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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

일제 식민지화에 앞장섰으나 병합 후 해산되다

1904년(고종 41) ~ 1910년(순종 4)

일진회 대표 이미지

일진회 회원 신표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일진회는 독립협회와 동학에 소속된 인물들이 친일과 반정부를 표방하면서 1904년 12월 2일에 결성된 단체였다.

2 일진회의 결성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 체결이 체결되자 한국에서는 국권 회복운동이 일어났다. 이 시기 국권 회복운동은 한편으로는 계몽운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으나 일진회는 일본에 협력한 반민족단체였다.

일진회는 독립협회의 흐름을 이어받은 (원)일진회와 동학의 일파인 진보회가 결합하여 창립되었다. (원)일진회는 유신회(維新會)라는 이름으로 1904년 8월 18일 서울에서 조직되었고 바로 일진회로 개명하였다 . (원)일진회의 회장은 윤길병(尹吉炳)이었으나 실제 (원)일진회를 조직한 자는 송병준(宋秉畯)이었다. 송병준은 일본에 망명해 있다가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주한일본군 사령부의 통역 자격으로 귀국하여 일진회를 조직하였다. (원)일진회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요구하였고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는데 1904년 10월부터 노골적으로 친일적인 행각을 드러냈다. 한국경찰은 이 단체가 반정부적이라는 이유로 집회를 저지하였지만 일본헌병이 이를 막아줄 정도였다. 이들은 일본 덕분에 한국이 주권을 찾게 되었고 러일 전쟁은 동양평화와 한국 독립을 위한 대의에서 일어난 전쟁이며 한국협약은 한국 내정을 개선하여 인민을 구제하기 위해 체결된 것이라는 등의 주장을 하였다.

진보회는 동학계통의 단체였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孫秉熙)는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도움으로 대한제국에 의해 탄압받고 있던 동학을 부흥시키려 하였다. 이를 위하여 손병희는 이용구로 하여금 일본 측과 접촉하도록 하였다. 이용구는 1904년 일본군에 1만원을 기부하였고 대동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대동회는 이후 진보회로 개칭하였는데 전국적인 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합동전부터 일진회와 동학의 진보회는 긴밀한 관계를 가졌으며 양회의 주의와 목적은 반정부와 친일이라는 부분에서 일치하였다. 진보회는 동학농민운동 이후에도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반정부적이었다. 독립협회의 흐름을 이어받은 (원)일진회와 동학교도로 구성된 진보회는 구성원의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상당히 달랐다. 일진회와 진보회는 1904년 12월 2일 일진회라는 이름의 단체로 통합하였는데 (원)일진회 계열의 회원이 3,670명, 진보회 계통의 회원이 117,735명이었는데 당시 활동했던 단체들 중 최대 규모였다.

합동하여 거대 조직이 된 일진회는 처음에 중앙본부와 지방본부가 따로 있으면서 이원적인 운영을 하였지만 1905년 이를 개선하여 중앙본부와 각 지부회를 두었다. 회장은 윤시병(尹始炳), 지방총장은 이용구(李容九), 평의원장은 실질적인 지도자 송병준이 담당하였다. 1905년 11월 윤시병이 사임한 후 이용구가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이렇게 해서 이용구, 송병준이 일진회의 중심이 되었다.

3 일진회의 주장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치, 경제, 사회 방면에서 개혁을 주장하였다. 정치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고 황제권을 약화시켜 민권을 확대하고 정치와 관리의 부패를 혁신하자는 주장이었다. 경제적으로 농업에서 공업과 광업으로 산업의 중심을 전환하고 농업은 기계화 상품화하고 농업회사를 설립하자고 하였다. 일진회는 경제적 방면에서 식산흥업을 주장하였다. 또한 화폐의 정리, 무명잡세 폐지, 금융기관 설치 등을 주장하였다. 사회적으로 유교적인 풍습과 습관 탈피를 주장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근대적인 문명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4 일진회의 일본인식

일진회는 설립식부터 군경의 공격을 받아 무산될 위기를 겪었으며 설립 후에도 대한제국 정부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조선이 ‘보호국’화되자 일진회는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한달 후인 12월부터 일진회 회원들은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일진회를 보호통치를 위한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였다.

