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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협회

최대의 애국계몽운동 단체, 점차 친일화하다

1907년(고종 44) ~ 1910년(순종 4)

대한협회 대표 이미지

대한협회 회보 제1호

e뮤지엄(대한민국역사박물관)

1 설립과 주요 세력

일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였다. 1909년 8월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고 ‘보안법’과 ‘신문지법’을 만들어 일본을 비판하는 언론을 봉쇄하였다. 대한협회는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해 가는 시기에 활동하였다. 대한협회는 고종 양위 반대 시위 때문에 강제 해산된 대한자강회를 계승하여 설립되었으나 성격에 있어서는 다른 면이 있었다. 대한협회는 통감정치를 인정하고 통감부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정치활동을 하였다.

헌정연구회를 계승한 대한자강회는 오오가키 타케오(大垣丈夫)와 윤효정, 장지연이 주도하에 설립되었다. 대한자강회를 구성한 주요 세력은 헌정연구회 계열과 장지연 등 황성신문계였는데 헌정연구회 계열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한자강회 해산 후 오오가키 타케오가 중개자가 되어 대한자강회 계열과 천도교세력이 결합하여 대한협회를 창립하였다. 그는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대한자강회에 대한 해산명령을 취소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명칭을 개정해 새로운 단체를 설립하기로 하고 대한협회 조직에 착수하였다. 대한협회는 11월 17일 제1회 임시회를 열고 규칙 통과와 함께 임원진을 구성하였다.

대한협회를 구성한 주요 세력은 헌정연구회 계열, 황성신문 계열과 천도교 세력이었다. 창립 발기인은 권동진(천도교), 오세창(천도교), 윤효정(헌정연구회), 장지연(『황성신문』), 남궁억(南宮檍, 『황성신문』) 등이었다. 창립 당시 주요 임원은 회장에 남궁억(南宮憶), 부회장에 오세창(吳世昌), 총무에 윤효정이었다. 이처럼 대한협회를 구성한 주요 세력이 임원 자리를 분점하고 있었다. 천도교, 헌정연구회, 『황성신문』 계열의 연합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던 대한협회는 창립 1년경인 1908년 7월에 변화를 맞이하였다. 회장 남궁억이 사임하였고 새 회장으로 김가진(金嘉鎭)이 선출되면서 『황성신문』 계열이 후퇴하였고 천도교와 헌정연구회 계열이 약진하였다.

대한협회는 취지문에서 국부 증강을 위한 교육과 산업의 발달을 강조하였다. 강령은 1.교육의 보급 2.산업의 개발 3. 생명 재산의 보호 4. 행정 제도의 개선 5. 관민폐습의 교정 6. 근면 저축의 실행 7. 권리·의무· 책임· 복종 사상 고취였다. 중앙조직인 본회의 임원은 총재 1인, 회장 1인, 부회장 1인, 부장 5인(교육부, 실업부, 법률부, 재무부, 지방부), 총무 1인, 평의원 30인, 참의원 30인, 간사원 10인으로 구성되었다. 임원의 임기는 1년이었고 임원 외 회계와 서기를 각각 1인씩 두었다. 회보 발행을 위하여 편집 겸 발행인 1인을 두었다. 부와 군 지역에 지회를 설립하고 지회에서 먼 지역에는 분지회를 설치하였다. 중앙의 임원들은 지회 설립과 운영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대한협회 지회 및 분지회 숫자는 60개이고 중앙회원은 560여 명, 지방회원은 3,500명 정도였다.

대한협회는 『대한협회회보』와 『대한민보』를 간행하고 연설회를 개최하고 정부에 대한 질의와 건의를 하였다.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의 진위가 한국민의 이해에 합당한가 등 중요 문제에 대한 조사 활동을 수행하였다.

2 대한협회의 ‘보호정치’ 인식과 실력양성론

1904년 일본은 러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그리고 급기야 1905년 11월에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여 한국을 보호국화 하였다. 러일 전쟁 이전 한국인은 일본에 대하여 앞서 근대문명을 받아들였고 그 문명을 조선에 전달해주는 나라라 인식하였다. 하지만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한국인에게 일본은 침략자로 인식되었다. 근대문명의 전달자라는 인식과 침략자라는 2중의 인식은 애국계몽운동을 분화시켰다. 애국계몽운동은 국권회복을 위해 일본과 대결해야 한다는 주장과 근대 문명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본의 도움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나뉘어졌다.

