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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고분

죽은 이의 쉼터에 그림을 그리다

미상

고구려 벽화고분 대표 이미지

고구려벽화 강서대묘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1 개요

고구려인들은 죽은 자의 안식처인 무덤의 널방의 벽에 다양한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의 벽화는 3세기 중엽에서 7세기 전반에 걸쳐 제작된 것들이며, 고구려의 사상, 문화, 일상생활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담고 있다.

2 고구려 벽화 고분의 등장

고구려의 초기 무덤 형태는 돌무지무덤이다. 고구려인들은 강돌이나 산자갈들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덤 아래 가장자리에 단을 만들기도 하고, 나중에는 계단처럼 여러 층의 단을 쌓은 돌무지무덤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초기 돌무지무덤은 구조상 벽화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벽화가 그려지기 위해서는 무덤 내부에 일정한 공간이 존재해야 하지만, 강돌이나 산자갈로 쌓은 무덤에는 그런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로 313년(미천왕 14)경 낙랑군(樂浪郡)은 고구려에 의해 몰락하여 한반도에서 축출된 것으로 보인다.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漢)이 고조선을 정벌하고 그 중심지에 세운 변군(邊郡)으로, 주변 지역에 중국의 문화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인들은 새로 정복한 이 지역의 문화적 선진성을 잘 알고 있었고 필요한 것들을 수용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한(漢) 대에 이미 무덤 안을 벽화로 장식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들은 시신을 넣는 널과 덧널에 그림을 그리고, 널방 안에 그림으로 장식된 비단을 걸었으며 널방 벽에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낙랑군에는 이러한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낙랑군을 병합한 고구려인들은 낙랑군이 있던 평양 지역에 돌방 흙무덤을 만들고 그 내부를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가 만들기 시작한 돌방 흙무덤의 구조 역시 중국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널방의 구조는 한대의 벽돌무덤이나 낙랑의 덧널무덤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고, 큰 판석을 이용해 널방을 만드는 것 역시 요동(遼東) 지역의 한대 무덤에서 나타나는 요소이다. 국내성 지역은 평양 지역에 비해 돌무지무덤의 우위가 오랫동안 유지되었지만 무덤 벽화 문화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널방을 갖춘 돌무지무덤 안에 벽화를 그리는 경우도 생겨났다.

3 고분 벽화의 제작 방법

초기의 고구려 고분 벽화는 돌로 쌓은 벽면에 회칠을 하고 그림을 그려 넣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를 화장지법(化粧地法)이라고 한다. 밑그림 도면을 벽 위에 대고 그림의 선을 옮겨 베낀 후 채색을 하였다. 화장지법에는 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기법과 마른 후에 그리는 기법이 있는데, 고구려인들은 일반적으로 마르기 전에 그리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를 습지벽화법(濕地壁畵法)이라고 한다. 습지벽화법으로 그려진 벽화는 안료가 백회에 스며들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 회가 마른 후에 그림을 그리는 건지벽화법(乾地壁畵法)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건지벽화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선명도가 뛰어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림의 보존성에 있어서 취약한 점이 있었다.

후기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벽에 회칠을 하지 않고 잘 다듬은 돌의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려 넣는 조벽지법(粗壁地法)이라는 기법이 사용되었다. 채색이 벽면에 잘 안착하여 오랫동안 보존되도록 광물성 가루들을 안료로 이용하였고, 해초를 달여 제작한 태교나 동물성 아교를 섞어 사용했다. 조벽지법으로 그려진 벽화는 안료가 돌 표면의 사이사이에 박혀 들어가게 되는데, 그 위에 석회로 얇게 막을 만들면 보존성이 매우 높았다.

