서 구습(舊習)에 젖어 왔던 기호지방을 무대로 창립되어 구습의 타파와 신교육을 주창(主唱)한 기호흥학회의 면모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기호흥학회의 배경은 지역적이었지만 그 정신은 오히려 국가적인 차원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호흥학회의 활동은 교육운동에 국한되었지만, 그들이 교육을 통해 뿌린 씨앗은 후일 3·1운동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운동으로 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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