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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남과 북, 모두에게 지워진 그 이름

미상

1 사회주의 유입과 사회주의단체의 등장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 이른바 ‘10월혁명(일명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세계 각국에서 공산당이 조직되자, 이를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국제적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창립되었다. 이러한 사회주의의 영향은 식민지 조선에도 미쳤다. 특히 1919년 가을 이후 3·1운동의 열기가 식어가자, 진보적 사상가와 청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민족운동의 활로를 찾기 시작하였고,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하였다.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합법적으로 사회주의단체를 조직할 수 없게 되자, 사회주의단체는 비밀결사(秘密結社) 형태로 조직되었다. 1919년 10월 ‘서울공산단체’가 조직된 것을 시작으로 1920년 3월 ‘조선공산당’(1925년 조직되는 조선공산당과는 다른 단체), 5월 김약수(金若水)·정태신(鄭泰信) 등이 마르크스주의 크루조크, 6월 김철수(金綴洙)·장덕수(張德洙) 등의 사회혁명당, 1921년 10월 김사국(金思國) 등의 사회혁명당이 조직되었다.

‘서울공산단체’와 ‘마르크스주의 크루조크’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구성원들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두 단체 조직을 주도한 김약수·정태신 등은 1921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본공산주의자단체’를 조직하였다. ‘재일본공산주의자단체’는 훗날 북풍파(北風派)의 모체가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김사국 등의 사회혁명당 세력과 결합하여 ‘중립당(中立黨)’을 결성하였으며, 꼬르뷰로(高麗局) 내지부(內地部, 일명 국내부)가 결성되자 당을 해체하고 조선공산당에 가입하는 등 조선공산당의 주요 세력이 되는 화요파(火曜派)가 되었다. 김철수 등의 사회혁명당은 1915년 재일유학생이 중심되어 결성한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의 한국지부가 발전·계승한 조직으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연결되어 활동하면서 상해파(上海派)로 불리웠다. 김사국 등의 사회혁명당은 후일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으로 이어지면서 서울파의 모체가 되었다.

국외에서는 1921년 5월 상해와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이 각기 조직되었다. 이에 코민테른은 두 단체의 통합을 지시하였으나 오히려 대립이 격화되자, 1922년 12월 두 단체를 해산하고 대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원동부(遠東部) 산하에 꼬르뷰로를 설치하였다. 꼬르뷰로는 국내에 통일된 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 김재봉(金在鳳)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1923년 5월 서울로 들어온 김재봉은 국내 공산주의그룹 각 분파인 북풍파의 김약수, 상해파의 이봉수(李鳳洙) 등 5개 그룹이 참여한 가운데 김찬(金燦)의 집에서 꼬르뷰로 내지부를 조직하였다. 꼬르뷰로 내지부의 책임비서는 김재봉이었다. 그러나 화요파와 북풍파의 대립으로 1924년 봄 꼬르뷰로 내지부는 해체되었고 4월에는 꼬르뷰로도 역시 해체되었다.

1924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꼬르뷰로를 대신할 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 준비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 위원회는 국내와의 연계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국내 공산주의그룹은 위원회에 참가하는 대신 국내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당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 5월 화요파·서울파·북풍파 등 각파 공산주의그룹 대표자들은 ‘13인회’를 만들고 통일된 당 조직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각 파의 의견 차이로 ‘13인회’가 결렬되자, 화요파가 중심이 된 꼬르뷰로 내지부는 ‘13인회’ 탈퇴를 선언하고 독자적인 당 건설에 나섰다. 화요파는 북풍파·조선노동당을 규합하여 당 창건을 위한 준비에 나섰고, 서울파 역시 따로 당 창건 준비를 진행하였다.