4 벽화 주제의 변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주제는 제작시기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4~5세기 전반을 1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 고분 벽화는 대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것들이다. 무덤 방이 두 칸 이상인 무덤에 벽화가 그려졌으며 내용은 대부분 생활 풍속이다. 생활 풍속 벽화는 무덤 주인이 살아 있을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경우가 많다. 주인 부부가 시종들의 시중을 받는 그림, 대규모 행렬, 나들이 모습, 사냥, 연회(宴會)와 가무(歌舞) 등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또 널방의 벽 모서리나 벽과 천장이 만나는 지점에는 기둥이나 도리, 보 같은 것들을 그려 무덤 내부를 목조 건축물처럼 묘사하곤 하였다.

2기, 즉 중기의 고분 벽화는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까지 만들어졌다. 중기 고분 벽화는 외방무덤이나 두방무덤에 생활 풍속 외에 장식 무늬와 사신(四神)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들이 그려졌다. 때로는 하나의 무덤에 이들 요소가 뒤섞여 나타나기도 하였다. 장식 무늬는 둥근무늬, 왕자(王字) 무늬, 연꽃무늬 등이 있는데, 이중에서도 특히 연꽃무늬가 눈에 띄는 제재이다. 연꽃은 불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상징물로, 고구려인들이 지니고 있던 불교적 내세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무덤의 널방은 오로지 연꽃무늬만으로 구성되기도 하였다.

3기 고분 벽화는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전반에 걸쳐 만들어졌다. 주로 널방이 한 칸인 외방무덤에 사신도를 그렸다. 이 시기 평양 지역 무덤의 벽화는 사신에만 집중을 하여서 배경 표현을 간략화하거나 없앤 반면, 집안 지역의 사신도는 배경 표현이 매우 화려하고 복잡하다는 특징을 보인다.

5 고구려사의 전개와 연계되는 벽화 고분

평양 지역에서 초기에 만들어진 고분 벽화의 등장인물 중에는 오른여밈이나 맞여밈을 한 중국계 옷차림을 한 이들이 많다. 반면 국내성(집안) 지역에서 만들어진 고분 벽화에는 왼여밈을 한 전형적인 고구려 복장을 한 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양상은 평양 지역이 고구려에 편입되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중국계 문화가 잔존한 곳이었음을 시사한다. 평양 지역의 벽화 고분을 대표하는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고분 등에는 붓으로 쓴 묵서명(墨書銘)이 남아 있어 무덤이 만들어진 절대 연대를 알 수 있고, 중국출신 망명객의 흔적도 확인해 볼 수 있다.

널방을 장식하는 연꽃무늬의 경우 5세기 중엽까지도 국내성식과 평양식으로 구별된다. 하지만 5세기 말에 이르면 양자의 절충이 이루어지고 평양 지역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고구려 고유의 복식을 하고 있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다. 천도 후 평양이 고구려 중심지로서의 구심력을 강화하면서 이전까지 보이던 지역색을 극복하고 보편적이고 통합적인 문화를 형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6세기 중엽부터 고분벽화의 중심적인 제재가 된 사신도는 다시 뚜렷한 지역색을 보이게 되는데, 이 역시 정치적 변동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고구려는 국왕이 강력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귀족들이 각자의 세력을 기반으로 연립체제를 형성하여 정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자연히 국내성 지역도 평양에 대한 종속성을 탈피하고 뚜렷한 개성을 지닌 문화 권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고분 벽화 주제가 후기에 이르러 사신으로 제한되다시피 한 것에 대해 과거 고구려의 중심적 사상이었던 불교보다 도교 계통의 사상이 득세하게 된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실제로 7세기 초 고구려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오두미교(五斗米敎)가 크게 유행하여 민간에 퍼졌다. 또한 643년(보장왕 2)에는 당시 실력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당(唐)에 사람을 보내 도교를 수용하자고 요청하고, 불교 사원을 빼앗아 당에서 온 도사들이 머물게 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벽화 고분은 고구려사의 전개에 따라 이루어졌던 정치․사회적 변동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문화 유물이다. 문헌 자료가 크게 부족한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당대인들이 직접 남긴 생생한 자료들이 가지는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벽화는 단순한 장의예술이 아니라 천 수백 년 전 고구려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는 타임캡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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