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신한청년당

신한청년당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대표 파견을 주도하다

1918년

신한청년당 대표 이미지

신한청년 창간호

공훈전자사료관

1 개요

신한청년당은 1918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여운형,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우 등 6인을 중심으로 창립된 청년독립운동 단체이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대표로 김규식(金奎植)을 파견하여 외교독립노선을 주도했으며, 3·1 운동이 발생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기초를 만들었으며, 대부분의 인사들이 임시 정부의 중요 인물로 활동했다. 1920년 이후 점차 세력이 줄어들다가 1923년 끝내 해체되었다.

2 신한청년당 결성의 배경

1910년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상하이는 세계 열강들의 조계지(租界地: 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가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미 각국인의 왕래와 거주가 많아 국제적인 여론 형성과 정보수집, 외교활동 전개에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다. 또한 상하이는 중국 혁명의 중심지로, 중국인 지사들이 활동하던 곳이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병합된 직후 상하이로 망명한 대표적인 인물은 신규식(申圭植), 김규식(金奎植),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홍명희(洪命熹) 등이 있다. 1910년대 중반기가 되면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거나 독립운동과 유학을 목적으로 했던 인물들이 상하이로 건너온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우혁(鮮于爀), 여운형(呂運亨), 장덕수(張德秀) 등이었다. 국내에서 3·1 운동이 전개된 후 1919년 3월 말부터는 각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상하이로 망명하게 된다. 이미 만주나 간도, 러시아령에서 활동했던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등과, 국내에서 망명한 신익희(申翼熙), 김구(金九)등이 있었다.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단체들이 조직된다. 그 중 동제사(同濟社)는 신한청년당 결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동제사는 1912년 7월 신규식과 박은식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신규식은 중국혁명이 한국 독립에 필연적인 연관성을 가진다고 판단하여 중국혁명에 투신하고, 많은 중국 혁명지사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활동했으며, 중국에서 1차 혁명이 성공한 후 동제사를 결성했다. 신규식이 중심이 된 동제사는 장차 전개될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교육을 중시했고, 중국의 각종 군사교육기관을 통해 100여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동제사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소장층 청년 운동가들도 가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동제사 지도층의 영향 아래, 1910년대 중국 본토에서 전개된 한국인 독립운동의 축적된 역량을 받아들이며 성장해 나갔다. 동제사의 소장층은 세계 정세의 변화와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독립운동의 전개방향을 찾고자 노력하며 1차대전이 끝나기 전인 1918년 여름부터 이미 정기적은 모임을 가지고 앞으로의 운동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신한청년당이 결성된 배경 중 또 하나는 세계 정세의 변화이다. 1911년 중국에서는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이 계속 충돌하는 중에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1917년에는 러시아혁명이 일어났으며, 1918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고했다. 1차대전에서 일제는 승전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지위가 공고해지는 시기가 도래하면서, 한국인들 중에는 독립전쟁이 아닌 외교를 통해 독립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외교독립노선을 실현하기 위해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어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3 신한청년당의 결성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이 끝나게 되었고, 전후(戰後) 처리를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강화 회의에 앞서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전후 처리 원칙으로 14개조의 내용을 발표했다. 이 중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에게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제5조인 민족자결의 원칙이었다.

1918년 11월 중순 경에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Charles Crane)이 상하이로 왔다. 크레인은 윌슨의 14개조를 선전하면서 파리 강화 회의는 약소민족에게 절호의 기회라는 발언을 했다. 여운형은 이러한 발언에 상당한 자극을 받고, 파리 강화 회의 중국대표의 소개로 크레인을 만났다. 여운형은 크레인에게 “이 기회에 우리는 일제의 압박과 지배에서 해방되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회의에 우리도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참상과 일본의 야만적 침략성을 폭로해야겠는데 당신의 원조를 요청하는 바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국제정세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포착해서 독립운동에 유리하게 활용하고자 한 것이 신한청년당 결성의 계기였다.

