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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부

일시 침체된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다시 일으키다

1922년 ~ 1924년

통의부 대표 이미지

대한통의부 훈련 광경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개요

통의부(統義府, 혹은 대한통의부)는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1922년 성립되었다. 서간도 최초의 통합 독립군단체로서 성립된 통군부를 확대하여 결성된 것으로, 일시 침체 국면에 처했던 독립군 활동을 대동단결의 기치 아래 다시 활성화시켰다. 통의부는 서간도 지역에서 교육·산업 진흥 등 자치활동 및 각종 무장투쟁활동을 전개하였다. 각기 다른 배경을 유지하던 여러 단체들의 연합체라는 성격 때문에 분열이 일어나, 의군부·참의부·정의부 등으로 나누어져 계승되었다.

2 통의부 조직의 배경

백두산 서쪽, 압록강변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강 중·상류 지역인 서간도 지역에는 1919년 3·1 운동을 전후하여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등 수많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1920년 일제는 만주 지역의 한인 독립군 세력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만주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청산리 대첩에서 보듯 독립군이 대승하는 등 독립군에 대한 토벌 작전이 오히려 실패하자,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독립군의 근거지를 박멸한다는 미명 하에 한인 마을을 파괴하고 한인들을 학살하는 이른바 경신참변을 자행했다.

경신참변 후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다시 독립운동의 기반을 재건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독립전쟁 전선을 재정비하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은 과거 여러 조직으로 나누어진 분산적인 활동보다 하나로 통합된 활동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따라서 점차 강력한 통합 독립군단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1922년 대한독립단·서로군정서·보합단·광한단·광복군총영 등 여러 독립군 단체 대표들은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하고, 통합 조직체로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는데 합의하였다. 대한통군부를 조직한 독립운동가들은 더 많은 단체들과 통합 조직을 결성할 수 있도록 교섭을 꾀하였다. 그 노력의 결과, 통군부가 결성된 지 얼마되지 않은 1922년 8월 다시 확대 개편을 위한 회의가 열려 대한통의부가 결성될 수 있었다.

3 통의부의 성립

통의부는 1922년 8월 23일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한교회(韓僑會)·광복군총영·평안북도독판부 대표 등 8개 단체 71명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각 단체는 기존의 체제를 모두 해체하여 통합하고, 소속 군대의 명칭은 통의부 의용군(義勇軍)으로 하며, 9장 63조의 헌장을 마련하는 등 6개 항을 결의하였다.

통의부의 체제는 총장제로, 총장 산하에 민사·교섭·군사·법무·재무·학무·실업·권업·교통·참모의 10개 부를 설치했다. 또 비서과와 재판소를 두어 자치정부 형태를 갖추었다. 통의부의 총장으로는 김동삼(金東三)이 뽑혔고, 부총장으로는 채상덕(蔡相悳)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비서과장 고할신(高轄信), 민사부장 이웅해, 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이 있었다.

통의부는 한인 사회의 지방 조직으로, 각 현에 총관(總管) 사무소를 설치했다. 총관은 1,000호의 장(長)이었으며 휘하에 여러 임원이 있었다. 지방 형편에 따라 100호에서 200호로 1구(區)를 조직하고, 관할지역을 4,5개 구역으로 나누어 구장(區長)을 두었다. 총관과 구장은 지역 내 한인을 보호하고 납세를 징수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통의부의 군사 조직인 의용군은 1개 대대 산하에 5개 중대와 독립소대인 유격대와 헌병대를 더해 총 7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의용군은 통의부에 참여한 기존 단체들의 독립군 부대를 통합 편성한 것으로, 중대별로 각각 관할구역과 임무를 분담했다.

4 통의부의 자치활동과 군사활동

통의부는 민정과 군정의 성격을 지닌 자치정부의 형태를 취했다. 통의부의 활동은 한인사회에 대한 자치행정과 의용대를 중심으로 한 군사활동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자치활동은 지역마다 설치된 총관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총관소는 중앙과의 연락을 비롯해 행정사무와 세금수납 및 군자금모금, 독립사상의 고취 등을 담당하였다. 당시 서간도의 한인들은 중국인 지주 및 중국 관헌에게 지세와 세금을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통의부는 이러한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중국인 지주 및 중국관헌과 교섭하기도 했으며, 교민 보호와 재원 확보를 위해 실업장려책을 마련했다. 한인들의 부업을 장려하고, 노동강습소를 개설하여 영농교육을 시키고 공장의 설치를 계획하였으며, 주식회사를 창설하기도 했다.