일진회는 대한제국의 개혁 과제를 제시하면서 일관되게 친일적인 입장에서 있었다. 그것은 일진회가 일관되게 일본을 문명의 상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진회는 일관되게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문명개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일진회는 문명의 상징인 일본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하였다. 친일행위의 대가로 일진회는 일본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통감의 보호 하에 일시적이지만 정치결사로서 정치적인 진출을 이룰 수 있었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는데 이용하기 위해서 일진회를 보호, 원조, 육성하였는데 일진회의 창립과 활동의 배후에는 항상 일본이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주차군은 일진회를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비호하였다. 한국주차군은 전쟁 중에 한국을 군용 인부로 동원하였는데 이때 일진회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한편 일진회에 대한 한국주차군과 통감부 간에는 이견이 있었는데 반정부적인 일진회를 내각이 해산시키려 했을 때 통감부 측은 찬성한 반면 한국주차군을 일진회를 비호하였다. 통감부는 내각을 친일화 시키려 했기 때문에 반정부적인 일진회를 편을 들 수 없었다. 일진회는 한국주차군의 비호를 맡으면서 활동하였고 모금운동을 하고 기부를 하고 인력을 제공하는 등의 친일 활동을 하였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강화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이 보호국화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일진회는 바로 보호국화를 자청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전쟁이 끝나서 활용 가치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일진회는 일본의 환심을 사서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기 위해 보호국화를 자청하고 나섰던 것이었다.

5 일진회의 ‘합방’ 운동

1905년 12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흑룡회의 주간인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를 대동하고 조선에 왔다. 우치다 료헤이는 재야 낭인으로 우익단체인 흑룡회(黑龍會)를 창립하였고 한일 강제 병합을 줄곧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러일 전쟁 후 일진회는 대한제국정부와 통감부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이용구가 동학에서 퇴출되자 위기에 빠졌다. 손병희는 동학의 부흥을 위한 일본군에 협력하도록 이용구에게 지시하였으나 그의 지나친 친일행각을 못마땅해 하였다. 그러던 차 이용구가 보호국화를 자처하는 행동을 하자 이용구를 교단에서 내쫓은 것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송병준이 1906년 8월 23일 경무청에 구속되자 이용구는 우치다 료헤이를 만나 협력을 요청하였다. 우치다 료헤이는 송병준을 석방시켜주는 대신 한일 강제 병합 운동을 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이용구는 이를 기꺼이 수락하였다. 일진회는 우치다 료헤이를 통해서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연결되어 지원을 받았다. 일진회는 1907년 1월부터 매월 2000원 상당의 보조금을 받았고 5월에는 육군으로부터 10만원을 받기도 했다. 1907년 5월 일진회는 박제순(朴齊純)내각을 대신하여 이완용(李完鎔)내각이 출범하였으며 송병준이 농상공부대신으로 이완용 내각에 합류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이 발생하자 송병준, 이용구와 우치다 료헤이는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는데 앞장섰다. 고종이 퇴위 한 직후인 7월 24일에 한일신협약에 체결되었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다. 그리고 사법권 위임, 일본인 차관 임용, 경찰권 위임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의병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일진회는 11월 19일 자위단을 결성하였다. 통감부 측에서는 일진회가 무장할 경우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를 염려하여 일진회의 자위단 조직을 중지시켰는데 일진회는 이에 반발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사직 시키려는 운동을 벌였으며 그 일환으로 송병준을 내각에서 사임시켰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진회를 조선 최대 규모의 정치조직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송병준을 내부내신에 등용하였다. 일진회는 합방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이토 사직을 계속적으로 시도하였고 육군 군벌에게도 접근하면서 합방운동을 하였다. 이용구는 1908년 9월 도쿄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 사직운동과 조선과 일본의 합방을 선전하였다.

1909년 4월 10일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것을 결정하였고 그 방식으로 한국측이 자원하여 합방을 청원하도록 하는 것이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일진회는 일본에 매우 유용한 존재로 다시금 부각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열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사살 한 후 일진회는 12월 4일 소위 2천만 한국 민중을 대표한다면서 〈합방청원서〉를 통감부와 이완용 내각에 제출하였다. 그런데 이용구가 주장한 합방은 황제를 존속시키고 한국인에 의해 내각을 구성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하지만 합방청원서에는 그러한 의견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일진회의 합방청원서는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된 직후인 9월 12일에 일진회는 곧바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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