대한협회의 활동가들은 러일 전쟁 이후에도 일본이 동양의 문명선도자로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고 동양 여러 나라에 근대문명을 전달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대한협회 세력의 이러한 사고는 일찍이 ‘을사보호조약’과 ‘보호정치’에 대한 낙관적 인식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특히 ‘보호조약’ 전문 중 ‘한국에 대한 보호권은 한국이 부강을 인(認)할 때에 철거 하겠다’는 내용의 문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였다. 이 문구는 고종황제가 요구한 ‘한국이 부강해져 독립을 유지하기에 족한 실력을 쌓으면 조약을 철회 한다’라는 내용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수정하여 넣은 것이었다.1909년 6월 대한협회 기관지인 『대한민보(大韓民報)』에 논설에 수록된 “한일조약 시 일본이 세계에 성명하기를 한국의 보호권은 한국의 부강을 인(認)할 시(時)에는 철거하겠다 하얏으니 …… 아(我) 한인(韓人)은 부강주의로써 국시를 삼아”라는 문구는 보호조약에 대한 이들의 신뢰를 잘 보여준다. 대한협회의 활동가들은 한국이 실력을 갖추어 근대문명을 이루었을 때 을사보호조약은 취소될 것이며 자연스럽게 국권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또한 이들은 외교권을 상실하였다 하더라도 보호국 하에서도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은 독립되어 내정 독립은 가능하다는 ‘내정독립론’도 주장하였다.

대한협회원들은 국권회복의 방법으로 실력양성론을 내세웠다. 대한협회 정치·교육·산업을 연구하여 지식을 쌓아 국력을 증진시키고 국민 개개인이 문명인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이렇게 실력을 기르면 문명한 상태가 되어 자연스럽게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입각에서 의병운동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대한협회의 대표적인 활동가인 윤효정은 중앙과 지회에서 행한 여러 차례의 연설에서 의병을 폭도로 규정하고 그들의 행동을 국력을 소모시키는 폭행이라 하면서 국가의 앞날은 대한협회에 맡기고 각자 본업에 충실하라고 하였다 대한협회의 지방 지회에서도 의병에 대한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3 정당이 되고 싶었던 대한협회

대한협회는 ‘전국의 사상을 통합한 국민적 정당’을 자임하였다. 대한협회의 전신인 헌정연구회-대한자강회는 입헌정치, 입헌군주제를 연구하고 계몽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대한협회에 와서는 정당이라 자임하면서 정당정치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정당으로써 정치활동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908년부터 ‘이완용(李完用) 내각 퇴진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09년 들어 일제의 대한정책이 강제 병합론으로 급변하자 보호국체제를 유지하고 그 안에서 정당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3파 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협회가 이완용 내각을 비판하면서 벌였던 대표적인 사건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문제와 서순사건(西巡事件)이 있었다.

1907년부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이 추진되고 1908년 8월에 계획이 구체화 되자 대한협회는 동양척식회사법 연구위원을 선정하고 대정부 질문서를 만들어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제출하였다. 3차례나 정부에 보낸 질문서가 거절당하자 총리대신 이완용과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의 각성과 퇴진을 촉구하였다. 이는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대응이라기보다는 이완용 내각 퇴진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 대장성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대한 설명서를 보내오자 대한협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 1909년 1월에 서유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순종황제와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송병준과 서북지방을 순회하던 중 송병준이 술에 취하여 황제 앞에서 칼을 뽑는 행패를 부린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대한협회는 송병준의 엄중문책을 주장하면서 일진회와 이완용 내각을 비판하였다.

4 ‘3파 연합운동’

대한협회는 1908년 임원진 변화 후 점차 친일적인 행보를 보였다. 1909년 9월에는 일진회와 연합하려고까지 하였다. 대한협회는 일진회와 힘을 합쳐 이완용(李完用) 내각을 몰아내고 정권을 창출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일진회는 이완용이 권력을 독식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때마침 일진회는 이완용 내각을 옹호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6월 14일에 사임함에 따라 대한협회, 서북학회와 연합하여 이완용 내각을 타도하고 새 정권을 만들어서 숙원사업인 합방을 촉진하려 하였다. 동상이몽이었으나 권력욕을 가진 세력들의 이해가 일치함에 따라 대한협회, 서북학회, 일진회의 3단체 연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을 계기로 상황이 급변하여 3파 연합은 결렬되었다. 대한협회가 매국당이라 평소에 공격했던 일진회와 연합까지 하게 된 것은 강한 권력지향성 때문이었다. 대한협회의 정치활동은 일제의 보호정치를 인정하면서 보호정치가 인정하는 합법적 영역 내에서 정당 활동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거나 정권에 참여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병탄을 달성하고 난후 정치적 성격을 띤 모든 단체를 해산시켰다. 1910년 8월 22일 각종 단체에 대한 해산조치가 단행되었고 대한협회도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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