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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의열 투쟁을 주도하다

1931년

한인애국단 대표 이미지

윤봉길의사 유품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한인애국단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겪었던 곤경을 타개하고, 1931년 만보산 사건과 만주 사변 등으로 인하여 침체된 항일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려는 목적에서 결성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특무 활동 기관이자 1930년대 중국 관내의 대표적인 의열단체이다.

2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침체와 곤경

3·1 운동 이후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통합적이고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건설하였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하여 개최된 파리 강화 회의와 이를 통해 성립되었던 베르사유 강화 체제는 1차 대전 승전국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그대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열강들은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방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의 추격과 탄압으로 인하여 임시 정부의 국내조직도 파괴되었고 재정적 곤란을 겪게 되면서 독립운동을 수행하는 데에 상당한 난관에 봉착하였다. 게다가 독립운동가들 간에 독립운동 방식을 둘러싼 대립과 사상적 차이, 지역주의 등이 얽히면서 임시 정부 내에 극심한 분열이 일어났다. 특히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건의하고, 미국교포들로부터 온 독립자금을 임시 정부로 보내지 않은 점, 임시 정부 활동을 사실상 수행하지 않으면서도 대통령 지위를 이용하여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거나 임시 정부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한 점 등으로 인하여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이 점차 늘어났다. 결국 임시 정부의 독립지사들이 대거 이탈하였고, 이후 임시 정부에서는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5년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고 이어 박은식이 취임하였으나,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친 후 사임하였다. 초대 국무령에 이상룡이 취임하였고, 2대 국무령에는 이동녕, 3대 국무령에는 홍진이 취임하였으나 모두 내각 구성에 실패하며 임시 정부를 제대로 이끌지 못하였다. 1927년 12월에 이르러 이동녕의 권유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었다. 김구는 헌법을 개정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여 국무령에는 이동녕을 추대하고 자신은 국무위원으로서 내무부를 맡으면서 임시 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1930년대가 되면서 중국에서의 항일운동은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1931년 7월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서 두 달 후 만주 사변이 일어나면서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더욱 위축되었다. 만보산 사건은 일제의 술책으로 중국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 삼성보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들이 수로를 둘러싸고 충돌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배후에는 일본 관동군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조선인 농민들을 동원해서 수로를 개착하게 했던 것이었다. 이때의 충돌은 조선인, 중국인 양측 모두 경미한 부상자가 나오는 데 그쳤다. 하지만 관동군이 창춘 일본영사관과 결탁하여 이 충돌사건을 국내 신문에 과장·왜곡 보도하도록 조작하여 문제가 확대되었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상황이 위급하다는 보도를 접하게 되자 조선 내 각지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일제 측의 선동과 은밀한 공작에 의해 더욱 사태가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중국인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면서 중국과 조선인 사이에 불신이 팽배하게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인 1931년 9월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이어서 1932년 3월에 만주국을 세우는 등 대륙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은 일본의 대륙침략의 첨병 내지 스파이로 오인받기 쉬웠다. 이 때문에 만주와 중국 관내 지역에서의 중국인들은 더 이상 한인독립운동에 대하여 지원 내지 협조를 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고립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3 한인애국단의 결성