신한청년당이 언제 결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런데 1918년 11월 28일자로 작성된 「한국 독립에 관한 진정서」가 신한청년당의 대표 명의로 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명칭은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呂運弘)에 따르면 국제회의에 개인 명의로 진정서를 제출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기 때문에 상하이에 머물던 여러 동지들을 모아 ‘벼락 정당’을 조직한 것이 신한청년당이라고 한다. 1918년 여름부터 이미 동제사의 청년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반 위에 1918년 11월 진정서 작성을 즈음한 시기에 신한청년당이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신한청년당이 결성된 당시는 구성 인원이 소수에 불과했다. 여운형의 진술에 따르면 초기 인원은 8명이었다고 한다. 대체로 1918년 여름부터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던 인물 중 자금과 대표선정 문제로 입당하지 않은 신석우(申錫雨)를 제외하고, 여운형, 조동우(趙東祐), 장덕수, 김철(金澈), 선우혁, 한진교(韓鎭敎) 등이었다. 여기에다 서병호(徐丙浩)와 파리 파견 대표로 정해진 김규식이 입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립 이후 당원은 점차 확대되어, 3·1 운동 이후가 되면 상하이로 망명한 인물들이 크게 증가하면서 50명 이상의 규모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한청년당은 국내외 정세변화에 따라 독립운동의 방향을 찾고자 하였으며, 가장 큰 목표는 무엇보다 대한독립이었다. 1920년 2월에 개최된 제1회 정기총회에서는 당의 3개 강령이 채택되었다. 3개 강령이란 ① 대한독립, ② 사회개조, ③ 세계대동이다. 즉 첫 번째 목표로 대한의 독립을 완성하고, 독립을 회복한 다음에는 문화적·도덕적으로 민족을 개조하여 새로운 한민족을 만들며, 학술과 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해서 한민족의 새로운 문화가 전 인류에게 위대한 행복을 주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문화적·도덕적으로 민족을 개조한다는 것은 전근대적인 요소들, 즉 억압적 가족제도, 남녀차별, 직업상의 귀천, 계급제도 등을 배격하고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사회제도로 개혁해 나가자는 뜻이었다.

4 파리 강화 회의 한국대표 파견

크레인의 연설을 듣고 그와 면담을 가진 후 여운형은 장덕수, 조동우 등과 협의했다. 그 결과 파리 강화 회의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영문으로 독립청원서 2통을 작성했다. 한 통은 1918년 11월 30일에 상하이를 떠나는 크레인에게 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전하게 했고, 또 한 통은 한국 대표가 파리에 가지 못하게 될 경우 대신 제출해 달라고 당시 상하이에서 발간되던 월간잡지 『밀라드 리뷰(Millad Review)』의 사장 밀라드에게 맡겼다. 이 중 후자의 것은 밀라드가 중국대표와 함께 일본을 경유하여 파리로 가다가 가방을 도난당하면서 분실되었다고 한다.

이 독립청원서는 1918년 11월 28일자로 작성되었고,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의 명의로 보내졌다. 이 글은 세계 정세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성 및 한국의 피압박 현상 등에 대한 내용으로 서술되었다. 여운형은 이 글에서 먼저 세계대전의 종식을 가져다 준 미국의 역할을 치하하고, 다음으로 일제의 악랄한 정책을 비판한 뒤 한국이 처해있던 상황을 정신적·정치적·경제적인 면으로 나누어 서술했으며, 끝으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밝혔다.

여운형은 먼저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일본의 목적이 중국을 장악하려 함에 있다고 했다. 일본의 근본 정책은 서구 세력을 아시아에서 축출하고 대만을 근거지로 하여 남양군도(南洋郡島)까지 장악하고자 함에 있으며, 이를 위해 해군 확장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했다. 여운형은 일본이 결국 세계적인 제국을 꿈꾸며 미국과의 혈전도 불사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이 모든 야심이 바로 한국에 대한 침략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일제의 한국 병합을 묵인한 것은 세계의 큰 불행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서 한국이 처해있는 어려운 상황을 기술했다. 그러면서 일본제국주의는 장래에 전 아시아를 침식하여 대통령 윌슨 씨의 평화주의·민주주의를 정복할 것이며, 조선인은 반드시 독립을 회복함과 동시에 민주주의가 아시아에 존재해야 한다고 미국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내용으로 매듭을 지었다.

