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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식산은행

일제의 식민 통치를 위해 설립한 국책 금융 기관

1918년

조선식산은행 대표 이미지

사진엽서, (경성)조선식산은행

e뮤지엄(부산광역시립박물관)

1 개요

조선식산은행(이하 ‘식산은행’)은 조선총독부가 경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1918년에 6개 농공은행(農工銀行)을 강제 합병하여 만든 산업금융기관이다. 초반에는 일본의 유휴 자본을 흡수하여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자금을 조선에 공급했으나, 1937년 중일 전쟁 이후에는 조선 내의 강제 저축을 바탕으로 일본 국채를 인수하고 군수 산업체에 자금을 융통하는 등, 조선과 일본 사이에 자금을 유입·유출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1954년에 한국산업은행으로 재편되었다.

2 농업금융기관으로서의 조선식산은행(1918~1936)

한국에서는 통감부 시기인 1906년 3월에 칙령 제13호로 ‘농공은행조례’가 공포된 이후, 산업 자금의 공급을 주목적으로 하는 은행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농공은행은 대한제국 정부가 자본을 투자하고 지원·감독하는 특수은행으로서, 주주의 자격을 영업구역 안에 1년 이상 거주한 농공업자로 제한했기 때문에 주주와 중역은 한국인이었지만, 경영 실권은 대한제국의 재정 및 금융을 장악한 일본인들이 행사했다. 또한 화폐정리사업의 일환으로 구화폐를 일본은행권과 등가의 신화폐로 교환하고 상인들에게는 신화폐로 자금을 대부하는 등, 농공은행은 주로 한국의 유통을 재편하여 일본의 경제권에 부속시키는 상업금융기관의 역할을 했다.

농공은행이 조선의 기간 산업인 농업이 아니라 상업 대출에 치중한 이유는 주요 재원이 조선 내 단기성 예금이어서 산업금융에 공급할 만한 장기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토지 등기제도가 미비한 상태에서는 부동산을 담보로 한 대출의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자본주의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됨에 따라 유휴 자본이 증대하는 한편 식량 위기가 초래되자, 조선의 농업을 개발해 일본에 식량을 공급하고자 했다. 마침 1918년 토지 조사 사업의 완결로 토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도 보장되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18년 6월 제령 제7호 ‘조선식산은행령’을 공포하고, 10월에 기존의 농공은행들을 강제 합병함으로써, 일본의 자본을 적극 도입하여 농업에 투자할 거대 은행으로 식산은행을 설립하였다. 은행장과 이사는 총독이 임명하고, 농공은행의 조선인 중역들은 유명무실한 상담역으로 물러났으며, 주주의 거주지 요건을 폐지하여 새로운 주주는 대개 일본에서 모집되었다. 또한 산업에 투자할 장기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납입 자본금의 10~15배까지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는데, 채권의 90% 가량이 일본에서 소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처럼 일본 자본을 도입할 통로가 마련되자, 수리 시설 확충과 개간 등 대규모 자본을 필요로 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하는 산미 증식 계획을 1920년부터 실시하였다. 식산은행은 그 핵심적 금융기관으로서, 주로 채권으로 확보한 일본 측 자본을 조선의 산업 기관 및 개인에게 대부하고, 그로부터 회수한 원금과 이자를 투자자에게 돌려주는 자금의 유입 및 유출 통로가 되었다. 당시 일본 자본에게 조선의 농업은 최고의 투자처였다. 이에 식산은행의 농업 대출금도 대폭 증가하여 1923년부터는 상업 대출금을 초과했으며, 1924년 이후에는 그 금액이 조선 내 각종 금융기관의 농업 투자 총액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식산은행의 대출 기회가 주로 일본인(1925년, 57.8%)에게 돌아가자, 조선인들 중에서는 농공은행의 후신으로 조선인을 본위로 해야 할 식산 자금이 조선인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식산은행에 조선인을 중용하여 조선인의 산업 개발을 도모하라는 주장도 제기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대출은 농기구 및 비료 구입, 창고 및 마구간 설비 등에도 자금을 대부하며 막대한 저리 자금을 산포한 산미증식갱신계획(1926)의 시행 이후 점차 증가하였고, 그와 함께 농가의 금융 의존도도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쌀값은 하락세를 보여, 특히 1928년경부터 시작된 농업공황 이후 1931년에는 1920년의 절반 이하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로 인해 예상한 만큼의 소득을 올리지 못한 지주들은 소작농에게 비용을 전가하여 소작농의 몰락과 저항을 야기했다. 이는 자금을 대부한 식산은행과 일본 자본의 이윤을 위협하는 한편 조선의 치안까지 악화시켰기 때문에, 정책기관인 식산은행은 1929년 말부터 고리의 대출 이자를 저리로 교체해주는 등 다소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지주를 구제하려 했다. 그럼에도 1930년대 들어 파산하는 지주가 속출함에 따라, 그들이 담보로 설정한 농지가 대거 식산은행으로 귀속되었다. 식산은행은 1931년에 자회사 성업사(成業社)를 세워 이러한 농지를 관리·경영하게 하였고, 이를 통해 개별 지주의 성패와는 무관하게 농업금융을 통한 수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3 군수산업금융기관으로의 전환(1937~1945)

