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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농총동맹

노농계급의 해방과 신사회 실현을 위하여

미상

1 전국적 노동조합의 출현

19세기 말부터 형성된 임금노동자 수는 1920년부터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노동단체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20년 33개 단체였던 노동단체는 1921년 90개, 1923년 111개 단체로 급증하였다. 이처럼 전국 각지에서 노동단체가 활발하게 조직되자, 전국적인 노동조합도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 노동조합은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였다. 조선노동공제회는 1919년 박중화(朴重華) 등 지식인들이 주축되어 활동하던 조선노동문제연구회를 모태로 한 것이었다. 1920년 3월 16일 조선노동공제회발기회를 조직한 후 4월 3일에는 인사동 명월관(明月館)에서 발기인총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4월 11일 서울 광무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678명이 참석한 창립총회에서 노동공제회는 ‘노동사회의 조직과 제도 개선’을 목적으로 내세웠다. 이 목적에 맞게 노동공제회가 가장 중점을 둔 사업은 노동자들을 한데 묶기 위한 단체조직이었다. 그 결과 창립 당시 680여 명이던 회원수는 1921년 3월에는 1만 8천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노동공제회는 노동자뿐 아니라 소작인 단합을 위한 활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2년 노동공제회 진주지회에서 처음으로 소작인대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는 소작인들의 결속과 대중 투쟁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또한 노동공제회는 노동야학 등 주로 노동자에 대한 계몽 활동과 상호부조 등에 초점을 맞추어 활동을 펼쳤다.

노동공제회 창립에 이어 1920년 5월 1일 서울 광무대에서 노동자의 상호부조 등을 목적으로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가 조직되었다. 노동대회는 회장 김광제(金光濟), 부회장 정규환(鄭圭煥), 총무 유석태(柳錫泰), 간사 김영만(金榮萬), 고문 현영운(玄英運) 등을 선출하였다.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부를 두고 전성기에는 8천 여명의 회원을 두었다. 노동대회는 1922년 9월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자유노동조합의 취지문」을 사회주의잡지 『신생활(新生活)』에 게재한 것이 빌미가 되어 1923년 1월 재판을 받았다. 이 필화사건은 ‘한국 초유의 사회주의 재판’으로 이 사건으로 노동대회는 이항발(李恒發)·김사민(金思民) 등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한동안 세력이 위축되었다.

1922년 10월 15일 노동공제회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세력인 화요파(火曜派)의 윤덕병(尹德炳) 등은 노동공제회내 개량주의자들을 축출한다는 명목으로 노동공제회 해산을 결의하고 16일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를 조직하였다. 노동연맹회는 신사회 건설과 계급 단결을 주요 활동 목표로 내세웠으나, 노동자계급의 당면 요구들이 반영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노동연맹회는 노동공제회와는 달리 노동자들만으로 조직된 직업별 노동조합과 지역적 노동조합들로 결성된 노동조합 연합체로서 2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노동연맹회는 전국적 노동단체로는 최초로 메이데이(노동절) 기념투쟁을 전개했고, 노동자들의 파업투쟁과 결합을 시도하는 등 노동자들의 인식 개선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2 전국적 노동조합의 통합과정