2 조선공산당 창립과 1·2차 지도부의 활동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서울 황금정(黃金町)에 있는 중국음식점 아서원(雅敍苑)에서 19명이 모였다. 창당을 주도한 인물은 김재봉·김찬·박헌영(朴憲永)·조봉암(曺奉岩) 등 화요파였다. 참석자는 화요파 계열의 박헌영·조봉암·김찬·김재봉·윤덕병(尹德炳)·조동호(趙東祜)·독고전(獨孤佺)·진병기(陳秉基)·홍덕유(洪德裕)·신동호(申東浩)·김기수(金基洙)·최원택(崔元澤)·김상주(金尙珠)·강달영(姜達永), 북풍회 계열의 김약수·송봉우(宋奉瑀)·정운해(鄭雲海), 상해파의 이봉수·유진희(兪鎭熙)·주종건(朱鍾建) 등이었다. 이들 참석자는 꼬르뷰로 내지부 당시 조직된 지역 야체이카(세포조직) 대표로 참석한 것이었다.

창당대회에서는 김찬이 제안한 조선공산당을 당명으로 채택하고, 김찬·조동호·조봉암을 전형위원으로 선출하여 이들에게 7명의 중앙집행위원과 3명의 중앙검사위원 선출을 위임하였다. 중앙집행위원은 김재봉·김약수·김찬·유진희·조동호·주종건·정운해가 선출되었고, 중앙검사위원에는 윤덕병·조봉암·송봉우가 선출되었다. 김재봉은 조선공산당의 첫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직은 비서부·인사부·조직부·조사부·정치경제부·선전부·노농부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창당 직후 조동호·조봉암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유는 국내 정세와 조선공산당 결성에 대한 보고와 함께 지부 승인을 얻기 위함이었다.

조선공산당은 강령 등 당조직의 골격을 다듬는 한편, 120명의 당원 이외에 40명의 당원을 추가로 입당시켰다. 이외에도 조선공산당은 조선노농총동맹으로부터 노동단체와 농민단체를 분립(分立)시키는 문제와 만주총국 설치 등을 검토하였고, 기관지 『조선지광(朝鮮之光)』 발행과 노동자·농민을 대상으로 전국 각지를 순회강연하며 선전활동도 펼쳤다. 이외에도 서울에 있는 인쇄공조합·철공조합·구두직공조합·양말직공조합·물장수조합 등 직업별 노동조합 창설을 지도하고 학생운동단체 조직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조선일보』·『동아일보』·『시대일보』 안에서의 프랙션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프랙션이란 어떤 정당이 대중단체 내부에 조직하는 당원조직을 말한다.

그러나 1925년 11월 ‘신의주사건’을 계기로 최초의 대규모 사회주의탄압사건이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조선공산당 당원 검거 열풍이 일어나자, 김재봉 등 간부들은 후계 간부를 구성하여 당 조직을 인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당 간부 유진희·주종건을 비롯하여 해외로 망명을 시도하던 김재봉마저 체포됨으로써 김재봉 책임비서가 이끌던 이른바 1차 공산당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김재봉 등이 체포된 당 조직을 인계한 것은 당 중앙집행위원 후보이자 경남 진주에서 신문사 지국을 경영하던 강달영이었다. 2차 지도부는 책임비서에 강달영, 비서부 위원 이준태(李準泰), 조직부 위원 김철수·홍남표(洪南杓), 선전부 위원 이봉수로 구성되었다. 2차 지도부는 당 조직 정비에 착수하여 3월 초 전정관(全政琯)과 권오설(權五卨)을 중앙집행위원으로 보선하였으며, 서울에 경성부 간부를, 전라남도·경상남도에 각기 도간부를 설치하였다. 이외에도 검사기관, 1개의 혁명후원회, 만주·상해·일본에 3개의 해외부를 조직하였으며, 전국적으로 29개의 야체이카와 5개의 프랙션을 조직하는데 성공하였다.

