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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빈당

화적(火賊)을 넘어 의적(義賊)으로, 반봉건·반외세를 외치다

1900년(고종 37) ~ 1904년(고종 41)

1 활빈당의 배경 – 조선 후기 화적의 활동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민란이 각지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농민투쟁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농민투쟁의 사회경제적 배경은 우선 17~18세기 이래 지속되어 온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 한 요인이며, 또 하나는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봉건적 수취체제의 모순 심화와 정치 기강의 문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관료·상인·고리대금업자이 지주(地主)가 되면서 다수 농민층은 급속하고 광범하게 몰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여건은 고종 13년(1876) 개항 이후 보다 가속화되었다. 일본과의 교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된 물품은 미곡이었다. 일본자본주의는 토지로부터 축출되어 도시로 대량 방출된 노동자층과 도시빈민층을 위한 식량을 마련해야 했고, 이 도시 노동자들의 식량을 조선에서 미곡을 수집해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일본에 의해 곡물시장이 확대되면서, 원래의 지주층뿐만 아니라 관료나 상인들이 토지집적 요구가 크게 자극되었고, 다수의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축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과정에서 토지에서 유리된 수많은 ‘유민(流民)’들이 발생하였으며, 이 유민들 중 일부는 무장집단화하여 부호가와 양반가를 주로 습격하는 이른바 ‘화적’이 되었다. 1900년경에 등장한 활빈당은 멀리는 조선 후기, 가까이는 19세기 후반 이래 크게 발생한 화적집단의 질적 발전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조선 후기 이래 간헐적으로 화적이 계속 발생했지만, 그것은 대개 일부 지역에 한정된 소규모의 형태였다. 그러나 고종 1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적이 더욱 현저하게 발생하기 시작한다. 특히 1876년 이후 수년간 화적이 매우 성행했는데, 이는 1876년~1877년 두 해의 한재(旱災)가 큰 원인이었다. 고종 14년(1878) 좌포청(左捕廳)에 체포된 화적들의 진술에 따르면, 그들은 20~30명에서 60~70명 정도 무리를 지어 이동하면서 각지의 부호가와 장시를 습격·약탈하는 활동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고종 16년(1880) 후반에 들어서면 화적의 활동에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화적들은 부호가의 선산(先山)을 파헤쳐서 두개골을 훔쳐낸 뒤 협박문을 보내 다액의 돈과 교환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무렵부터 화적들이 지방관아를 습격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되었다. 1888~1889년의 큰 가뭄은 화적의 발생을 더욱 격화시켰다. 고종 28년(1892) 경기도 고양·파주 등지에는 화적이 너무 성행하여 도로가 끊기고 장시가 공허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1870년대부터 1890년대에 이르기까지 화적의 발생 수나 그 활동 내용은 갈수록 격화되어 갔다. 특히 19세기 말경에 나타난 화적들은 전국에 걸쳐 발생했으며 장기적으로 나타났다. 광범위한 화적들의 활동 속에서, 삼남지방의 화적들은 상호 연결을 가지면서 전국적인 조직을 정비해 나갔으며, 일부는 ‘활빈당’을 통한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하기도 했다.

2 활빈당의 조직과 활동

활빈당이 스스로를 ‘활빈당’이라고 칭하며 활동을 개시한 것은 1900년이다. 그러나 ‘활빈당’의 이름이 실제로 일부 화적들에 의해 표방되었던 것은 이미 1886년(고종 23)의 일이므로, 활빈당의 활동개시 시기도 1880년대 후반부터 살펴볼 수 있다.

1898년에 체포된 김덕원(金德元)의 공초(供招)에 따르면, 1886년 1월 충청도 음성군 김덕원의 집에서 김몽돌(金夢乭), 박순길(朴順吉) 등 8명이 모여 박순길을 선생으로 정하고 ‘활빈당’을 결성했다고 한다. 그들은 음성·괴산 등지의 양반가에서 3차례에 걸쳐 총과 칼을 들고 재물을 탈취했고, 2월에는 김몽돌의 당류 8명이 합세하여 16명이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후 6명이 체포되고 나머지는 도주하면서 이때의 활빈당은 해체되었다. 그런데 그들 중 김몽돌 등은 1890년대 전국적인 조직을 주도한 윤동굴(尹同屈)의 파당에 있었으며, 후일 윤동굴의 지휘 하에 있던 화적들이 1900년 활빈당을 다시 결성하였으므로 1886년(고종 23)의 활빈당은 1900년 활빈당의 원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90년대 남한지역의 명화적(明火賊) 조직을 통일한 인물은 윤동굴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파당의 근거지를 경상도 서북지방에 두면서 남한지방의 명화적을 통솔했다. 그는 개별적으로는 김몽돌과 같은 당을 이루어 활동했기 때문에, 1886년의 활빈당은 김몽돌과 윤동굴의 인맥 속에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마련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1897년 윤동굴과 그의 동료들은 전북 금산 부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한편 1890년대 경기·충청 일대에서는 마중군(馬中軍)의 세력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1897년에는 전라·경상도 지역을 순회하다가 1898년에는 강원도 지역에도 나타났다. 1890년대 후반 마중군은 이처럼 활동범위를 넓히면서 각지의 화적들을 모아 밀접한 유대관계를 확보해갔다. 이를 토대로 마중군은 1900년 3월 경기·충청지역의 활빈당 결성을 주도할 수 있었다.