이 3개의 전국적 노동조합은 1923년부터 사회주의세력이 주도하면서 분파별로 전국적 규모의 노농단체 결성을 준비하였다. 노동공제회에서 탈퇴·조직된 노동연맹회는 사회주의단체 북성회(北星會)를 중심으로 화요파 세력이 주도하였다. 노동연맹회는 1923년 9월 조선노농총동맹을 창립하기 위한 준비단체로서 조선노농총동맹준비회를 조직하였다. 노농총동맹준비회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겸한 노농운동을 목적으로 하면서 노동연맹회의 연맹적 조직을 보다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노동공제회 해산에 반대하던 강택진(姜宅鎭)·차금봉(車今奉) 등 노동공제회 잔류파와 노동대회는 서울파 사회주의세력과 결합하여 9월 28일 조선노농대회준비회를 조직하였다. 이처럼 화요파와 서울파가 각기 전국적 노농운동단체 건설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나, 일제의 집회금지 조치로 노농총동맹준비회와 노농대회준비회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전국적 규모의 노농운동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움직임이 다시 활성화된 것은 구속된 노동운동가들이 석방되면서부터였다. 1924년 1월 서울청년회(서울파) 계열은 조선노동대회 주최 단체총회를 개최하기로 발표하였다. 이에 대항한 북성회(화요파) 계열은 기존의 중앙중심주의를 지양하고 지방분권과 조직을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진주·대구·광주 등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조직화를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화요파가 다수를 차지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 노동단체는 각기 경상남도노농운동자간친회(慶尙南道勞農運動者懇親會)와 전라도노농연맹(全羅道勞農聯盟)을 조직한 뒤, 3월 초에는 두 단체를 합동하여 대구에서 남선노농동맹회(南鮮勞農同盟會)를 창립하였다. 남선노농동맹회 창립대회에서는 서울의 노동대회와 노동연맹회에 「전국 노농단체를 통일한 연합기관 성립에 관한 교섭서」를 발송하는 한편, 서울로 교섭위원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서울파 계열은 4월 서울에서 전조선노농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전국 83개의 노농단체 대표 87명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대회에 참가한 단체대표들은 양 계파간의 주도권 경쟁을 비판하면서 노농단체의 전국적 총동맹을 조직하자는 안건과 함께 남선노농동맹회 대표를 참석시켜 전조선노농총동맹창립준비회로 하자는 제안을 가결시켰다.

그 결과 남선노농동맹회·노농대회준비회·노동연맹회 3개 연합체의 노력으로 1924년 4월 16일 82개 단체의 대표 77명이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전국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17일 3개 연합체 대표 200여 명이 통일적 전국 노농조직체인 조선노농총동맹발기회를 개최함으로써 노농총동맹은 창립을 목전에 두었다.

3 조선노농총동맹 결성과 활동

1924년 4월 18일 서울 광무대(光武臺)에서 167개 단체대표 204명이 참가한 가운데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창립총회에서 결정된 조직구성은 중앙상무집행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아래 총무부·재무부·교육부·조사부·편집부·노동부·소작부 등의 부서를 두도록 하였다. 창립대회에서 선출한 중앙집행위원은 50명으로, 이들은 대개 화요파와 서울파 계열의 사회주의자였으며, 10명의 상무위원은 강택진·윤덕병·김종범(金鍾範)·박병두(朴炳斗)·김병숙(金炳璹)·장채극(張彩極)·문찬두(文酇斗)·서정희(徐廷禧)·유용목(兪龍穆)·권오설(權五卨) 등이었다. 정기대회는 매년 4월 개최하되 가맹단체 대의원의 4분의 1 이상의 출석으로 성립되며, 참가단체는 15명 이상의 노동자나 소작인을 가진 노농단체라면 참가할 수 있게 하였다. 노농총동맹이 노동운동 뿐 아니라 농민운동까지 포괄한 것은 1923년 당시 거의 전국적으로 소작쟁의가 일어날 정도로 농민운동이 노동운동보다 더 큰 민족문제로 부상하였기 때문이었다.

노농총동맹은 ‘강령’에서 “① 오인(吾人)은 노농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함, ② 오인은 단체의 위력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철저적으로 자본계급과 투쟁할 것을 기함, ③ 오인은 노농계급의 현하(現下) 생활에 비추어 각각 복리증진·경제향상을 기함”이라고 하여 노동연맹회 시절보다 훨씬 더 구체화된 계급투쟁적 성격을 반영하였다.

노농총동맹은 4월 20일 임시대회를 개최하고 노동문제·소작문제·대(對) 동척(東拓)문제·대(對) 동아일보문제·대(對) 각파유지연합(各派有志聯合, 어용단체) 문제 등 행동방침과 당면 투쟁방침을 토의하였다. 결정된 사항 중 노동문제는 “① 각 지방에 노동자단체를 조직하고 원조하며 각 지방 노동자 상황을 조사할 것, ② 노동운동의 근본정신에 배치되는 이류(異流)단체는 파괴할 것, ③ 강습소와 팜플렛 등으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현저히 높일 것, ④ 노동자 임금을 최저 1일 1원 이상으로, 노동시간은 8시간제로 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농민문제는 “① 소작인 단체는 면(面)을 단위로 하여 군(郡)에 연합회를 둘 것, ② 소작인 생활을 조사할 것, ③ 이류(異流) 소작인 단체는 파괴할 것, ④ 소작인 교양은 노동자의 경우와 같을 것, ⑤ 소작료는 3할 이내로 할 것, ⑥ 지세와 공과금은 지주가 부담할 것, ⑦ 두량(斗量)은 두승(斗升)을 쓸 것, ⑧ 소작료 운반은 1리(里) 이내로 할 것, ⑨ 동척(東拓) 이민을 폐지할 것” 등이었다.