2차 지도부는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여러 사회단체와 연대하여 5월 1일 메이데이(노동절) 기념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4월 25일 순종(純宗)이 승하하자, 2차 지도부는 메이데이 시위를 포기하고 3·1 운동처럼 전민족적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거사일자는 순종의 장례일인 6월 10일로 잡았다. 조선공산당은 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권오설을 책임자로 선정하여 6·10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는 바람에 제2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이 일어났다. 6월 7일 권오설 등의 체포를 시작으로 세 달동안 3천여 명이 체포되고 공산당원 130여 명도 체포되었다. 이는 조선공산당원 전체의 89%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이로 인해 투쟁지도부는 와해되고 중앙과 지방 조직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3 3·4차 지도부의 활동과 해산

검거를 피한 중앙집행위원 김철수는 9월 초 당 조직을 추스르기 위해 새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파괴된 조직 정비에 나섰다. 먼저 김철수를 중심으로 한 3차 지도부는 대립관계에 있었던 서울파의 고려공산동맹과 당 대 당 통합을 이뤄냈다. 이 통합을 이루어낸 것은 두 조직의 구성원 가운데 일부가 따로 만든 레닌주의동맹이 당 통합을 추진한 결과였다. 이 세력은 훗날 엠엘파(ML파)로 불렸다. 또한 투옥된 당원을 대신할 새로운 당원을 받아들인 결과 450명으로 당세를 확장하였다. 김철수 지도부는 1926년 12월 6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근처인 천연동(天然洞)의 한 민가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2차 당대회를 개최하였다. 13명이 참가한 2차당 대회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민족운동에 관한 방침」이었다. 「민족운동에 관한 방침」은 민족통일전선 정당을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의 결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밖에도 여성운동을 비롯하여 노동·농민운동·사상단체·형평운동에 관한 방침과 기관지 출판에 관한 방침 등을 논의하는 등 당시 각 부문운동에서 해결해야 할 현안을 빠짐없이 다루었다. 또한 새로운 당 지도부 선출을 위한 선거위원으로 하필원(河弼源)·강석봉(姜錫奉)·정학선 3인을 선출하였다.

2차 당대회를 끝으로 김철수는 1926년 12월 안광천(安光泉)에게 당권을 물려주었다. 책임비서 안광천, 조직부장 김남수(金南秀), 선전부장 김준연(金俊淵), 선전부원 한위건(韓偉健), 조직부원 하필원·권태석(權泰錫)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화요파의 김남수를 제외하면 모두 ML파로서, ML파가 공식적으로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안광천 지도부는 1926년 12월 6일부터 1927년 9월 20일 무렵까지 존재했다. 안광천 지도부는 국내외를 통해 당 조직을 크게 확장하였다. 각 도에 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일부 군 단위 지역에도 야체이카와 프랙션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감시가 강화되자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안광천은 9개월 만에 책임비서에서 물러났다. 안광천의 뒤를 이어 책임비서로 취임한 것은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자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던 김준연이었다. 또한 조직도 선전부장 한위건, 선전부원 안광천·양명(梁明), 조직부장 최익한(崔益翰), 조직부원 하필원·김세연(金世淵)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ML파로서 안광천 책임비서 시절보다 ML파의 성격이 더 강화되는 등 명실상부한 ML파 조선공산당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김준연 지도부는 1개월이 조금 넘긴 시점인 1927년 11월 당원의 기밀누설문제를 원인으로 사퇴하였다. 김준연 지도부의 뒤를 이어 김세연이 당 책임비서를 맡았다. 김세연 지도부는 국내외 조직 정비와 확대에 전력을 기울여 경기도에 6개의 야체이카를 설치하고 경기도간부·경상도간부를 조직하였으며, 해외에는 일본부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1928년 2월 조선공산당이 당 대회를 개최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은 ‘제3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을 일으켰다. 책임비서를 지낸 김세연·김준연 등 핵심 간부 32명이 체포된 상황 속에서도 검거를 피한 안광천·하필원 등은 당대회를 준비하여 2월 27일 밤부터 제3차 당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가 조선공산당의 마지막 당대회였다.

3차 당대회에서는 노동자 출신의 차금봉(車今奉)을 책임비서로 선출함으로써 새로운 당 지도부를 출범시켰다. 차금봉 지도부는 1928년 3월 중순 첫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4차 지도부는 책임비서 차금봉, 정치부장 안광천, 정치부 위원 양명·한명찬(韓明燦), 조직부장 김한경(金漢卿), 조직부 위원 한해(韓海)·이성태(李星泰)·윤택근(尹澤根) 등 대부분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로 교체되었다. 이는 세 차례의 탄압을 겪으면서 당 조직 역량이 약화된 데 기인한 것이었다.

