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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人民委員會)]

해방 이후 조직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

1945년

1 개요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는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만들어진 최초의 건국준비단체이다. 여운형(呂運亨)의 구상은 건국동맹(建國同盟)을 기초로 민족주의 세력을 비롯한 모든 정치 세력을 총망라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송진우(宋鎭禹) 등을 결합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직후부터 치안유지와 식량 대책 등의 현안에 발 빠르게 대처하였고, 이는 당시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정권의 수립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방 정국을 압도하였지만 민족주의 세력과 갈등이 지속되었고, 이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이 수립되자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한편 건국준비위원회는 각 지방에 지부를 두었으며, 지부에서는 국가수립을 목표로 하는 지방자치가 이루어졌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에는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가 이를 대체하였다. 그러나 미군정(美軍政)은 인민위원회를 강하게 견제하며 식민지시기에 활동했던 군·경찰·관료들을 대거 활용하였고, 이로 인해 인민위원회의 활동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북한지역의 인민위원회는 소련군의 지원 아래 북한 정권 수립에 이바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2 여운형과 송진우의 교섭이 실패하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구상은 여운형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1944년 8월 10일, 조동호(趙東祜)·현우현(玄又玄)·황운(黃雲)·이석구(李錫玖)·김진우(金振宇) 등과 함께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건국동맹은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반추축(反樞軸) 제국(諸國)과 협력하여 대일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전국에 걸쳐 세포조직을 결성하였으며, 중국 연안의 ‘독립동맹’을 비롯한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도 긴밀히 연락하였다.

1945년 8월 중순, 여운형은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는 송진우, 안재홍(安在鴻), 조만식(曺晩植), 박헌영(朴憲永), 허헌(許憲) 등의 국내 주요 인사와 함께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자 했다. 그중에 송진우와의 교섭은 특기할 만하다. 양측은 8월 12일과 13일에 걸쳐 비밀 교섭을 가졌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여운형 측은 ①일제의 항복이 결정되었으므로 한국인 스스로가 주권 확립에 매진할 것, ②국내외 혁명단체를 총망라하여 독립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송진우 측은 ①조선총독부가 연합군에게 정권을 인도하기 전까지는 투쟁이 불가능하다는 것, ②충칭(重慶) 임시정부를 적통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한국인의 권력기관이 결성되다

1929년 이래 줄곧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여운형은 조선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지도자였다. 조선총독부도 여운형을 조선의 최고 지도자 중에 한 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의 패전이 기정사실화 되자 조선총독부는 재조일본인의 무사 귀환과 정권의 안정적인 이양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 내의 치안 유지가 관건이라고 보고, 한국인 지도자에게 협력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오전, 정무총감(政務總監)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와 여운형의 회담은 그 일환이었다. 여운형은 ①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고, ②3개월간의 식량을 보전하며, ③정치운동에 간섭을 배제하였으며, ④학생과 청년, 그리고 ⑤노동자와 농민을 훈련하고 동원하는 데 조선총독부가 간섭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엔도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엔도와의 교섭 직후에 여운형은 곧장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에 착수했다. 그는 장권(張權)과 이정구(李貞求)에게 각각 치안대 조직과 식량 대책 마련을 지시하였다. 또한 이만규(李萬珪)·이상백(李相佰)·양재하(梁在廈)·이여성(李如星) 등, 건국동맹원을 모아 향후 활동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정치운동의 방식과 필요성에 대해 합의하였다. 즉, 해방 이후의 정치운동은 ①치안유지 활동만으로는 민중의 정치열을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비합법적 수단과 합법적 수단을 병행해야 했다. 또한 ②치안유지 활동만으로는 민족반역자를 배제할 수 없으므로 정치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이 강조되면서 한국인의 권력기관으로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결성되었다.

