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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를 기반으로 서간도 지역에서 무장 독립 전쟁을 전개하다

1919년

서로군정서 대표 이미지

서로군정서 군자금 영수증 용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개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는 일제강점기 서간도 지역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로, 1919년 3·1 운동에 자극받아 군정부(軍政府)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통합되면서 그 산하 기관인 군정서(軍政署)로 개편되어 서로군정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흥 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해 군인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서로군정서군은 국내 및 서간도 지역의 일제 통치 기관을 습격하고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집요한 ‘토벌전’에 이어 1922년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 결성에 참여하면서 해체되었다.

2 서로군정서 결성의 배경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을 전후해서 국내외 독립운동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일제의 침략적 팽창주의 노선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에 입각한 독립전쟁론에 따라 대일 독립전쟁을 추진하려 한 것이다. 따라서 만주·연해주에 이주한 독립운동가들은 항일정신에 기반을 둔 한인사회 조직에 총력을 기울였다. 만주에서는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이 중심적인 활동지였는데, 서간도 지역은 백두산 서북쪽 압록강 넘어 훈강(渾江) 일대와 송화강(松花江) 중상류 지역을 가리킨다.

서로군정서가 성립하기 전의 전사(前史)로서, 1910년대 서간도 지역에서 만들어진 단체로는 경학사(耕學社)와 이어 설립된 부민단(扶民團) 및 한족회(韓族會)를 들 수 있다. 우선 경학사는 1911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자치기관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경학사는 이회영(李會榮), 이동녕(李東寧) 등 신민회(新民會) 인사들과, 안동 일대의 유림 출신인 이상룡(李相龍), 김동삼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만주 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한다는 독립전쟁론에 입각하여, 자치 및 교육을 통해 독립을 위한 힘을 장기적으로 키우기 위해 경학사가 창립된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경학사의 활동은 점차 약화되었고, 경학사가 쇠퇴함에 따라 서간도의 각 구역에서는 저마다의 자치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것이 1916년 다시 정식으로 통합하여 구성된 자치 단체가 부민단이다.

부민단은 그 본부를 삼원보에서 남쪽으로 90리 정도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두었다. 부민단의 초대 단장으로 허협, 2대 단장으로 이상룡이 선출되었다. 부민단은 서간도 한인사회의 명실상부한 자치기관으로, 서간도 지역 6천명 이상의 이주 한인들을 관장하고 보호했다. 이 부민단의 중요 사업 중 하나가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의 운영이었다.

1910년대 서간도에서 설립된 경학사와 부민단 등의 자치기관은 3·1 운동 이후 한족회(韓族會)로 개편되었다. 한족회의 성립과 함께 군사조직으로서 군정부(軍政府)가 결성되었는데, 이 군정부가 이후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꾸었다.

3 3·1 운동 직후 서로군정서의 성립과 성격

서로군정서가 결성되기까지에는 1919년 3·1 운동으로 국내외에서 고조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큰 영향을 미쳤다. 1910년대 서간도에는 부민단을 포함하여 자치를 실행하고 아동 및 청년교육, 군사교육에 힘쓰던 여러 단체가 있었는데, 이 단체들이 3·1 독립선언의 소식을 접하고 3월 13일 한족회라는 이름으로 단합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족회는 서간도의 유하현 삼원포에 근거를 두고 자치를 주활동으로 삼으면서, 군사기관으로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서로군정서의 전신인 군정부는 러시아령에 세워진 대한국민의회나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출범한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 정부였다. 군정부는 군대를 편성하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할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아울러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조직체계도 갖추었다. 최고 책임자인 총재로는 이상룡, 부총재로 여준(呂準), 참모장으로 이탁(李沰)이 선임되었다. 군정부의 총재이자 한족회 회장이기도 했던 석주(石洲) 이상룡은 안동 출신의 혁신 유림으로 1911년 서간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경학사·부민단·한족회의 결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바 있었다.

그런데 군정부가 조직된 무렵 상해에서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성립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서간도에 수립된 군정부를 상해 임시 정부에 통합시키고 명칭을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을 이상룡이 받아들임에 따라, 1919년 11월 17일 상해 임시 정부의 특별국무회의에서 서간도의 군사기관인 군정부 및 한족회를 임시 정부의 통치 하에 두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후 1920년 3월말 군정부는 군정서로 그 이름을 변경하게 되었고, 이후 서로군정서라는 이름으로 상해 임시 정부 산하의 기관으로 공인되어 무장 독립투쟁을 담당했다.

서로군정서는 조직 당시 무장독립운동 단체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포함한 독립전쟁 수행을 목표로 했다. 독립전쟁은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고조된 독립의 분위기에 발맞춰 적절한 시기가 오면 수행될 것이었다. 당초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여름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약소국의 의견이 논의되기를 기대했지만, 이러한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1920년부터 서로군정서는 국제회의 등 외교를 이용하는 것보다 직접 국내 진격을 통해 독립을 도모하는 독립전쟁론을 주장했다. 따라서 국제무대에서 외교를 우선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4 서로군정서군의 활동