차금봉 지도부는 1928년 3월 제4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민족해방운동 관한 정치논강」을 확정하고 이에 입각하여 신간회에 대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안광천이 기초한 이 논강은 “조선의 장래 권력형태는 조선사회의 정세에 기초한 혁명적 인민공화국”이라고 하면서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좌익소아병적 견해이고 부르조아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우경적 견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차금봉 지도부는 공청 산하에 학생부를 신설하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 야체이카를 조직한 뒤 서울의 각 중등학교와 전문학교 안에 독서횔 활동을 전개하였다.

차금봉 지도부가 출범한 지 채 3개월이 지나지 않은 1928년 6월 중순 조직부 담당 중앙집행위원이자 기관지 『조선지광』 책임자인 이성태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차금봉은 6월 20일 간부들과 대책을 논의한 결과 당을 해산하기로 하고 당 조직과 관련된 전권은 해외로 망명한 양명에게 인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 조직 인계가 이루어지기도 전인 1928년 7월부터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차금봉을 비롯한 중앙간부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10월 5일까지 검거된 관련자는 175명에 이르렀다. 이것을 끝으로 조선공산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해방후 재건

1928년 12월 코민테른은 「조선 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른바 ‘12월테제’로 불리우는 이 결정서는 조선공산당내 지식인 중심의 경향과 분파를 청산하고 노동자·농민에 기초한 새로운 당을 조직할 것을 제시하였다. 초기 당재건운동(1929~1932)은 각 분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서울파·상해파는 1929년 3월 이동휘(李東輝)·김규열(金圭烈) 등이 중심이 되어 중국 길림(吉林)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당재건운동을 벌였으나, 코민테른의 지시로 1931년 3월 해산하였다. 해산후 재건설준비위원회 출신들은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새로이 조직하고 당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1년 4월 메이데이 투쟁의 일환으로 전단을 뿌리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기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조직은 해체되었다.

ML파는 3·4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으로 해외로 망명한 한해·한빈(韓斌)·고광수(高光洙) 등이 1929년 5월 중국 길림에서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를 조직하고 국내로 들어와 당재건운동을 벌였으나, 조직원이 잇따라 체포되었다. 이어 ML파 양명·한위건·고경흠(高景欽) 등은 중국 상해에서 당재건 조직을 건설하기로 협의하였다. 1931년 2월 고경흠 등은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당 재건방침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두 달만에 해체하고 4월 공산주의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공산주의자협의회는 24개 세포조직을 결성하고 전국 곳곳에서 활동을 하다가 격문사건이 단서가 되어 1932년 3월 18명이 구속되면서 막을 내렸다.

한편, ML파 중 레닌주의그룹으로 불렸던 안광천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9년 가을 의열단(義烈團)의 김원봉(金元鳳)과 손을 잡고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조선·북경·만주에 지부를 두었고 북경에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세워 활동가를 양성하였다. 레닌주의정치학교의 졸업생들은 1931년 4월 국내로 조직원을 파견하여 경성·평양·강릉·고성·신의주·원산·대구 등지에 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선공산당강릉공작위원회였다.

