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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

1911년

조선은행 대표 이미지

조선은행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1 개요

조선은행은 일제시기 조선에서 사용될 화폐를 독점 발행한 식민지 중앙은행이다. 일본은 불안정한 조선 경제가 일본 본토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조선은행권을 따로 발행하면서도, 그 가치를 일본은행권과 동일하게 함으로써 일본 자본의 조선 침투를 용이하게 하고 양 지역의 경제적 통합을 촉진하려 했다. 또한 대체로 일본의 중앙 정부가 조선은행의 감독권과 인사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행은 조선 경제를 위한 중앙은행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국책 은행이면서도 영리의 추구를 인정받아 일반 은행의 기반을 잠식하기도 했다. 나아가 조선은행은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만주 진출을 도모하고 중일 전쟁 이후에는 조선은행권이 일본군의 군용 통화로 사용되는 등 조선은행(권)은 일본이 대륙에 침략하는 첨병이 되었다.

2 조선은행권의 발행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근대적 본위화 제도를 도입하고 중앙은행을 창설하고자 했다. 특히 1902년에 일본의 제일은행이 대한 제국의 허가 없이 화폐를 발행하여 주요 도시에 유통시키자, 대한 제국은 이에 대항하여 1903년 3월에 ‘중앙은행조례(中央銀行條例)’ 와 ‘태환금권조례(兌換金券條例)’ 를 공포하는 등 근대적 화폐제도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을 구체화했다. 이러한 시도는 제1차 한일협약(1904)의 체결 이후 재정 고문으로 파견된 일본인 메가타(目賀田種太郎)가 화폐정리사업을 시행함에 따라 좌절되었고, 제일은행이 다시 중앙은행의 지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통감부는 1907년경 제일은행을 대신해 한국에 별도의 중앙은행을 설치할 계획을 구상했는데, 이는 한국 정부가 제일은행을 지휘·감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립은행인 제일은행이 국책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09년에 ‘한국은행조례(韓國銀行條例)’를 공포해 한국인과 일본인을 주주로 하는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한국 정부가 그 업무를 감독하되, 은행 설립에 관한 사무는 일본 정부에 위탁하게 했다.

이때 한국은행은 희망자가 있을 때는 한국은행권과 교환해줄 수 있도록 화폐 발행고와 동등한 가치의 금화, 지금은(地金銀) 또는 일본은행권을 준비해둬야 했는데, 이처럼 일본의 화폐가 발행 준비에 포함된 것이 특징적이다. 한국은행은 일제의 한국병합 이후 일본 법률로 ‘조선은행법’(1911)이 공포됨에 따라 조선은행으로 변경되었지만, 이러한 제도는 유지되었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은행권을 남발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이로 인해 조선에서 주변적 지위로 밀려난 금은 일본으로 유출되고 조선은행은 주로 일본은행권을 비축했다. 이로써 일본은 외화 부족을 완화할 수 있었던 반면, 조선은 다른 나라와의 교역이 사실상 차단되어 거의 엔 통화권 안에서만 거래하는 등 일본과의 경제적 통합이 심화되었다. 또한 조선은행권은 일본은행권과 1:1로 환율이 고정되어 자유롭게 교환되었으나 일본은 양자의 발행 주체를 끝내 통합하지 않았는데, 이는 경제 상황이 불안정한 조선에 일본은행권을 직접 유통시킬 경우 유사시 조선 경제가 일본 경제를 뒤흔들 수도 있음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조선은행은 조선의 중앙은행이지만, 조선은행권 발행 제도는 일본 자본의 조선 침투를 용이하게 하고 양 지역의 경제적 결합을 촉진하는 한편, 일본의 경제권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던 것이다.

