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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과 좌절

1946년 ~ 1947년

1 개요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는 1946년 7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 우 정치인들이 연합하여 만든 기구였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원회가 휴회 된 직후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결과 1946년 7월 25일 김규식, 여운형의 주도하에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중도 좌·중도 우·우파를 포괄한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위원회의 목적은 남북협상을 통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이었다. 좌우합작운동위원회는 좌우합작7원칙을 발표하고 적극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은 좌·우익세력의 반발, 미군정의 지원중단, 여운형의 암살 등으로 인해 동력을 잃게 되었고, 결국 1947년 12월 6일 해체되었다.

2 좌우합작운동의 배경

1946년 3월 20일부터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이하 미소공위)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양측 협상은 지지부진하여 결국 5월 6일부터 무기한 휴회하기로 결정되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이하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반대한 정당과 사회단체는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 없다는 소련의 주장과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미국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선 것이 주된 요인이었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가장 먼저 ‘단정론’을 제기하였다. 전라북도 정읍에서 진행한 연설에서 “통일정부 수립이 어렵기 때문에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수립하자”라고 주장했다.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이하 한민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치 세력들은 이승만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분단이나 분권의 경험이 없던 한국인들에게 단정은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미군정과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단정론’을 지지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좌익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소련과 협의하여 한국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고, ‘반소반공’ 의식을 가진 이승만, 김구 등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군정은 좌우익을 연결할 수 있는 중도파 인물로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목하였다. 미군정을 이끄는 하지 중장의 좌우합작에 대해 제안을 받은 김규식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결국 허락하였고. 여운형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미군정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좌우합작을 통해 미소공위를 다시 열어야 민족적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3 좌우합작위원회의 조직

미군정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할 임무를 맡은 사람은 버치(Bertsch, L.) 중위였다. 1946년 5월 25일 버치의 주선으로 우측 대표 김규식, 원세훈(元世勳), 좌측 대표 여운형, 황진남(黃鎭南)이 회담하였다. 5월 30일에 2차 모임이, 6월 14일에 3차 모임이 이루어졌다. 미군정 하지 중장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19일 좌우합작을 위한 대표들이 결정되었다. 우익 대표는 김규식, 원세훈, 김붕준(金朋濬), 안재홍(安在鴻), 최동오(崔東旿)였으며 좌익 대표는 여운형, 허헌(許憲), 정노식(鄭魯湜), 이강국(李康國), 성주식(成周寔)이었다. 7월 22일, 25일에 정례회의를 위한 예비회담이 진행되었고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7월 25일에는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좌우합작위원회가 추진한 좌우합작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좌우 사상을 뛰어넘어 하나의 임시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이 먼저 연대하는 합작운동을 전개하고, 이후 “서울과 평양 사이에 남북연합을 추구하여 최종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는데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좌우합작위원회에서는 좌우합작의 원칙을 결정하기 위한 정식회담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합작원칙을 정하는 것을 두고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다. 좌익에서 5원칙을 제기하였는데, 여기에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항은 미국과 우익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 상황도 좋지 않았다. 9월 총파업, 10월 항쟁 등이 일어나서 좌익과 우익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여운형을 제외한 좌익 인사들이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탈퇴하게 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여운형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을 설득하였으며, 좌익과 우익이 제기한 원칙을 조정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4 좌우합작7원칙의 발표와 각 세력의 반응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7원칙’이 발표되었다. ‘좌우합작7원칙’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셋째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분여하고 중요한 산업은 국유화 하며 지방자치제를 확립한다. 넷째 친일파를 처리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한다. 다섯째 정치 운동자를 석방하고 남북·좌우의 테러 행동을 제지한다. 여섯째 입법기구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한다. 일곱 번째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의 자유를 보장한다.

좌우합작7원칙이 발표되자 이것에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으로 나누어졌다. 조선공산당을 이끌었던 박헌영(朴憲永)은 ‘좌우합작7원칙’이 단정을 지향하는 입법기구 수립을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민당은 유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은 “국가의 재정을 파탄 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미군정의 최고 자문기관이었던 남조선대한국민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약칭함)은 좌우합작7원칙을 지지했다. 김구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한독당’)은 좌우합작의 성립이 8·15 이후 최대의 수확이고, “좌우합작7원칙은 민주국가를 완성하기 위한 타당한 조건이다”라고 하며 전면 지지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의 효력이 의문시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미군정은 좌우합작7원칙이 발표되자 10월 8일 성명을 발표하고 이것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10월 12일에는 법령 제118호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 ‘입법의원’)을 창설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입법의원의 과반수는 미군정이 지명한 사람으로 선정하였으며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추천한 인사들이 상당수 임명되었다. 나머지 과반수는 간접선거로 선출되었는데 거의 대부분 극우 성향을 가진 인사들이 당선되었다. 좌익세력은 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5 좌우합작운동의 좌절과 좌우합작위원회의 해체

좌우합작7원칙이 발표된 이후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우파들은 좌우합작위원회 확대 강화했다. 그들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지하는 정당·단체들을 조직하여 좌우합작위원회를 대중적으로 영향력 있는 단체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미군정은 입법의원이 성립되었다는 것 자체에 주목하였고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는 문제는 깊게 고려하지 않았다. 미군정의 의도는 좌우합작 운동의 성공보다는 좌익세력을 배제한 입법의원을 설치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이 입법의원이 설치되는 것에 반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결국 미군정과 하지 중장은 입법의원 설치가 완료되자 좌우합작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1946년 11월, 북에서는 각급 인민위원회 선거가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선출된 의원들이 선임한 인민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결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1947년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다. 6월 23일 각 정당, 사회단체가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으로 참여하겠다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6월 25일에는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양측 대포단과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며, 7월 1일에는 평양에서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재개된 미소공동위원회는 진행이 잘 되지 않았다.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여운형이 암살되었다. 또한 미국 정부는 1947년 3월 12일 그리스와 터키 등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유럽 공산주의에 대항하고,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부흥을 지원하는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마련했다. 7월경에는 ‘대소봉쇄정책’을 추진하였다. 미국의 대외정책의 변화는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지 않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947년 9월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한국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국제연합(UN)으로 이관시켰다. 1947년 10월 18일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미국 측 수석대표 브라운(Albert E. Brown) 소장은 국제연합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토론이 끝날 때까지 공동위원회 업무를 중단할 것을 소련 측에 제안했다. 소련 측 수석대표 스티코프(T. F. Shtikov)는 소련 대표단의 서울 철수를 발표하였고, 10월 21일 평양으로 떠났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중도파는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947년 12월 6일 좌우합작위원회는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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