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대표 선정을 둘러싸고 충돌이 생기기는 했으나 결국 김규식을 대표로 선정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김규식이 미국 버지니아이의 로녹대학(Roanoke College) 영문과 출신으로 영어에 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김규식은 텐진(天津)에 있다가 상하이로 와서 신한청년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1919년 1월 말 파리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김규식이 파리로 떠나기에 앞서 자금과 선편(船便)에 어려움이 있었다. 필요한 경비가 당장 모자랐기 때문에 김규식 스스로 천 원을 부담했다. 그리고 장덕수가 자금을 구하기 위해 부산에 다녀와서 2천 원을 내는 등, 신한청년당에서 4천 원을 모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필요한 자금을 이후 각지에 대표를 파견하여 모금하려고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파리로부터 김규식의 송금 요청이 1919년 7월에 있었고, 이에 신석우가 5천 원을 내는 등 7천 원을 모아 보냈다. 이후 임시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파리대표에 대한 지원 사업이 신한청년당에서 임시 정부로 이관하게 된다.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첫 움직임은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각지로 대표를 보내어 국제정세를 설명하며, 파리대표의 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으고 이를 후원할 국내외 독립운동의 전개를 촉구하고자 한 것이다. 선우혁과 김철, 서병호, 김순애(金淳愛)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그리고 여운형은 만주와 러시아령으로 가서 각각 활동했다.

5 임시 정부 활동

파리 대표 파견 소식은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이나 국내의 3·1 운동 추진에 큰 자극을 주었다. 특히 당원 중 신민회 계열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 인사와 연결되어 있던 평안도 지역 기독교계 세력들이 한 계통이 되어 3·1 운동을 추진하는 데 추진력을 불러 일으켰다. 아울러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은 국내 천도교 지도자들에게도 자극을 불러 일으켜서, 3·1 운동이 발생하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신한청년당은 상하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 정부 조직 업무에 착수했다. 독립임시사무소를 모체로 하여, 일본과 만주, 미국 등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집결했다. 1919년 5월 안창호(安昌浩)가 상해에 도착한 뒤 임시 정부의 조직은 체계화 되었다. 여운형은 임시 정부의 요직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민단장(民團長)의 이름으로 주로 각국 외교관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와 협조를 구했다. 그리고 여운형을 제외한 나머지 당원들은 대거 임시 정부의 실무진으로 활약하며 임시 정부의 정상적 운동과 독립운동의 활발한 전개를 도모하게 되었다.

신한청년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 활동은 별 소득 없이 끝나고, 이들은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1921년 11월부터 미국에서 열린 워싱턴평화회의에 또 한번 기대를 했지만 역시 실패로 끝났고, 미국을 중심으로 했던 외교노선은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때 소련에서 지원하겠다는 제의가 있었고, 이것이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원동민족근로자대회(遠東民族勤勞者大會)이다. 여운형은 김규식과 더불어 신한청년당의 대표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제시된 한국의 투쟁방법은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임시 정부를 지지하되 이를 개조케 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논의는 곧 임시 정부의 대외관계를 미국 중심에서 소련 중심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이었고, 이동휘 계열을 통한 자금지원으로 곧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개최를 가져왔다.

신한청년당은 송병조(宋秉祚)를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파견했다. 당시 이 회의에 참석했던 단원들은 여운형, 선우혁, 이유필(李裕弼), 한상섭, 김철, 김순애, 김인전(金仁全) 등이었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된다는 창조파와, 임시 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개편, 보완하여야 한다는 개조파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난항을 거듭했는데, 임시 정부의 수립과 기초를 주도했던 신한청년당은 당연하게도 개조론을 주장했다.

6 신한청년당의 해체

신한청년당은 1920년대 점차 쇠약해졌다. 그 이유는 첫째로 안창호의 흥사단(興士團)으로 당원들이 이탈해간 것이다. 다수의 신한청년당원이 흥사단 원동지부(遠東支部)에 가입하게 되면서 신한청년당의 당세가 약화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여운형이 공산주의자 그룹에 가입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임시 정부 측에 속하는 김구, 장붕, 이유필, 김인전 등이 탈당하게 되었다. 신한청년당이 1923년 말에 해체되는 이유도 무엇보다 여운형이 공산주의자 그룹에 가담한 데서 비롯된 임시 정부와의 알력 때문이었다.

신한청년당이 이처럼 해체되기는 했지만 1925년 초 부활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박은식(朴殷植)을 중심으로 하여, 극도로 혼란에 빠진 임시 정부를 정비하고 강화하기 위해 외곽단체로서 신한청년당의 부활을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신한청년당 부활 시도는 결국 일시적인 움직임에 그치고 말았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