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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

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과 벼농사

미상

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 대표 이미지

울산 무거동 옥현유적의 소구획 논

경남대학교박물관·밀양대학교박물관

1 개요

청동기시대 가을 벌판은 황금색 벼가 익는 논으로 둘러싸여 있었을까?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농경은 한반도나 일본에서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벼농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러한 이유는 사회의 발전 정도가 낮아서일 수도 있지만, 수렵 채집만으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누구에게나 채소와 고기를 두고 어느 것을 먹고 싶냐 물어보면 고기를 선택할 것이다. 그럼에도 농사를 선택한 이유는 예측 가능한 식량의 확보 때문일 것이다.

그런 예측 가능한 농사의 시작, 특히 벼농사를 시작하던 시점의 논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하지만 무거동 옥현 유적의 논은 큰 강을 낀 넓은 평야에 펄쳐진 것이 아니라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을 모아서 만든 작은 논이었다.

2 무거동 옥현 유적의 논

진주 대평 유적에서 이랑과 고랑이 파도처럼 남겨진 밭이 확인되면서 청동기시대 밭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하지만 논은 이랑과 고랑 같은 복잡한 형태가 아니고, 물이 차있는 구조라서 형태적인 특징이 잘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1998년 울산광역시 남구 무거동 일대의 나즈막한 언덕 아래의 평지에서 집자리와 논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유적은 언덕 위의 집자리와 골짜기를 따라 내려간 아래쪽에 논이 위치하고 있었다. 언덕 위에는 청동기시대의 집자리가 여러 채 있었는데, 평면 형태가 긴네모꼴이며, 가장자리에는 벽을 세운 기둥의 흔적과 물을 빼기 위한 배수구 등도 확인되었다. 벽은 홈을 파고 판자를 세우는데, 배수구 내에 작은 기둥을 촘촘히 박아 보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둥구멍이 없는 곳은 출입을 위한 문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집안에는 노지도 있고 특이하게 집 안에 선반이나 테이블 같은 것들을 만든 흔적도 확인된다.

이런 집자리가 있는 언덕 사이에서부터 골짜기를 따라 도랑이 있는데, 처음은 둥글고 얕지만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차 깊어지고 폭도 넓어진다. 이것은 논과 논 사이의 수로와 연결되어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시설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강이나 저수지의 물을 이용하여 논에 물을 대지만 농사의 초기에는 천수답이라고 하여 빗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즉 지금과 같이 넓은 평야의 논이 아니라, 작은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모아서 만든 논이 중심이었던 것이다.

무거동 옥현의 논을 모두 조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논을 이루고 있는 논면의 논둑, 수로, 도랑, 벼의 규산체-플랜트오팔 분석, 산화철·망간 집적층의 유무 등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였다. 확인된 논은 지금처럼 광활한 대지의 황금벌판이 아니라 1~3평 정도로 작게 만들어진 작은 규모의 논이었다. 아마도 빗물에 의존하는 천수답으로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크게 농사를 지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이후 저수지나 개울의 물을 이용하기 위해 관개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대규모의 공사였으므로, 사회의 통합이 가속된 국가 형성기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3 한반도에서 벼농사의 시작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농경의 흔적은 신석기시대의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에서 확인되었다. 조·피 등의 곡물의 낟알, 돌낫, 돌쟁기, 갈돌 같은 농구가 같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농구는 평남 온천군 궁산리, 평북 용천군 신암리 등지에서도 확인되어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에 농경을 시작하였고, 밭농사에 의한 잡곡 농사가 중심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벼농사는 식물규산체의 분석을 통해 신석기시대 후기라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지만, 하남 미사리, 서산 휴암리, 천안 백석동, 안면도 고남리, 순천 대곡리, 합천 봉계리, 거창 대야리, 울산 검단리 유적 등지의 토기에 찍힌 볍씨 자국이나 부여 송국리, 여주 흔암리, 강릉 교동, 충주 조동리, 진주 대평, 산청 소남리 등지의 불에 탄 쌀의 존재 등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과 논산 마전리, 보령 관창리 등지에서 확인된 논의 존재는 농사의 실질적인 증거이다.