또한 1890년대 충청도 일대에서 주로 활약한 또 하나의 인물은 맹사진(孟士辰)이다. 맹사진은 1896년 경부터 일명 맹감역(孟監役)이라고 자칭하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는 1896~1897년경 공주와 충주 부근에서 활동하다가 1898년부터는 금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이 지역을 근거로 활동을 전개했다. 1900년에 들어서 맹사진의 적당들은 마중군 세력과 연합하여 활빈당을 결성하게 된다.

1900년 3월 들어 충청도 금강유역에서 활빈당을 주창하는 조직의 활동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후 보도에 따르면 활빈당은 금강유역에서 시작되어 3월 말에는 충청북도 지방까지 파급되고 있었으며, 주로 4~50명씩 무리를 지어 총검을 들거나 말을 타고 다니면서 부민의 재산을 약탈했다고 한다. 그들 중 일부는 4월에 경상북도 상주(尙州) 지역까지 옮겨가 ‘활빈당대장의기(活貧黨大將義旗)’라고 쓴 깃발을 들고 활동하는 등, 충청북도과 경상북도 접경지역에서도 출몰하기 시작했다. 충청도지역의 활빈당은 1900년 겨울부터는 바다로까지 진출, 충청·경기 연안에서 수적(水賊)으로 활동하면서, 부근 촌락의 부민가를 약탈했다. 충청도 활빈당의 일부가 수적으로 활동하는 동안, 또 다른 일파는 경기도 지역으로 그 세력범위를 넓혀나갔다.

활빈당은 충청도뿐만 아니라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즉 경상좌도에서 활동하던 파당도 있었다. 이 지역에서 활빈당의 결성 시기는 경기·충청지역 활빈당이 결성된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지역 활빈당의 본격적인 활동이 보도된 것은 8·9월경이었다.

또 하나의 활빈당 조직은 주로 소백산맥 줄기를 타고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지역과 전라도 동부지역에서 활동하던 파당이었다. 1900년 봄 전라북도 고산(高山) 지역에서 출몰하여, 1905년 무렵까지 활동했다. 다만 이 파당의 움직임에 대한 기록이 가장 적어 자세한 활동은 파악할 수 없다.

위와 같이 활빈당의 전국적인 조직은 크게 위와 같이 경기·충청 지역, 경상좌도 지역, 경상도 서부·전라도 동부 지역의 3파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3파 간에는 어떤 종적인 지휘체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상호 횡적인 연대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각 파는 약 50~100명의 구성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80년대 후반 이후 활빈당 조직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체포된 숫자만 200명 정도이니, 체포되지 않은 수를 감한다면 규모는 상당했을 것이다. 1902년 그들은 「활빈당발영」을 통해 그들 조직구성원이 5,772명이라고 밝힌 바가 있는데, 물론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숫자이나 그들의 숫자가 상당했음은 틀림없다.

활빈당의 전체적인 조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활빈당 조직의 전체적인 내용은 상층 지도부 중 극소수만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적이나 활빈당을 막론하고, 입당 절차는 전통적으로 같은 당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박한 뒤 칼을 입에 물고 땅에 엎드려서, 혹은 몽둥이로 몇 대를 맞으면서 잡혔을 때에도 당의 동료들을 팔지 않는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어떤 경우에는 가명으로 적호(賊號)를 따로 부여받기도 했다. 조직체계에 대해 철저한 보안, 입당시의 맹세, 가명 사용, 조직에 대해 발설할 시 보복 조치 등을 통해 활빈당은 철저히 베일 속에 싸인 채 활동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다.