일본은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이후, 전쟁에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하기 위해 전시체제를 구축하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금융 자금의 운용도 통제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도 1937년 10월에 ‘임시자금조정법시행규칙’을 공포하여 금융기관이나 회사가 조선에서 설비를 신설·확장·개량하기 위해 자금을 융통하는 것을 제한하되, 항공기·금속기계·병기 제조 공업, 제철업, 산금(産金)·석탄·석유 광업 등 이른바 ‘시국 산업’은 인가를 거쳐 제한 외 증자 및 사채 발행을 할 수 있게 했다. 이어 1940년 12월에는 ‘은행 등 자금운용령시행규칙’을 공포하여 금융기관의 자금 운용을 제한하고 일정량 이상의 국채 보유를 의무화하는 한편, 생산력 확충, 기타 시국에 긴요한 자금의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은행에 대해 융자를 명령할 수 있게 하였다. 금융 통제의 목적은 국채의 인수와 군수 산업체에 대한 자금의 융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식산은행은 농업 금융기관에서 군수산업 금융기관으로 전환되었다. 먼저, 식산은행은 1940년 3월에 특별금융과를 신설해 군수 관련 광공업 기업체에 대한 자금 융통을 전담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국가의 융자 명령을 받는 은행으로, 1942년에는 일본에 설치된 전시금융금고의 융자 업무 대리 기관으로 지정되는 등, 조선에서 군수 자금을 공급하는 기관으로 법제화되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1942년 9월에 조선식산은행령을 개정하여, 식산은행의 자금 운용에 대한 제한을 오히려 완화하고 대리 업무의 범위도 확장하였다. 그 결과, 전시체제기 식산은행의 대출에서 공업과 광업의 비중이 증가한 반면 농업과 상업의 비중은 저하되어, 1939년 이후에는 광공업이 농업을 능가하였다. 또한 1938~42년 사이에 식산은행의 공업 및 광업 대출액이 조선 내 은행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0~60%에 달했다.

식산은행은 일본의 국채를 인수하고 군수산업에 융자할 자금을 이 시기에도 주로 채권 및 예금을 통해 조달했는데, 조선 내 조달 비중이 점차 증가하여 조선 외를 능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공공단체, 회사와 상점, 마을 단위로 설치된 저축조합을 통해 저축을 강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은행, 금융조합 등 하위 금융기관들은 강제저축으로 예금이 증가했지만 운용은 제한되자, 국채 인수 등에 사용하고 남은 여유 자금을 조선은행, 식산은행에 예치하거나 이들이 발행한 채권을 인수하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 정부의 저금리 정책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높았던 조선의 예금 금리가 인하되자 일본 자본의 조선 유입은 감소한 반면, 1943년경부터 모든 은행의 예금 금리가 국채 이자율보다 낮아지자 자금은 대개 국채 인수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제는 군수산업 육성에 필요한 자금을 조선 현지에서 조달하고, 나아가 조선에서 축적된 자금이 일본으로 유출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였던 예금에 저축하도록 강제당한 반면, 주로 일본인이 경영한 소수의 광공업 군수 산업체가 그 자금을 저리로 융자받는 혜택을 누렸다.

4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 선언 이후 각 은행에는 예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이 쇄도했는데, 은행은 비축된 현금이 고갈되자 방침을 바꾸어 17일부터 지불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현금의 급속한 고갈은 상당 기간 지위를 유지한 조선총독부가 자금을 유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는 각종 사업비를 지불하고 관리의 봉급 및 퇴직금을 송금하는 한편, 거액의 기밀비와 수당 등을 유용했으며, 조선군도 부대원들에게 귀환에 필요한 여비를 지급했다. 은행 역시 거래처에 자금을 대출해주고 은행원들에게도 거액의 퇴각 자금을 챙겨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공 기관의 유용은 곧 민간 사업체에까지 확대되었다. 동월 21일,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은 사업체가 미불 임금 및 퇴직금 자금의 대출을 요청한 경우, 전시 법령인 ‘은행 등 자금운용령시행규칙’에 입각하여 조선은행, 식산은행 등에 융자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각 사업체의 상환 능력도 제대로 조사·심사하지 않고 융자를 명령했으며, 식산은행은 군수 산업체에 대출해 준 융자를 회수하는 대신 조선은행에서 비용을 차입했다. 조선인 직원들도 이러한 자금 유용의 혜택을 받고 사태를 방관하였으며,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에게 비용을 지급하지 않으면 일본인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미군정을 설득하여, 이후 미군정도 융자 명령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한편 식산은행은 일제강점기의 융성을 뒷받침했던 조선총독부의 비호와 일본 자금의 유입이 모두 사라지자, 일반 은행과 다를 바 없는 상태에 놓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특히 한국전쟁 이후 경제 재건과 부흥을 위해 산업금융기관이 필요해지자, 식산은행은 1954년에 국가 권력과 외국 원조를 바탕으로 국책에 순응하는 한국산업은행으로 재편·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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