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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의정치기구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표 이미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 시기에 수립된 입법자문기구로 1946년 12월 12일 수립되어 1948년 5월 20일 해산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 이후, 군정에 한국인의 참여를 확대하고 온건 좌·우파를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대중적 기반을 가진 입법자문기구를 조직하고자 했던 미군정의 의도에 따라 조직되었다. 입법의원은 운영기구로 본회의와 상임위원회, 특별위원회를 두었으며 주로 법률안을 심의, 의결하는 활동을 했다. 이러한 면에서 입법의원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의정치 기구라 할 수 있었지만, 법률의 효력 발생을 위해서는 군정장관의 최종적인 인준과 서명을 거쳐야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2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설립 배경

1946년 5월 6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문제 해결을 위해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실시되었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가 중단되었다. 미소공위 중단 이후, 미소 양국은 모두 장래의 임시 정부 수립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한국인들 사이에서 지지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한국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변화에 따라 미군정은 기존에 자문기구로 설치했던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이 우익만의 정치조직으로 전락하여 한국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온건 좌·우파 정치인들까지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대중적 기반을 가진 입법자문기구를 조직하고자 했다. 이에 더해 미군정은 이러한 입법자문기구 조직을 위해 기존에 추진하던 우파 중심의 정계통합 방침을 철회하고 온건 좌·우파가 주도하는 정계 통합운동인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게 되었다.

미군정의 새로운 계획에 따라 1946년 6월 29일 러취(Archer Lynn Lerch) 군정장관이 주한미군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에게 입법기관 설치를 건의하며 미군정의 입법자문기구 설립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하지는 7월 9일 러취의 제안에 동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1946년 8월 24일에는 군정법령 118호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령이 공포되었다.

이와 같은 미군정의 과도입법의원 설립 시도에 한국의 정치세력들은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좌익세력의 결집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러취의 제안이 발표된 후 ‘정치적으로 지금 이러한 기관을 설치할 때가 아니며 이 안을 그대로 강행한다면 민주의원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과도입법의원 설립에 반대했다. 반대의 요지는 입법의원 설립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기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우파 대부분은 입법의원 설립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입법의원 설립을 둘러싼 이러한 좌우의 이견(異見)은 당시 진행되던 좌우합작운동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좌익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이용한 입법기관 창설에 끝까지 반대했으며 이에 따라 1946년 7월 27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제시한 좌우합작 5원칙에는 ‘군정고문기관 또는 입법기관 창설에 반대할 것’이라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곧 좌익이 미군정에 대한 공세적인 노선을 본격화하며 좌우합작운동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자 우파와 온건좌파만 남게 된 좌우합작위원회는 미군정의 과도입법의원 설립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3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설립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좌우합작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주한미군사령관 하지가 임명하는 관선의원 45명과 선거를 통해 선출된 민선의원 45명으로 구성되도록 규정되었다. 이에 따라 1946년 10월 17일부터 22일까지 입법의원의 민선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런데 이 선거과정에서는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우선 선거가 10월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와중에 진행되어 좌익의 선거 참여가 거의 불가능했다. 선거 절차에도 문제가 많아 공고 기간이 충분하지 않았고 그 일시도 명확하게 공표되지 않은 채 실시되었을 뿐 아니라 문맹자가 대다수인 농민들을 대상으로 치러진 탓에 많은 경우 투표는 가장(家長)이나 반장, 이장이 대행했다. 리·동 단위에서부터 도 단위에 이르기까지 4단계에 걸친 간접선거 방식 또한 실제 민의(民意) 반영을 어렵게 했다.

민선의원 선거 결과 대부분 우익에 속하는 인사들이 민선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선거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들을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였다. 이에 각 정당시국대책간담회에서는 미군정이 ‘혼란한 상태에 편승하여 일부 특권계급의 지지를 얻어 급속히 입법의원 선거를 강행하였다’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여 입법의원선거를 비판하였으며 , 입법의원선거를 감시하였던 좌우합작위원회에서도 선거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들어 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요구했다.

이처럼 민선의원 선거가 비판에 부딪치자 미군정은 11월 4일로 예정되어 있던 입법의원의 개원을 연기하고 11월 25일 가장 문제가 된 서울과 강원도의 재선거를 선언했다. 재선거를 치르고 난 이후에도 이에 대한 우익 세력의 반발, 추천 및 선출된 관선, 민선의원들의 입법의원 참여 거부 등으로 입법의원의 개원은 순탄치 않았다. 한국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등원을 거부하고 상당수의 관선, 민선의원들이 의원직을 수락하지 않아 정족수 미달로 입법의원 개원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미군정은 개원을 위해 입법의원의 정족수를 3/4에서 과반수로 급하게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1946년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57명의 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하였다.

4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구성과 활동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은 김규식, 부의장은 최동오와 윤기섭이 맡았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또한 운영기구로 본회의와 위원회를 두었다. 본회의는 전체의원을 구성원으로 하는 최고 의결기구였으며, 위원회는 본회의의 위임사항을 심의하는 기구로 위원회에는 상임위원회와 특별위원회가 있었다. 상임위원회로는 법제사법(法制司法), 내무경찰(內務警察), 재정경제(財政經濟), 산업노농(産業勞農), 외무국방(外務國防), 문교후생(文敎厚生), 운수체신(運輸遞信), 청원징계(請願懲誡) 등 8위원회를 두었고, 특별위원회로는 자격심사(資格審査), 임시헌법(臨時憲法)·임시선거법기초(臨視選擧法起草), 행정조직법기초(行政組織法起草), 식량 및 물가대책, 적산대책(敵産對策), 부일협력자(附日協力者)·민족반역자(民族叛逆者)·전범(戰犯)·간상배(奸商輩)에 대한 특별법률조례기초 등 6개의 위원회를 준상설로 두었다. 상임위원회의 각 위원회 및 그 분과는 군정청이나 이후 이를 개칭한 과도정부의 기구와 상응하도록 배려되었다. 또한 입법의원은 6개의 특별위원회를 두는 이례적인 구성을 취했는데 이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국가 건설에 대한 당시 혁명적인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입법의원은 대내적으로는 법률안의 심의 의결, 미군정청이나 과도정부의 행정 일반에 대한 감독, 그리고 청원을 비롯한 특정 사안 및 그 처리에 대한 조사나 건의 등의 활동을 실시했고, 대외적으로는 한국을 대표하여 연합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 미소공위 또는 국제연합(UN)에 의견을 표명하거나 건의 또는 요구를 제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들 중 입법의원 활동의 주가 되었던 것은 법률안의 심의와 의결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입법의원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대의정치기관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률로서 효력 발생을 위해서는 법률안이 입법의원에서 심의를 거쳐 통과되고, 군정장관의 인준과 서명을 거쳐야한다는 점에서 입법의원의 활동은 정상적인 국회의 위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입법의원에서 통과시킨 주요 법령으로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 관한 제102호법령」의 제7조 개정, 「하곡수집법」, 「미성년자노동보호법」, 「입법의원선거법」,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조선임시약헌(朝鮮臨時約憲)」, 「사찰령 폐지에 관한 법령」, 「공창제도 등 폐지령」, 「미곡수집령」 등이 있었다. 해방정국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였던 토지개혁법안은 입법의원에서 논의되었으나 입법의원 내 정치세력들 간의 입장 차이 때문에 통과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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