이처럼 노농총동맹의 노선은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고 민족개량주의와 어용단체 배격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일제경찰은 곧바로 노농총동맹의 임시대회를 해산시켰다. 이에 저항한 5~6백 명의 군중은 혁명적 노동가를 부르며 가두시위행진을 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30여 명이 구속되고 26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노농총동맹이 결성되자, 전국의 소작회 등의 농민운동단체와 노동운동단체들이 가입하였다. 그 결과 노농총동맹은 260여 개 단체에 5만 3천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이 세력을 바탕으로 노농총동맹은 전국에서 전개된 각종 쟁의를 지원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였다. 이외에도 기관지 발간과 각종 운동의 지원·제휴, 민족개량주의에 대한 비판 등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한층 강화시켰다. 그러나 일제가 노농총동맹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는 등 탄압을 가하고, 지도부 내 서울파·화요파의 대립이 가맹단체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지도부는 분열되는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결국 1925년에 들어서면서 노농총동맹 지도부는 서울파와 화요파 간의 주도권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분열 직전까지 이르렀다.

4 조선노농총동맹의 분화(分化)

1925년 4월 비밀리 창립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은 1925년 11월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노농총동맹을 노동자단체와 농민단체로 분리·재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노농총동맹도 11월 19일 제6회 중앙집행위원 간담회를 개최하고 노동자단체·농민단체의 분리를 의결하였다. 이날 회의 요지는 첫째, 노농총동맹의 가맹단체 중에서 농민단체는 따로 조선농민총동맹을 조직하고, 노동단체는 조선노동총동맹을 조직할 것, 둘째, 농민·노동 두 총동맹이 완성될 때는 노농총동맹을 해체하고 농민·노동 양총동맹연합위원회를 조직할 것 등이었다. 이 결의안에 따라 1925년 말 먼저 지방부터 노동자·농민연합단체들을 분리하기 위한 조직 개편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각 지방의 ‘노농연합회·노농연맹·노동공제회’ 등은 노농총동맹의 분립(分立) 결의를 지지하면서 각각 노동자단체와 농민단체로 분리·재조직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 12월 영광노농연합회가 영광노동연합회와 영광농민연합회로, 대구노동공제회는 대구노동연맹과 대구농민연맹으로 각각 분화된 것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산재된 노동자·농민단체의 분화는 가속화되었다.

한편, 1926년 11월 조선공산당의 방향전환론인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이 발표되었다. 정우회선언의 주요 내용은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파벌박멸’, ‘이론투쟁’, ‘민족단일당 결성’ 등이었다. 이 선언 직후 노농총동맹은 1926년 12월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조선노농운동에 대한 신정책」을 발표하였다. 이 신정책에서는 노농운동이 경제투쟁을 위주로 한 대중적 조합운동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소수 지식인의 사상운동조직에 불과하였으며, 계급적으로 차별성이 있는 노동자와 농민을 한 조합 내에 혼합하여 운동 발전을 저해하였다는 점 등을 스스로 비판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농민단체를 독립조직으로 설치한 뒤 두 단체 사이의 협조기관을 설치하고, 이전에 부정한 정치투쟁을 전개할 것을 명시하였다.

이 신정책 방침에 따라 노농총동맹은 1927년 8월 10일 상무위원회에서 두 조직을 분리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두 단체의 규약을 심의·결정하는 동시에 양 동맹의 중앙위원과 검사위원 등을 선출하여 세포단체의 서면표결에 부쳤다. 9월 7일 개표 결과 노동단체에서는 찬성 98개 단체, 의사불명 4개 단체였으며, 농민단체에서는 찬성 128개 단체, 의사불명 4개 단체로 마침내 분리안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1927년 노농총동맹은 9월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으로 분리·개편되었다.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은 노농총동맹의 활동을 계승하여 수많은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조직·지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계속된 집회금지와 이른바 ‘제3·4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으로 중앙 간부가 대거 체포됨으로써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은 큰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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