또한 통의부에서는 학교를 설립하는 교육사업을 전개했다. 통의부와 관련을 맺은 대표적인 학교로는 1923년 10월 서당을 확장하여 설립된 광동학교(光東學校)가 있었다. 교육사업 이외에도 기관지 발행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려 노력하였는데, 통의부의 기관지 『경종보(警鍾報)』를 비롯하여 1923년 2월 『통의부공보』를 간행하였다.

통의부의 군사활동으로는 무기 및 군자금의 조달 및 이를 바탕으로 전개한 무장투쟁을 살필 수 있다. 통의부는 관할지역내 한인사회를 통해 군자금과 물자를 보급하였고, 서간도 지역뿐만 아니라 평안도와 경성을 비롯한 조선 전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각지의 부호에게 자금을 요구하고 수령증을 교부하거나, 금광을 습격하기도 하는 방법으로 무장독립투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만주와 조선 각지에서 조달한 군자금을 재원으로 통의부는 활발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만주 접경지역인 평안북도 일원의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통의부 관할 지역 내의 친일 인사를 숙청하고, 영사관과 경찰서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을 공격해 일본 경찰들과 전투를 벌였다. 조선 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서울에 통의부 경성지부를 설치하는 계획이 세간에 알려져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통의부는 당시 일제의 압력 하에 독립군 세력을 제지하려 한 중국 측에 대해서도 무력 방어 및 교섭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였다.

5 통의부의 분열과 해체

통의부는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가 폭넓게 통합하여 조직된 단체였기 때문에, 성립 초기부터 내부 인사 간에 이념과 노선의 차이가 드러났다. 특히 복벽주의와 공화주의라는 이념 갈등과 군권의 장악을 둘러싸고 의견의 대립이 생겨나게 되었다. 군주정을 옹호하며 기존의 조선왕조 혹은 대한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복벽주의자들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공화정에 찬성하는 공화주의자들은 완벽한 통합을 이룩하기에는 서로 다른 독립 국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특히 절대 복벽주의를 추구한 전덕원(全德元) 일파가 통의부 창립 초기 요직에서 배제된 것은 복벽주의자들의 불만을 샀다. 지도층인 중앙 조직은 공화주의 계열이 주도하고 일선의 지휘관들은 복벽주의적 성향을 지닌 구조에서 비롯한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복벽주의와 공화주의의 갈등과 불만은 결국 양 세력 간 무력 충돌과 복벽주의자들의 이탈로 이어졌다. 1922년 10월 14일, 복벽주의 노선의 군인 20여 명이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를 살해하고 양기탁을 비롯한 통의부 주요 간부들을 붙잡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발생 직후 전덕원과 양기탁 등이 원만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의부 내 복벽파와 공화파의 대립이 악화되어 유혈사태가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결국 전덕원을 비롯하여 채상덕·김평식·오석영·박대호 등 복벽계열의 인물들은 통의부를 탈퇴하고 새로 의군부(義軍府)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유인석의 충의를 계승함을 천명하고 융희 연호를 사용하여 의병의 복벽적 전통을 표방하였다.

통의부와 의군부가 분립된 이후에도 양자 사이에서 무력 충돌이 이어지자, 의용군 중 제1·2·3중대는 당쟁으로 무고한 희생이 빚어짐을 비판하고 임시 정부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을 호소하며 1924년 5월 통의부 탈퇴를 선언했다. 이어서 의용군 제5중대도 마찬가지로 통의부를 이탈하였다. 이들은 임시 정부 직할의 군대로서 참의부를 설립하였다. 즉 통의부의 1차 분열로 의군부가 설립되었고, 2차 분열로 참의부가 생겨난 것이다.

통의부는 의용군이 대거 이탈한 후에 다시 재정비에 착수하여 부대를 유지하였지만, 참의부와의 반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결국 1924년 11월 정의부가 결성되면서 통의부에 잔류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정의부에 합류하였다. 통의부 잔존세력의 활동은 1927년경까지도 보도되었지만, 서간도 지역 독립군 활동의 중심은 점차 참의부와 정의부로 옮겨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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