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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돌무지무덤

돌로 쌓아 올린 사자(死者)의 안식처

미상

고구려돌무지무덤 대표 이미지

장군총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1 개요

돌무지무덤은 적석총(積石塚)이라고도 하며 고구려에서 주로 만들었던 무덤 형태이다. 시기에 따라 몇 가지 형태로 구분되는데, 특히 후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왕릉급 돌무지무덤은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 계단형으로 쌓아 올렸다.

2 고구려 무덤 형식에 대한 문헌 기록

돌무지무덤은 고구려의 대표적 무덤양식 중 하나이다. 고구려의 무덤 양식에 대한 가장 오랜 문헌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에 등장한다. 고구려에서는 남녀가 결혼하면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조금씩 만들기 시작하고, 죽은 이후에는 장례를 성대하게 지낸다고 하였다. 또한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東川王) 대의 기록을 보면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왕후였다가 그 동생인 산상왕(山上王)과 다시 혼인한 태후 우씨(于氏)가 죽고 나서 산상왕릉 옆에 안장되었는데, 무당의 꿈에 고국천왕의 혼령이 나타나 사람들 보기에 부끄러우니 앞을 가려달라고 하여서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무덤은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특히 신분이 높은 이들의 무덤은 주변에 나무를 심는 형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의 『양서(梁書)』에는 고구려에서는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낼 때 덧널[椁]은 쓰지만 널[棺]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주목된다. 덧널은 일반적으로 널을 넣기 위해 만든 곽(槨)을 말하는 것이고, 널은 시신을 넣는 관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무덤 형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변화하였기 때문에 모든 고구려 무덤이 이러한 형태였다고 볼 수는 없으나, 특정 시기 고구려의 무덤 내부 시설이 어떠했는지 알려 주는 기록이다.

3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유형과 변화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지역 곳곳에 만들어졌는데, 특히 초기 도읍지였던 지금의 중국 요녕성(遼寧省) 환인(桓仁) 지역과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輯安)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지금은 많은 수가 훼손되어 없어진 상태이지만, 아직도 집안 지역에 가면 수 천기의 돌무지무덤이 산재해 있어 무덤으로 뒤덮인 도시라는 인상을 준다.

집안 지역에는 크게 6개의 고분군이 있는데, 마선구 고분군(麻線溝古墳群), 칠성산 고분군(七星山古墳群), 만보정 고분군(萬寶汀古墳群), 산성하 고분군(山城下古墳群),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 하해방 고분군(下解放古墳群)이 그것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장군총(將軍塚)은 이중에서도 우산하 고분군에 위치한 무덤이다. 하지만 장군총은 돌무지무덤 중에서 비교적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모든 돌무지무덤이 장군총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초기 형태는 지표면 위에 돌을 쌓아 그야말로 하나의 돌무더기를 만든 것이었다. 주로 강돌이나 산자갈 등을 이용하였고, 지표면 위에 시신을 안치할 묘단을 만들고 돌을 쌓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다듬은 돌로 무덤의 아래 가장자리에 단(壇)을 만들어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은 형태가 등장하였고, 다시 계단처럼 여러 층의 단을 쌓아 올린 형태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 등장하게 되었고, 형태는 평면상 정방형으로 정리되어 갔다.

여러 층의 단으로 이루어진 돌무지무덤은 조성 방식에 따라 다시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하나는 일정 간격으로 담장을 쌓고 그 담장 사이에 돌을 채워 넣는 방식인데, 이를 계장식(階墻式)이라고 구분한다.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 한 층씩 단을 쌓아 올린 것으로, 이는 계단식(階段式)이라고 구분한다. 계장식 돌무지무덤보다는 계단식 돌무지무덤이 발전된 형태이며, 분구의 높이도 더 높은 편이이다. 장군총은 바로 이 최종 단계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남아 있는 무덤의 대다수가 파괴된 상태이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원형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왕릉급에 해당하는 대형 돌무지무덤 중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장군총이 유일하다. 장군총보다 훨씬 큰 대형의 계단식 돌무지무덤도 여럿 있으나 대개 무너져 내린 상태이다. 외부의 기단이 손상되고, 안에 채워 넣었던 돌들이 쏟아져 나와 언뜻 보면 그저 거대한 돌무더기로 보일 뿐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집안 지역에서 가장 후대에 만들어졌던 왕릉급 돌무지무덤인 천추총(千秋塚), 태왕릉(太王陵), 장군총의 경우는 시신을 안치하는 돌방[石室]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나 나머지 왕릉급 돌무지무덤들에게는 움푹 파인 흔적들만 남아 있어 돌덧널[石槨]의 존재를 상정하거나, 덧널 내지 나무방[木室] 시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한다. 즉, 원래는 돌이나 나무로 된 덧널이나 나무방 같은 내부 구조를 갖춘 무덤이 만들어지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돌방을 갖춘 무덤으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4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특징과 새로운 무덤의 등장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묘를 지하에 두지 않고 지면에서 일정한 높이로 돌을 쌓은 후 그 위에 매장하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시신이 위치한 곳이 지하가 아니므로, 고구려인들은 죽은 이를 ‘묻는다’는 개념에서 벗어난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독특한 무덤 구조가 나타난 것에 대해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돌아간다는 고구려인들 특유의 사후 관념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의 경우 지상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말년에 하늘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고 하며, 때문에 생시에 쓰던 옥채찍을 대신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는 매우 특별하고 신성한 존재였던 왕실의 시조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많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보이는 죽은 이의 생시 모습이나 생활상 등을 보았을 때 죽음을 그저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고구려인들의 사후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장군총을 끝으로 집안 지역에서는 더 이상 왕릉급의 대형 돌무지무덤이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 이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와 관련되어 있다. 도읍이 옮겨간 만큼 왕릉 역시 더 이상 국내성 지역이 아니라 평양 지역에 조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평양 지역에서 고구려 왕실이 새로 채택한 무덤 양식은 돌방 흙무덤[石室封土墳]이었다. 4세기 무렵에는 이미 고구려의 전통적인 무덤이었던 돌무지무덤이 새로운 형식인 돌방 흙무덤으로 대체되고 있는 추세였다. 두 무덤 양식은 한동안 공존하였고 돌방 흙무덤의 영향을 받은 돌무지무덤이 등장하기도 하였으나, 완고하게 전통을 고수하던 왕릉마저 천도를 계기로 새로운 무덤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결국 고구려 후기에는 돌방 흙무덤이 돌무지무덤을 대신하여 고구려의 가장 일반적인 무덤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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