안팎에서 곤경에 처하게 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타개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1931년 9월 20일 상하이의 임시 정부 청사에서 긴급 국무회의가 개최되어 상하이에 있는 한인 각 단체대표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가 결성되었고, 일체의 배일운동과 중국인을 지원하는 운동 방안을 강구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국무회의를 개최하여 비밀조직으로 특무대를 결성하기로 하고 그 책임자로 김구를 임명하였다. 김구는 이 특무대의 활동이나 인물 선전 등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 그 결과만 임시 정부에 보고하였다. 이 특무대가 한인애국단이라는 명칭으로 조직된 구체적인 일자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일설에는 처음에 조소앙(趙素昻)이 특무대의 명칭을 ‘의생단(義生團)’이라 정하고 그것의 선언, 강령, 규약을 문서로 작성하여 김구에게 주었는데, 김구가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그것을 분실해버렸다고 한다. 한인애국단이라는 명칭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봉창(李奉昌)이 도쿄 의거를 결행한 후, 1932년 9월 28일 김구가 한인애국단장의 명의로 「동경작안(東京炸案)의 진상」이라는 글을 발표했을 때였다. 이 글에서 이봉창이 ‘본단에 최선 가입한 단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봉창이 입단하기 직전에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인애국단은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단원들의 정확한 인원과 명단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당시 일제의 정보기관은 80여명 정도로 추정하였으며, 그 핵심단원은 10여명으로 파악하였다. 각종 기록에서 보이는 단원 명단을 종합하면, 단장은 김구, 단원은 안공근, 김동우(본명 노종균), 김해산, 엄항섭, 김홍일, 안경근, 손창도, 김의한, 백정기, 김현구, 손두환, 주엽, 양동호, 이덕주, 유진만, 이봉창, 윤봉길, 유상근, 최홍식, 이수봉, 이성원, 이성발, 왕종호, 이국혁, 노태영, 김긍호, 김철이다.

4 한인애국단의 활동

한인애국단의 활동방식은 의열투쟁이었다. 의열투쟁(義烈鬪爭)이란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사람으로서의 도리, 민족에 대한 의리(義)를 다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烈)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군사조직이 아닌 소집단 비밀결사나 개인 수준에서 침략의 원흉인 일본 천황, 일본 정부 고위인사, 조선총독부 요인, 조선인 매국노·친일파를 총 또는 폭탄을 이용하여 암살하거나 주요 건물 및 시설, 기관을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일컫는 것으로서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의 주요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의열투쟁은 특히 가혹한 탄압으로 인하여 공개적인 활동이나 대중운동을 더 이상 지속하기 힘든 경우나, 압도적인 군사력의 차이 또는 군대의 궤멸로 인하여 독립전쟁이 불가능한 경우, 민중운동이 침체되고 위축되어 있을 때 소수의 인원과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내부적으로는 재정적 곤란과 해외 독립운동 인사들의 분열로 인해 고립되고, 외부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공이 본격화되고 중국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상황에서 의열투쟁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에 타격을 가하고 임시 정부의 위상을 드높이며, 민중들을 각성시켜 다시금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다.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대략, 1. 이봉창의 1932년 1월 도쿄 천황 처단 의거, 2. 상해 주둔 일본군사령부(일본 전함 이즈모호出雲號) 폭파 계획, 3. 윤봉길 등의 상해 일본 비행장 폭파 계획, 4. 이덕주, 유진식의 조선총독 처단 계획, 5.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6. 최흥식, 유상근의 만주 관동청 공략 등이 있다.

한인애국단이 활동을 개시한 것은 이봉창의 의거였다. 김구는 도쿄에 이봉창을 파견하여 일왕을 처단하도록 하였고, 1932년 1월 8일 일왕이 육군 관병식(觀兵式)을 참관한 후 환궁할 때 도쿄 사쿠라다문 앞에서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이 폭탄은 일왕의 마차가 아니라 궁내대신이 타고 있던 마차였고, 그마저도 화력이 약해 의거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본의 중심부인 도쿄에서 일본의 최고통치자인 천황을 향해 이루어진 의거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중국 각 신문들은 이봉창의 의거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보도기사를 게재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만주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었고, 또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남경을 압박할 수 있다는 이유로 상하이를 침공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공작으로 일본인 승려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빌미로 1월 28일 상하이를 침공하였다. 이는 1·28사건 또는 제1차 상하이사변으로 불린다. 국민당 정부군이 강력하게 저항을 하였으나 결국 3월 1일 상하이는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봉창 의거 이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사변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김구는 일본군사령부가 황포강의 홍구 부둣가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 이즈모호에 설치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김구는 곧 한인애국단의 특무활동으로 이즈모호를 폭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특무공작은 황포강에 잠수로 이즈모호에 접근한 후 특수폭탄을 아래에 설치하여 약속된 시간에 폭파시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인 주에서는 잠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중국인 잠수부 두 명을 1,0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고용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2월 12일 12시 30분에 폭파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중국인 잠수부들이 공포감으로 인하여 제 시간에 폭탄을 설치하지 못하고 이즈모호에서 10여 미터 밖에서 폭탄이 터져버려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김구는 이어서 훙커우(虹口)에 있는 일본군 강만(江灣) 비행장과 부두의 무기창고를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윤봉길 등 몇 명을 부두노동자로 침투시켜 도시락과 수통 모양의 폭탄을 가지고 가서 파괴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폭탄을 만들고 성능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시일이 지연되었고, 또 1932년 3월 초에 이르러 일본군과 중국군이 임시휴전을 하는 바람에 폭파 계획이 중지되었다.