3 중앙은행 기능의 제한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정부 조직의 하나로서, 처음부터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 비경쟁기관으로 출발했다. 지폐와 주화를 발행하며 그 양을 조절하고 국고금을 관리하는 한편, 일반 은행과도 예금을 거래하는 중앙은행은 국책을 수행하기 위한 특수 금융기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행은 조선을 위한 중앙은행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기에는 결함이 많은 조직이었다. 먼저 1911년 제정된 조선은행법은 감독권과 인사권 등 중대한 사항은 일본 정부가 관할하되 조선총독부도 일부 감독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이원적인 감독 체제를 형성했는데, 조선총독부가 실제로 이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와 사전에 협의해야만 했다. 게다가 조선은행이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 발생한 불량 채권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일본 정부는 1924년 조선은행법을 개정하여 조선은행 감독권 일체를 대장성에 이관시켰다. 중역들도 일본 정부가 임명하여 총재와 부총재 등 수뇌부는 조선은행과 관계가 적은 본토의 인물이 낙하산으로 기용되었고, 조선은행의 기준 금리는 일본은행의 금리에 따라 변동되었다. 또한 조선은행 출신들은 일본이나 만주의 중요 지점에서 경력을 쌓지 않는 한 이사로 승진하기 어려웠다. 이는 1918년 조선총독부의 관리 감독 하에 조선식산은행이 설립된 이래, 이 은행이 조선총독부나 일반 은행에 자금을 공급하는 등 실질적으로 조선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하고, 조선은행은 오히려 조선 밖의 사업에 중점을 두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결국 조선은행은 조선은행권을 발행하는 것 이외에는, 조선총독부 재정을 원조하거나 조선 내 일반 은행을 통제하고 금리를 결정하는 등 중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은행이 상업금융 업무를 겸업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사적인 영리를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온존시켰기 때문에, 조선은행은 일반 은행과도 경쟁했다. 본국에서는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할 권리를 독점하는 대신 공공 금융기관으로 진화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식민지에서는 발권의 특권 역시 이윤 창출의 수단에 불과했고 식민지의 중앙은행은 이러한 특권을 대가로 정부에 재정 자금이나 식민지 개발 자금을 공급하도록 설정되었던 것이다. 조선은행의 경우에는 특히 불량 채권 등을 정리하기 위해 1924년 도쿄(東京)로 이전되었던 본부가 경성으로 복귀한 1928년 무렵부터 구제 자금을 상환하기 위하여 상업금융에 적극 진출하였고, 이는 일반 은행의 영업 기반을 침식하였다. 1928년에는 민간 은행처럼 부동산 담보 대출에 나설 의도를 보였다가, ‘중앙은행으로서의 사명을 망각한 금융책’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1930년대 들어서는 민간을 대상으로 한 대출 및 예금을 보다 자유롭게 하려는 등 상업금융 업무를 더욱 확대하였다. 민간 은행으로서는 일본에서 끌어온 자금을 저금리로 운용할 수 있는 조선은행과 거래처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경제 공황으로 사업이 위축되고 상거래가 부진하여 좋은 담보물은 격감하는 한편 예금은 증가하지 않자, 그간 ‘체면상’ 소극적이었던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까지 직원을 각지에 파견하고 협정율을 무시한 저리로 대출해주는 등 노골적으로 ‘예금쟁탈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처럼 1920년대 후반 불량 채권을 정리한 후의 조선은행은 이전보다 현저히 상업은행화하여, 중앙은행으로서의 권위를 실추하고 사명을 발휘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고까지 비판되었다.

4 만주·대륙 침략의 첨병

조선은행은 일본인이 만주 및 중국에 경제적·군사적으로 침략하는 데 동참하기도 했다. 일본은 만주의 일본인에게 장기 저리의 사업 자금을 공급하기 위하여 1913년에 요코하마(横浜) 정금은행(正金銀行)에 화폐를 발행하게 하는 한편, 조선은행도 3개 지점을 설치하고 조선은행권을 유통시킬 수 있게 했다. 또한 조선과 만주의 일체화를 주장하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초대 조선 총독이 일본 수상에 취임하자, 1917년에 만주에서의 척식금융 기능을 요코하마 정금은행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로 이관시켰다. 이와 함께 관동주, 남만주 철도 부속지에서는 공사 일체의 거래에 조선은행권을 무제한으로 통용하게 하여, 조선은행을 만주의 중앙은행으로 삼았다. 이처럼 조선은행은 대륙 진출을 꾀하던 일본 육군 군벌에 편승하여 만주에 침투한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 속에서 영업을 비약적으로 확장하였다. 하지만 투기적 거래에 상당한 자금을 공급했기 때문에 전쟁 특수가 사라지고 반동 공황이 발생하자, 1924년 말 일본과 만주에서 조선은행 대출금 중 약 40~50%는 회수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에 일본 정부가 주도하여 조선은행의 재정을 정리하였다. 또한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1932년에 설립된 만주중앙은행이 만주국 화폐를 발행하였고, 1935년 말을 끝으로 조선은행권의 만주 내 유통도 전면 금지함에 따라, 조선은행은 만주에서 철수하였다.

하지만 곧 이은 중일 전쟁(1937) 이후 조선은행(권)은 다시 중국에서 일본군의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쟁 발발 당시에는 조선은행권이 군용 통화로 사용되었고, 1938년부터는 조선은행과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예금협정을 맺어 전비를 조달했다. 그런데 이 예금협정은 군사비를 일본에서 중국으로 실제 송금하지는 않고 조선은행 도쿄 지점 계좌에 비축해두고는 이를 기반으로 중국에서 은행권을 발행해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조선은행은 확보된 거액의 군사비로 국채를 인수해 엔 자금을 일본은행으로 환류시켰다. 일본은 이러한 금융 조작을 통해 일본은행권의 증발을 막아 일본 내 인플레이션을 억제한 것이다. 반면 조선은행권은 국채를 보증 삼아 발행될 수도 있었으므로 남발될 여지가 충분했다. 일본 정부는 1943년 이후 군사비를 중국 현지에서 조달하는 한편, 일본은행권 중심의 조선은행권 발행 준비 제도를 포기하여 조선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일본은행 예금까지 국채로 전환시켰다. 이로써 일본 정부는 역시 일본은행권을 환류시켜 일본의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 조선은행권 증발의 제한 장치가 풀려 조선에서는 국채의 매입과 함께 조선은행권도 증발되어 인플레이션이 격화되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 자본의 조선 침투를 쉽게 하기 위해 설정되었던 일본은행권과 조선은행권의 등가 교환 원칙은 더 이상 지켜질 수 없게 되었다. 전시체제기 조선은 전쟁으로 인한 대륙의 인플레이션이 일본 본토에 파급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 되었던 것이고, 그 결과 일본과 조선은 통화 면에서 완전히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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