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통리기무아문

통리기무아문

개화 정책과 수호 통상 등을 주도한 국정 기구

1880년(고종 17) ~ 1895년(고종 32)

1 개요

통리기무아문은 개항 이후 수호통상과 개화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였다.

2 통리기무아문 설치 배경

고종은 친정에 나선 후 권력기반을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고종과 친위세력들은 군영과 재정 기관을 장악하였지만 확고한 권력기반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고종의 친위세력들이 아직 대신급이 아니어서 최고 의사결정기과인 의정부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또한 1876년(고종 13) 조일수호조규 체결 후 전개된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고종은 유생들의 반발과 이에 기반 한 대신들의 반대에 대처해야 했다.

1880년대 초반에 일본은 각국과의 개항문제와 개화자강정책 추진을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개항을 전후하여 조선정부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과 러시아의 위협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군비강화를 위하여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려 하였다. 의정부 대신들은 재정 문제 등을 들어 영선사와 학생을 파견하는데 부정적이었다. 또한 1880년(고종 17) 8월에 2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김홍집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국내에 가져오면서 개항 정책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의정부 대신들은 『조선책략』이 제시하고 있는 대외정책에 반대하였다. 의정부가 유생들을 발판으로 개항과 개화자강정책을 추진하는데 번번이 반대하자 고종은 정책 추진을 위한 새로운 기구 설치를 도모하였다. 국왕 중심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화정책 추진을 위해서는 의정부를 장악하거나 의정부에 대응할 수 있는 비슷한 급의 지위를 가진 기구 설립이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통리기무아문이었다. 이 때문에 통리기무아문은 종래의 통치기구인 의정부·6조와 별개로 설치되었다.

3 통리기무아문의 조직과 기구

1880년(고종 17) 12월 외교와 통상을 포함하여 군국과 변정을 담당하는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다. 통리기무아문은 내부에 12개의 부서(司)를 두었고 외국과 교섭 통상에 관한 일과 군국기무 즉 군사와 국정 전반에 관한 일을 수행했다. 그리고 중앙의 각 부서(司)와 여러 군영, 지방의 업무는 통리기무아문에 보고되었다. 이처럼 통리기무아문은 의정부와 거의 동일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통리기무아문은 과거 삼군부가 있던 자리에 두었으며 1881년(고종 18) 1월 17일에는 긴급 현안 처리를 위해 궐내에 ‘내아문’을 따로 설치하였다. 통리기무아문 12개 부서의 조직과 업무는 다음과 같다.

사대사(事大司) : 사대문서 취급, 중국사신 접대, 군무와 邊情, 사신 파견
교린사(交鄰司) : 교린문서와 왕래 사신 대접
군무사(軍務司) : 京外 군대 통솔
변정사(邊政司) : 변방에 대한 사무 및 인접국 동정 정탐
기연사(機沿司) : 연해 및 각 포구 출입선박을 단속
통상사(通商司) : 중국 및 인접국과의 통상 사무를 담당
군물사(軍物司) : 각종 병기 제조
기계사(機械司) : 각종 기계 제조
선박사(船舶司) : 京外 각종 선박 제조 및 관리
어학사(語學司) : 각국의 언어와 문자를 번역하는 일
전선사(典選司) : 인재 선발 및 각 부서 수용 용품에 관한 사무 담당
이용사(理用司) : 경리, 재무 사무를 담당

통리기무아문 12개의 부서가 관장한 직무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군사 업무와 또 하나는 외교통상 업무이다. 이는 개화정책의 중점이 부국강병과 해외 통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대사와 교린사를 둔 것은 아직까지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와 외교정책이 전통적인 중화질서와 사대교린 정책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대사와 교린사라는 명칭은 통리기무아문 조직 개편 때 없어졌는데, 조선이 전통적인 사대질서에서 탈피해 만국공법체제인 근대적 국제법 질서로 적극 편입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881년(고종 18) 윤7월과 8월에 걸쳐 파견된 일본 시찰단이 귀국한 후인 11월 9일에 통리기무아문은 12개의 부서에서 7개로 개편되었다. 12개의 부서 중에는 당장 관장할 업무가 없는 부서도 있었다. 사대사와 교린사, 군무사, 변정사, 기연사, 선함사, 기계사, 군물사, 전선사, 어학사 등은 각 부서의 담당자인 당상들이 각각 2~3사를 겸하여 관할하고 있었다. 따라서 12개의 부서를 실제 활동에 맞게 7개로 개편한 것이었다.