화요파 중 ‘콤뮤니스트그룹’으로 불리는 김단야(金丹冶)·권오직(權五稷) 등은 1929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김단야 등은 서울·평양·부산을 ‘트로이카’ 지역으로 설정하고 전국 8개 지역에 조직가를 확보하는 조직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조직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연락원이 체포되자, 1929년 12월 김단야는 국내를 벗어나 2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김단야의 망명 이후 준비위원회는 권오직·채규항(蔡奎恒)·박민영(朴珉英)이 맡았다. 준비위원회는 1930년 1월 조선공산당 경성구 조직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벌이다 1930년 3·1 운동 11주년 기념 격문으로 인해 대부분 체포되었다. 김단야는 1930년 9월 상해로 돌아와 박헌영과 함께 잡지 『콤뮤니스트』를 발간하면서 다시 당재건운동에 뛰어들었으나 국내조직이 모두 체포되는 바람에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초기 당재건운동에 이어 1930년대 당재건운동에 나선 대표적 그룹은 이재유(李載裕)를 중심으로 한 ‘이재유그룹’이었다. 이재유그룹은 1933년부터 36년까지 4년간 경성트로이카 → 경성재건그룹 →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으로 맥을 이으면서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하였다. 경성트로이카의 주요 멤버는 이재유를 비롯하여 김삼룡(金三龍)·안병춘(安炳春)·정칠성(丁七星)·김형선(金炯善)·변홍대(卞洪大)·이순금(李順今)·이현상(李鉉相)·정태식(鄭泰植)·이성출·최소복·변우식·이경선 등이었고, 경성재건그룹은 이재유를 중심으로 박진홍(朴鎭洪)·이관술(李觀述)·박영출(朴英出) 등이 주도하였고, 경성준비그룹은 이재유·이관술을 비롯하여 변우식·서구원·최호극 등이었다. 이재유그룹의 뒤를 이어 활동을 전개한 것은 ‘원산그룹’으로 1936년부터 1938년까지 활동하였다. 원산그룹을 이끈 대표주자는 이주하(李舟河)로서, 그는 1936년 10월 적색노동조합 준비기관, 1938년 4월 적색노동조합원산좌익위원회, 1938년 7월 철우회(鐵友會) 등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원산좌익위원회가 조직을 확대하던 중, 1938년 10월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조직원 110여 명이 체포된 것을 비롯하여 1939년 7월말까지 375명의 관련자가 구속되었다. 체포를 면한 이주하는 흥남·원산·평양·진남포 등 공장지대에 잠입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반전·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

한편, 1936년 12월 이재유가 체포되자, 도피에 성공한 이관술은 1938년 12월 김삼룡·이현상·이순금·정태식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조직하였다. 경성콤그룹이란 경성꼼뮤니스트그룹을 줄여 부른 말이다. 경성콤그룹은 박헌영을 영입한 데 이어 권오직·장순명(張順明)·권우성·정재철 등과 ‘권영태(權榮台)그룹’을 영입함으로써 이재유그룹과 ‘권영태그룹’이 경성콤그룹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1941년까지 활동한 경섬콤그룹은 서울을 중심으로 주로 함경도와 경남지역에 조직기반을 두었으며,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의 운동을 비롯하여 반제·반전운동과 학생운동 등을 주도·지휘하였다. 그러나 경성콤그룹은 1940년 12월 1차 검거사건을 시작으로 1941년 가을과 1942년 12월 등 3차례에 걸친 검거사건으로 조직이 무너졌다. ‘서대문사건’으로 알려진 1차 검거사건에서 이현상·김삼룡·이관술 등이 체포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으나, 박헌영만은 체포되지 않았다. 또한 이관술·이현상은 병보석으로 출옥한 뒤 지하에서 운동을 지속하였다. 이처럼 경성콤그룹은 식민지시대 “국내운동자의 최후의 결산적 집합체”였으며, 해방후 재건한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의 ‘기본핵심세력이자 국내파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15일 밤, 서울 장안빌딩에는 서울파의 이영(李英)·정백(鄭栢), 화요파의 이승엽(李承燁)·조두원(趙斗元)·조동호, 상해파의 서중석(徐重錫), ML파의 하필원·최익한 등이 모였다. 이날 이들은 해방후 가장 먼저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장안빌딩에서 조직되었다고 하여 이른바 ‘장안파공산당’으로 불렸다. 이로부터 5일 뒤인 8월 20일 박헌영·김삼룡·이주하·이현상 등 경성콤그룹 출신들은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에 9월 8일 장안파공산당은 열성자대회를 열고 당을 자진 해산하고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당을 재건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1946년 11월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남조선신민당(南朝鮮新民黨)과 3당 합당을 통해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으로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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