여운형 등이 건준 대표로 수행한 최초의 공식 업무는 일제 말기 총동원체제 하에서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과 경제범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석방된 인물들은 건준의 지방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건준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건준이 16일에 살포한 「조선 동포여」라는 제목의 삐라도 참고할 만하다. 이 삐라는 ‘현 단계가 중대하므로 신중히 행동해야 하며, 지도자의 포고에 따라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같은 날 정오, 여운형은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엔도와의 교섭 내용을 대중에게 직접 보고하였고, 새로운 역사와 국가 건설을 위한 단결과 협력을 호소했다. 한편 안재홍은 경성중앙방송국에서 「해외·해내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3회에 걸쳐 송고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건준은 치안유지와 식량 확보를 위한 활동도 전개하였다. 치안유지를 위해 8월 16일 장권을 대장으로 하는 ‘건국치안대’가 결성되었다. 치안대의 활동은 작지 않은 효과를 보았다. 18일에 습격과 폭행, 파괴 등의 접수가 278건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21일에는 42건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또한 25일에는 1건으로 거의 사라진다. 한편 건준은 ‘식량영단임시운영위원회’를 조직하여 식량의 부정유출을 방지하고 일본군의 군용미 저장소를 조사하였다. 식량문제의 연구도 이 위원회의 중요한 활동이었다.

4 조선인민공화국이 성립하다

건준이 해방 정국을 완전히 압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송진우를 비롯한 민족주의 우파 세력은 여전히 건준에 비협조적이었다. 반면에 김병로(金炳魯)·백관수(白寬洙) 등은 건준의 좌익적 성격을 건준 내부에서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들은 여운형이 8월 18일의 테러로 인해 한동안 서울에 재주(在住)하지 않았을 때, 안재홍 위원장대리를 방문하여 ‘전국유지자대회’의 개최를 요구하였다. 안재홍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건준을 중심으로 하던 해방 정국에 균열이 생겼다.

미군정은 건준이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단체 이상으로 인식되는 것을 우려하였다. 건준은 이에 대한 대응책을 고심하였다. 8월 22일 건준은 12부 1국 체제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중앙위원회 위원도 32명으로 증가하였다. 한편 여운형 등의 건준 지도부는 안재홍과 김병로 등이 합의한 ‘전국유지자대회’의 개최를 반대하였다. 갈등이 심화되면서 여운형을 비롯한 건준 지도부 전원이 사직을 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태는 일단 9월 4일의 확대중앙위원회에서 여운형과 안재홍의 사임이 거부되면서 마무리된다.

9월 4일의 회의에서는 ‘전국유지자대회’가 아니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의 개최가 합의되었다. 9월 6일에 열린 이 대회에서 “노동자, 농민, 모든 근로인민대중을 위한 새로운 국가”와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결정하고,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결정하였다. 곧바로 진행된 선거에서는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포함한 5명의 전형위원을 선정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55명의 인민위원과 20명의 후보위원, 12명의 고문이 선출되었다. 9월 8일에 열린 제1차 회의의 결정에 따라 14일 이승만을 주석으로,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 부서가 발표되었다. 이로써 건준은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5 인민위원회를 통해 지방자치를 경험하다

전국에 걸쳐 있는 건준 지부는 8월 31일 현재 145개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인민공화국은 9월 7일에 각지의 도-시-군-면 단위의 인민위원회(이하 인민위)를 조직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건준 지부가 자연스럽게 인민위로 개편되었고, 또는 새롭게 조직되는 경우도 많았다. 최초의 인민위는 9월 12일 결성된 서울시 인민위였으며, 11월 10일에 경기도 인민위가 구성된 것이 마지막이다. 이렇게 결성된 인민위는 도 7개, 시 13개, 군 131개에 달하였다.

인민위는 스스로 건국을 위한 준비기구로 규정하면서 활발히 지방자치를 수행했다. 1946년 4월 24일 열린 전국인민대표회의의 결정서는 인민위의 목적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 결정서의 표현처럼 인민위는 ‘인민의 의사를 충실히 체현하고 있는 인민의 기간적 조직’으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처음부터 “공산주의자의 지원을 받는 가장 강력한 그룹으로 소련 정치와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미군정은 인민위를 대체할 세력으로 식민지시기에 활동했던 군·경찰·관료들을 대거 활용하였고, 이로 인해 인민위의 활동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북한 지역의 인민위원회는 소군정의 인정과 지원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로 인해 인민위원회를 통한 선거도 이루어지는 등, 지방자치 역시 원활하게 추진되었으며, 향후 정부 수립에도 적지 않게 이바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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