이어서 4월 29일에는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가 단행되었다. 이날은 일왕의 생일이면서 상하이사변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기념식이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날 행사에 상하이 주둔 일본군총사령부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들이 참석하였다. 이봉창의 의거 때와 마찬가지로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준비하여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2부 행사가 시작되고 ‘기미가요’ 제창이 끝날 무렵 폭탄을 단상 중앙을 향해 던져서,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육군대장과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 사다쓰구(河端貞次) 등이 사망하고 그 외 일본군 수뇌부 및 거류민 관계자들 다수가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이 훙커우공원 의거를 계획하고 준비하던 단계에서 이덕주(李德柱, 또는 서이균徐利均)와 유진식(俞鎭植, 또는 유진만俞鎭萬)은 국내로 잠입하여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를 처단하려고 하였다. 이덕주와 유진식은 상하이의 대한교민단 산하에 조직되어 있던 의경대 대원이었는데, 김구의 밀명을 받고 국내로 파견 도중 황해도 신천경찰서에 체포되어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한인애국단은 당시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던 만주에서도 거사를 계획하였다. 1932년 3월 일본은 만주국을 세워 만주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고 일본이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하지만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이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국제연맹에 제소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다. 국제연맹에서는 릿튼(Lytton)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이 지역에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김구는 릿튼조사단이 일본의 조계지(租界地 : 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인 다렌(大連)에 도착하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또한 일본의 주요인물들이 이들을 영접할 것이기 때문에 이 시기를 활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최흥식(崔興植)과 유상근(柳相根)을 각각 다렌으로 파견하였다. 릿튼조사단이 1932년 5월 26일에 도착하여 30일에 오전에 다음 행선지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5월 30일로 거사일자를 잡고 릿튼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영접을 준비하고 있을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 남만철도 총재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 관동청장관 야마오카 만노스케(山岡萬之助) 등을 처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준비하는 사이에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의거가 일어났고 김구는 일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최흥식이 임시 정부로 전보를 보냈는데, 이것이 상하이의 일본전신국 게시판에 ‘배달불능 전보’로 올라왔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상해 주재 일본 총영사관이 관동청에 연락하여 발신인의 체포를 요청하였다. 그 결과 불행하게도 의거 결행 이틀 전인 5월 24일 최흥식, 유상근이 붙잡혔다.

이와 같은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은 일본과 중국 등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윤봉길의 의거로 인한 일제 측의 타격은 매우 컸기 때문에 일본 측은 곧 주모자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상하이 주재 한인 교민들을 무작위로 체포당하였고 안창호, 이유필 등의 독립지사들도 검거되었다. 그 외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관계자 및 독립지사들은 일제의 검거를 피하여 오랜 기간 임시 정부의 근거지가 되었던 상하이를 벗어나 도피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은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재확인시켜주었으며, 이후 전개될 중국과의 항일연대활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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