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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新民會]

일본의 과장과 실제 사이에서 애국계몽과 무장투쟁을 도모하다

1907년(순종 1)

신민회 대표 이미지

105인 사건으로 용수를 쓰고 끌려가는 사람들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1 개요

신민회(新民會)는 1907년에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다. 안창호, 이승훈, 윤치호 등이 주도하여 신민회를 설립했다. 교육과 출판을 통한 애국계몽운동만이 아니라 무장투쟁을 위한 국외 독립군 기지 활동도 펼쳤다. 그러나 신민회는 1911년 일본이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으며 조직의 실체가 드러났다. 신민회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이어나갔다.

2 신민회의 조직과 규모

1907년 안창호(安昌浩)는 신민회 결성을 위해 여러 인물과 접촉했다. 서울에서 양기탁(梁起鐸), 유동열(柳東說) 등과 접촉하고 1907년 4월에는 서북지방을 순회강연하며 이승훈(李昇薰) 등과 만났다. 안창호는 귀국 이전에 이미 미국에서 신민회 조직을 위한 규약서 초안을 작성했었다. 안창호가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조직하려 한 첫 번째 이유는 이미 국권이 기울었기 때문에 일본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는 원활한 활동이 어려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안창호가 공화정(共和政)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여전히 황제가 존재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황제권을 부인하고 공화정을 지향하는 단체를 공공연히 만들기에는 안창호도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안창호는 신민회 조직과 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하는 대신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설립을 통해 합법적 구국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민회의 창립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대체적으로 1907년 경으로 보고 있다(1906년 또는 1908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05인 사건 당시 일제 측이 작성한 신문조서 등을 살펴보면 신민회의 총본부는 미주(美洲)에 있었고 국내에도 중앙과 지방 총회와 지회 및 분회조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상해(上海)와 러시아 등 해외에도 지회가 있었으며, 회원 수가 국내 12만 명과 국외 10만 명 등 무려 22만 명에 달했다고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지나치게 과장된 측면이 있다.신민회의 조직체계와 명칭은 일본이 청년학우회의 조직과 명칭을 신민회의 조직체계와 명칭으로 확대한 것이다. 청년학우회를 포함한 신민회 외곽 단체, 즉 대성학교, 오산학교(五山學校), 보창학교(普昌學校), 태극서관(太極書館) 관계자, 잡지 『소년(少年)』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약 30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편 신민회의 지방조직은 평안북도와 평안남도 조직으로 나뉜다. 평안남도의 조직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최광옥-안태국(安泰國)-장응진(張膺震)으로 이어지는, 교육사업에 종사하던 인맥에 의해 결성되었다. 그 구성원은 신민회의 표면단체인 청년학우회, 동제회(同濟會) 등의 회원이 중심이었다. 반면 평안북도의 조직은 분회까지 갖추었으며 평안남도의 조직에 비해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이승훈을 중심으로 양준명(梁濬明)-이용화(李容華)-홍성린(洪成麟) 등으로 이어지는 상공업자들이 핵심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3 애국계몽운동과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신민회는 교육·출판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역량을 축적하려고 하였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신민회의 표면단체의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육 분야에서는 대성학교와 오산학교의 설립과 운영(運營)에 관여했다. 대성학교는 그 건학목표를 민족운동을 위한 간부를 양성하는 데에 두었던 만큼,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이 아니라 애국심과 상무(尙武) 정신을 기르려 하였다. 그 외에도 신민회 간부 이동휘는 강화읍에 보창학교를 세워 민족교육과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보창학교는 그 외에도 개성(開城), 안악(安岳), 함흥(咸興) 등 각 지방에서도 설립되었다.

신민회의 출판활동을 위한 표면단체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들 수 있다. 조선광문회는 1910년 10월에 최남선(崔南善)이 한국의 고서(古書)를 수집하고 간행할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그 외에도 신민회는 태극서관(太極書館) 경영하며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기관지로 활용했으며, 잡지 『소년(少年)』도 간행했다. 『대한매일신보』와 『소년』을 통해 한국의 역사에서 활약한 전쟁 영웅 또는 외국의 건국영웅과 독립운동의 역사를 소개하여 애국심을 고취했다.

신민회는 청년학우회를 조직했다 윤치호·박중화(朴重華)·최남선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청년학우회는 신민회의 외곽단체로서 표면적으로는 수양단체임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했다. 청년학우회는 평양(平壤)·의주(義州) 등지에 조직을 확대했다.