통리기무아문에는 대신급인 총리사(摠理使), 당상관급인 경리사(經理事)와 당하관급인 주사, 부주사를 두었다. 당상은 실질적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운영한 주도층이었고 주사는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며 당상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부주사는 주사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경리사와 주사, 부주사는 문관, 음관, 무관을 구분하지 않고 임명하였는데, 이는 인재등용의 폭을 넓혀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통리기무아문의 최고 관직인 총리대신에는 영의정 이최응(李最應)과 좌의정 김병국(金炳國)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을 임명한 것은 통리기무아문의 위상을 고려한 것이었다. 총리대신은 명목상 직책으로 총리대신이 중요한 일을 결정한 예는 없었다. 통리기무아문의 업무는 당상관인 경리사가 사안에 따라 국왕의 명에 따라서 총리대신과 협의하여 진행하였다.

당상인 경리사 임명에 대한 절차와 규정을 두지 않아서 국왕은 통리기무아문 당상을 독자적으로 임명할 수 있었다. 통리기무아문에 의정부와 같은 지위를 부여하여 총리대신을 두었으면서도 당상인 경리사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고종은 통리기무아문을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4 통리기무아문을 주도한 세력

통리기무아문에 12사, 7사에 당상과 주사로 임명된 사람들은 개화파와 민씨 척족 세력이었다. 7사의 주요 당상에 민씨 척족인 여흥(麗興) 민씨(閔氏)가 4명이나 포진하고 있었다. 민영익(閔泳翊), 민태호(閔台鎬), 민겸호(閔謙鎬), 민치상(閔致庠)은 사대교린사나 통상사 등 외교 관련 부서를 제외한 부서에 당상으로 임명되었다. 외교 관련 부서에는 개화파가 임명되었다. 1881년(고종 18) 11월에는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가서 근대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온 박정양(朴定陽), 조준영(趙準永), 엄세영(嚴世永), 홍영식(洪英植), 이헌영(李헌永), 민종목 등 개화세력이 당상 직을 맡았다.

통리기무아문의 경리사로 임명된 사람들은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한 이후부터 성장해 온 인물들이었다. 즉 고종 친정 이후 재정과 군사 관련 기구에서 책임자로 일하면서 국왕의 친위세력으로 성장해 온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민씨 척족 세력 중에는 민영익이 군사 관련 기구를, 민겸호와 민태호가 재정 관련 기구를 맡았다. 그리고 1881년(고종 18) 말에 돌아온 신사유람단 단원이 대부분 등용되었다.

5 통리기무아문의 역할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고종 17) 자강정책의 중심기관이었다. 통리기무아문은 영선사 파견문제와 각국과의 조약 체결 및 교섭 등 주요 외교 문제를 처리하였다. 또한 신식군대인 ‘교련병대’를 설치하여 군 지휘권을 장악하였고 1881년(고종 18) 11월에는 중앙군을 2개의 영으로 개편하는 논의를 주관하였다. 또 각 군영의 군사 훈련을 결정하였다. 이와 함께 주교사(舟橋司)를 운영하였고 주전사업 및 인삼세(蔘稅)를 관리,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금을 장악하여 재정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처럼 통리기무아문에 국왕세력이 결집하여 군사, 외교, 재정 등 국가 주요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때 의정부는 종래 의정부가 행하던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통리기무아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개화자강에 관한 정책에서는 소외되어 있었다. 의정부 대신들은 개화정책과 자강정책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여론을 발판으로 국왕과 통리기무아문에 반발하였다. 그리고 이 반발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터져 나왔다.

6 임오군란과 통리기무아문

1882년(고종 19) 발생한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통리기무아문은 폐지되었고 대원군 권력을 상징하던 삼군부(三軍府)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에 의해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이 납치된 후 대원군계열은 사실상 몰락하였고 지방 유생의 상소에 기반한 대신들의 반대도 잦아들었다.

임오군란 후 개화자강 문제는 공식적인 정부 정책이 되었다. 고종은 민심수습을 위해 정치개혁 방안을 구상하고 윤음과 교지를 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임오군란으로 폐지된 통리기무아문을 대신하여 국가기무를 총괄하고 궁내의 사무를 관장하기 위한 기구개편을 단행하였다. 고종이 1882년(고종 19) 11월 18일 설치를 명령할 때 명칭은 통리내무아문이었지만 12월에 이름을 바꿔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되었다. 통리군국사무아문은 통리기무아문과 같이 정1품 아문으로 궁궐 내에 위치하였고 군국기무를 총괄하고 궁내의 사무를 관장하는 조선 정부의 최고 국정운영기관이 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