하지만 벼농사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날씨와 많은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정적인 지역에서만 가능하다.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는 삼한에 대해서 오곡과 벼를 심기에 알맞다는 기록이 있어 청동기시대 이래 농사는 한반도 남부의 사람들에게 생업의 주요한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4 왜 쌀인가?

쌀은 크게 안남미라고 불리는 인디카와 우리가 먹는 자포니카로 나뉜다. 인디카는 동남아시아에서 주로 생산되는 것으로, 쌀의 길이가 길고 찰기가 적다. 주로 볶음밥으로 먹으면 맛있는 쌀이다. 이에 반해 자포니카는 길이가 짧고 찰기가 많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쌀은 주로 인디카 혹은 유전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것이 주류를 이루지만, 청동기시대에 이르면 자포니카가 많아지게 된다. 그렇다면 왜 많은 곡물 중 쌀을 선택한 것일까?

그 이유는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 쌀은 장기 보존이 가능하다. 쌀은 전분-탄수화물로 이루어져 있어 에너지 효율이 높고, 시간이 지날수록 맛은 없어지지만 몇 년간 보관이 가능하다. 두 번째 쌀은 협소한 땅에서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사냥이나 목축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동물들이 뛰놀 수 있는 넓은 땅이 필요하다. 이에 반해 농사는 좁은 공간에서 많은 수확물이 나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쌀은 연작의 피해가 적다. 매년 식량은 필요한데, 감자나 옥수수 등은 연속해서 재배할 경우 땅의 영양분을 빨리 소진시켜 흉년이 들 가능성이 높다. 이에 반해 쌀은 상대적으로 소진시키는 정도가 적다. 이런 세 가지 이유로 쌀이 주식으로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벼의 재배는 청동기사회의 기반을 바꾸어 놓았다. 벼농사를 짓기 위해 정착생활이 일반화된다. 수확한 쌀은 쥐나 쌀벌레 같은 해충의 피해를 막기 위해 바닥을 땅에서 띄운 고상건물에 보관하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방호시설을 설치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쌀 중심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5 세계사 속의 농경

세계사적인 견지에서 농경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의 시작과 일치한다. 한반도에서도 농경의 시작은 신석기시대부터 확인되지만, 농경이 중심이 되는 생업경제로의 전환은 벼농사가 시작된 청동기시대부터인 것이다.

서구에서는 고든 차일드(Gorden V Childe, 1892~1957)의 연구로 농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농경의 등장을 ‘신석기 혁명’이라 하였는데, 단순히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의 시작으로 바뀐 삶에 대한 문제로 관심을 넓힌 점이 중요하다. 그는 농경의 발생과정을 건조화된 날씨라는 환경적 요인에 집중하여 살폈다. 지구 온난화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근동지방에서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었고, 물이 있는 오아시스 근처에 사람과 동물이 집중해서 모여들게 되었다. 제한된 물을 두고 사람과 동물, 식물들이 나누어 살아야 되는 상황이 되자 가축화와 농경이라는 공생관계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차일드의 이론이다. 이것을 ‘환경결정론적 모델’이라 한다.

이후 많은 연구자들이 농경의 기원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으며, 농경으로 인한 인간 생활의 변화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차일드의 주장처럼 건조화된 기후는 다른 시기,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났지만 그것이 농경으로 발전해 나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인구증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농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연구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사회경제적 경쟁, 또는 고도로 복잡화된 사냥-채집사회에 있어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농경이 발생했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농경의 시작을 가축화와 연관시킨 해석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기를 먹고 싶어하고, 지금도 고기를 먹기 위해 생산되는 많은 곡물을 동물의 사료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 신석기시대의 돼지와 사람뼈에 남겨진 식생활을 살핀 결과는 놀라운데, 가축화된 돼지는 채식 중심이었고, 함께 사는 사람은 육식 중심의 식단을 유지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즉 초기에는 농경으로 얻어진 곡물을 가축에게 먹이고, 그렇게 키워진 가축을 인간은 먹고 살았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한반도에서 식량자원으로서 가축의 등장은 대체적으로 청동기시대 이후로 생각된다. 즉 벼농사에 의해 식량이 안정적으로 확보되면서 가축도 일반화되는 것이며, 이것이 신석기시대 농경과의 차별성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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