3 활빈당의 성격

활빈당의 활동 내용은 주로 부호에 대한 탈취, 관아 습격, 장시 습격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특히 부호·양반가에 대한 습격 사례가 두드러지며 그 횟수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경상좌도 지역에서는 부호가로서 활빈당의 내습을 받지 않은 집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고, 활빈당원의 내습을 여러 번 받은 부호가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의 양반·부호가란 봉건적 지주제 또는 고리대 자본에 물적 기초를 두고 있는 계층이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공격은 직접적으로는 반봉건(反封建)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활빈당에 대해 당시 정부 당국자들은 잡아들여 엄히 형벌을 내리고 화적을 잡은 자들을 포상하는 등의 방침을 내세웠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관에서는 항상 민간의 협조를 강조했고, 민간에서는 민간대로 오가작통(五家作統)과 향약을 강화하는 등 대책을 세웠다. 오가작통은 일부 지방에서 효과를 보여, 동민들이 합세하여 화적 무리를 체포하는 사례도 가끔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곧 화적들이 인가를 불태우는 등 보복조치가 뒤따랐기 때문에, 대부분에서는 적도들이 나타나도 동민들이 잡아들이기보다는 도리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기도 했다.

활빈당은 스스로 『홍길동전(洪吉童傳)』에 나오는 활빈당을 계승했다는 특징이 있다. 활빈당의 도대장(都大將: 총대장)인 맹감역은 홍길동을 계승했음을 자처했다. 이는 당시 활빈당 주창자들에게 『홍길동전』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활빈당 주장차들이 자신들의 화적행위가 가진 부정적 성격을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시키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활빈당은 부호가를 습격하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활빈당’의 이름으로 합리화했다. 이것은 자신들의 행동을 이전과 같이 단순한 화적이 아니라 활빈하는 의적활동으로 자처하고자 한 것이다. 즉 그들은 활빈당을 표방함으로써 소극적인 화적에서 적극적인 의적으로 변신을 꾀하였다. 명실상부한 의적이 되기 위해 그들은 탈취한 재물 중 일부를 빈민들이나, 영세 소상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부민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행위을 통해 활빈당을 따르는 무리는 더욱 늘어나고 그들의 세력기반이 더욱 커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 하나 특징적인 활동은 외국인에 대한 습격이었다. 외국인을 습격하면서 돈이나 무기만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폭행을 가하여 살상을 입히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외국인 중에서도 일본인에 대한 습격 건수가 많았던 것에서 거류일본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기도 했지만 활빈당이 일본인들에게 특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활빈당의 일본인에 대한 습격이 있을 때마다 일본영사는 활빈당 토벌을 한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는 등 외교문제가 되기도 했다. 활빈당이 습격한 일본인들은 내륙에 들어와서 활동하던 철도·광산 관계자들이나 상인이었다. 1900년 활빈당이 발표했다고 알려진 「대한사민논설 13조목」가운데에서 그들은 타국에의 무곡(貿穀)을 금지할 것, 시장에 외국상인의 진출을 엄금할 것,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국내의 철로 부설권을 타국에 양도하지 말 것 등을 주장한 바 있었는데, 외국인에 대한 습격 행위를 통해 이 주장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활빈당의 활동은 ‘반외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 활빈당의 해체

1906년 활빈당은 지도부 상실과 국내 정치상황의 급변으로 급격히 해체기에 들어서게 된다. 이미 1904년 러일 전쟁부터 국내 치안은 일본의 군사경찰이 담당하고 있었고, 1906년에는 고문경찰제(顧問警察制)가 대폭 확대 실시되었으며 조선인 경찰의 수도 크게 증원되었다. 이와 같은 치안강화는 결국 활빈당 지도부가 대량 체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1906년 이래 을사늑약에 격분한 각지의 유생 혹은 평민들은 자진 봉기하여 의병을 조직하여 대일 항쟁이 나서게 되었고, 이와 같은 의병의 봉기는 활빈당의 여당(餘黨)들에게도 어떤 선택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들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여전히 활빈당의 활동을 계속하는 길이었다. 실제로 체포되지 않은 활빈당의 여당들은 충청도·경상도 접경지대에서 활빈당의 이름으로 활동을 지속했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의병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의병에서 활빈당의 이름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으나 1908~1910년 전국 각지의 의병장 중 무직 혹은 화적 출신이 30여명에 달하고 있었으므로 활빈당 여당들도 상당수 가담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활빈당 여당들이 의병으로 변신한 것은 식민지화되어가는 시대적 전환을 맞이하여 ‘반봉건’에서 ‘반외세’로 주된 투쟁무대를 옮긴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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