신민회는 회사설립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고도 하였다. 신민회는 일제의 경제적 침략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신민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서북지방의 상공인층이었다. 상업회의소(商業會議所)·협동회(協同會) 등의 상인단체를 조직하거나, 평양자기회사(平壤磁器會社)를 설립했다. 이는 신민회의 민족산업진흥의 시범사업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신민회는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도 구상했다. 1910년 3월에 회의를 통해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자 그 핵심으로서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국내에서는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1910년 4월에는 신민회 간부들이 ‘청도회의(靑島會議)’를 열어 독립군 기지건설에 대한 구체적 실행방안을 협의했고, 1910년 12월에는 양기탁의 집에서 간부회의를 열어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한인을 집단으로 서간도에 이주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그 결과물이 1911년에 만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신한민촌(新韓民村)과 사관양성기관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였다. 그 외에도 신민회에 참여했던 이종호(李鍾浩)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우는 데에 큰 기여를 하며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4 신민회의 성격에 관한 일본의 인식 변화

신민회의 존재는 일본의 시선에 의해서 규정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인식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이 바라본 신민회란 첫 번째 단계에서는 구국계몽단체, 두 번째는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단체, 세 번째는 총독암살을 기도한 무장암살단체였다.

일본이 신민회의 존재를 감지한 것은 1909년 3월 경이었다. 처음에 일본은 신민회가 미주에서 결성된 국민회(國民會)의 지부로 파악했을 뿐이다. 따라서 1909년 3월경에 일본이 바라본 신민회는 구국계몽단체 정도였다. 온건론자인 안창호가 신민회를 암살과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단체로 결성하는 것은 어려웠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일본은 이후에 발생한 안중근(安重根), 이재명(李在明) 사건 등 암살과 테러 사건의 연루자들이 서북지방 출신의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 결과 배후 비밀조직의 존재를 추측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105인 사건’이란 1911년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증거가 부족했으나, 일본은 이 사건을 통해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했다.

왜 일본은 이 사건을 조작했는가? 식민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 항일운동 세력을 탄압하던 중, 1910년 11월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안명근(安明根)이 체포되는 ‘안악사건(安岳事件)’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 사건을 기회로 독립운동가들을 대량으로 체포했다. 일본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신민회의 실체를 포착했다. 그 결과 신민회의 성격 대한 일본의 인식은 국외 독립운동 건설 준비단체와 무장암살 단체로 변화했다. 그 이유는 공판과정에서 피의자들이 국외 독립군기지 설치와 무장암살을 구상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민회는 계몽운동 단체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건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민회 회원들은 1910년대 이후 간도, 상해 및 밀산(密山) 등지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구체적 사업을 추진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 등을 설립했다. 그러나 암살활동에 관한 증거는 찾기 어려우며 이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과장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 ‘105인 사건’ 후 피의자들의 행방

‘105인 사건’은 조작된 사건이었다. 상당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지역학교의 교사와 학생 및 잡화업과 유기업 등 소규모 생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총독암살 미수범’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피의자로 구속되어 고문을 당했다. 105인 가운데 19명은 이후 간도, 상해, 미주지역 등 국외 망명의 길을 걸었다. 이들은 주로 재산의 정도가 많지 않았으며, 장로교(長老敎)가 많았다. 망명 이후 활동은 망명지의 상황과 특성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어 간도로 망명한 인물들은 용정촌(龍井村) 일대의 민족학교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만주 일대 독립군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이동휘는 만주만이 아니라 연해주 지역에서도 활동을 이어나갔다. 상해지역으로 간 망명자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활동에 참여했고, 미주로 건너간 인물들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중심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반면 국내에 남았던 피의자들 가운데 행적이 뚜렷한 대부분은 출옥 후 본래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학교와 교회로 돌아가서 교육과 목회 활동으로 복귀했다. 이들은 주로 국외 망명자에 비하면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였고 비교적 안정된 직업이 있었다. 종교 및 사회경제 분야에서 계속 활동하던 이들은 3·1 운동이 일어날 때 지역 유지로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반면 친일로 경도된 인물들도 있었다. 이들의 상당수는 신학문을 수학하여 당시 지식인층에 속했다. 또한 중산층 이상의 재산 소유자들이었으며 이들의 재산 정도는 피의자 전체 105인의 평균재산 수준보다 훨씬 많았다. 이 중에 윤치호(尹致昊)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윤치호는 1890년대 말부터 독립협회(獨立協會) 창립과 『독립신문(獨立新聞)』 창간 등에 관여했으며, 높은 학식과 명성으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석방된 이후 점차 친일의 길을 걸었다. 윤치호는 독립사상 배척과 일선융화(日鮮融和)를 표방하며 결성된 동민회(同民會)에서 활동했고, 1937년 더 적극적인 친일의 길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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