서로군정서군의 활동으로는 군자금 모집, 독립군 양성, 그리고 무장 활동 및 한족회를 통한 선전활동을 살필 수 있다. 무장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군자금이었다. 우선 서로군정서는 서간도 지역의 자치기구이자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한 한족회를 통해 군자금을 모집했다. 한족회는 서간도의 유하현·통화현·환인현·집안현·임강현·해룡현·홍경현 등 각 현의 지도자와 주민 1만여 호(약 6만 명)을 토대로 조직되었다. 한족회의 지방조직은 이전의 기구였던 부민단의 조직체계를 바탕으로 보다 효과적으로 기능했는데, 중국 당국의 묵인 하에 별도의 행정조직과 의회, 재판소를 갖추었던 것이다. 서로군정서는 한족회의 관할구역인 서간도의 한국인들에게서 1호당 1원 5각(角) 씩의 군자금을 부과하여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또한 서로군정서는 국내에 특파원을 파견해 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서간도와 가까운 평안도 지역 및 서로군정서 지도부의 출신지인 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이 모집되어, 자금 입수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으로는 신흥무관학교와의 연계를 통한 독립군의 양성을 살필 수 있다. 한족회는 1919년 5월 신흥 중학을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는 한편 고급 간부를 양성했다. 3·1 운동 이후 각지에서 몰려든 애국 청년들을 수용하고 독립군으로 교육시키기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자 신흥무관학교를 확대 운영하여 독립군 양성의 요람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한족회와 신흥무관학교는 서로군정서의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자치기관과 군대조직 및 군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 역할을 담당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은 이세영(李世永)이었으며, 연성대장에 지청천, 교관에 오광선(吳光鮮)·신팔균(申八均)·이범석(李範奭)·김경천(金擎天) 등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약 천여 명 이상의 독립군이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서로군정서의 군인으로서 관할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무장 활동에 참가하였다.

이와 같은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양성을 배경으로 서로군정서는 무장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서로군정서는 국내 및 서간도 지역의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고,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 파괴하는 등 다양한 작전을 수행했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서로군정서는 서간도와 평안북도에서 국내의 친일파 관료, 적의 밀정, 친일단체의 간부 등을 제거했다. 또한 서로군정서는 간도 지역에서 일제의 각종 통치기관에 대한 습격뿐 아니라 평안도와 함경도를 포함한 국내에서의 작전을 시도했다. 주 대상은 국경지역의 주재소와 경찰서였지만, 경상북도 지역의 관공서 폭파 또한 수행되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조선총독을 비롯한 총독부의 고관을 겨냥한 경성에서의 작전 또한 시도되기도 했다.

이러한 서로군정서의 무장 활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화되자, 서로군정서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협동하여 활동하고자 조약을 맺기도 했다.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는 동일한 취지의 군사기관임을 확인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절대 옹호하며, 군사적인 주요 안건이나 사관 양성, 무기 구입 등에 대해 서로 협조할 것을 합의하였다.

서로군정서와 한족회는 민족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선전활동 또한 신문 발간을 통해 전개하였다. 한족회는 1919년 6월 24일 『한족신보(韓族新報)』를 기관지로 발행하여 서간도 지역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며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한족신보는 순한글 신문으로 주 2회 발행되었으며, 재만 동포들의 생활과 주변 정세를 소개하고 한족회의 활동을 알리는 내용을 실었다. 또 지리나 역사에 대한 글을 게재하여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데 기여하고, 논설을 통해 독립운동의 방략을 제시했다. 그러나 『신한민보』는 1920년 1월 15일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들에 의해 폐간되고 만다. 한족회에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새로 『새배달』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신문을 간행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언론활동을 이어나갔다.

5 서로군정서의 계승

1920년 일제는 만주의 항일독립군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군이 한국 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펼친 것이다. 일본군은 점차 활발해지는 독립군의 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대규모의 정규군을 만주로 투입하는 ‘간도지방 불령선인 소토계획’을 수립했다. 중국영토인 만주에 출병하기 위한 구실로 중국 마적을 매수해 혼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도록 조작한 혼춘사변을 1920년 10월 일으켰으며, 이어서 재만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주둔군 제19·20사단, 시베리아 출병군인 제11·13·14사단, 만주파견군과 관동군 등에서 총 2만 명의 병력을 만주로 투입했다. 독립군은 일본군의 추격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속이나 중ㆍ소국경지대로 부대 이동을 단행하였다. 계획과 달리 독립군부대를 소탕하지 못하고 오히려 청산리 대첩과 같은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자,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박멸한다는 미명 하에 무고한 한인들을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자행했다. 1920년 즉 경신년의 3, 4개월 동안 벌어진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로 수많은 동포가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일제의 대토벌 작전에 따라 서로군정서는 본부를 북만주 지역의 액목현(額穆縣)으로 이동시켰고, 백두산 기슭의 안도현(安圖縣)에 군사 기지를 두었다. 안도현 지역에 있던 서로군정서군은 지청천이 이끄는 신흥무관학교 사관생도 300명이었는데, 이들은 안도현 삼인방(三因坊)에서 홍범도(洪範圖) 부대와 합류하였다. 이들은 다시 일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대인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고, 여러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시도하여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였으나, 1921년 6월 항일무장투쟁사의 참극인 흑하사변(黑河事變, 또는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되었다. 이는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을 벌인 것으로, 독립군의 통수권을 두고 내부의 노선 차이에서 빚어진 분쟁이었다. 이 참극으로 많은 인명이 살상되어 독립군 부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살아남은 독립군 부대는 각기 세력별로 병력을 수습해 만주로 돌아와 활동하였다. 한편 서로군정서의 주력 부대와 별개로 서간도 일대에 계속 주둔하였던 채찬(蔡燦)의 부대는 일제의 앞잡이 기관인 보민회(保民會)과 일본거류민단 등을 소탕하였다. 이 부대를 포함하여 서로군정서군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다시 독립운동의 기반을 재건하기 위한 통합 조직 건설에 참여하였다. 1922년 대한독립단·서로군정서·보합단·광한단·광복군총영 등 여러 독립군 단체 대표들은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하고, 통합 조직체로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대한통군부는 1922년 8월 더욱 확대된 조직인 통의부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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