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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

미상

미륵사지 대표 이미지

미륵사지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1 개요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과 그의 왕비가 조영한 것으로 알려진 미륵사가 있었던 절터이다. 최근 익산 미륵사지석탑의 해체·보수 작업 도중에 석탑 내부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토되어 미륵사의 건립에 관한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2 미륵사지의 위치와 구조

미륵사지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서 익산시 함열읍을 잇는 도로변의 평탄한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사찰의 건물은 사라졌으나 남아있는 거대한 석탑은 본래 사찰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는 일제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1910년에 후지시마 가이시로(藤島亥治郎)에 의해 간략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1915년에는 반쯤 붕괴되어 있던 석탑을 콘크리트로 보강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조사는 1974~75년의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동탑지 조사에서 시작되었고, 1980년부터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전면적으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미륵사의 독특한 사찰 구조와 그 규모에 대해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탑·금당(金堂)·강당 등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를 가람배치(伽藍配置)라 한다. 미륵사의 구조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3탑 3금당의 가람배치이다. 1910년 후지시마 가이시로는 미륵사의 구조를 ‘品’자 형태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탑과 금당을 갖춘 가람 3개가 평면상에 나란히 배치된 형태로 밝혀졌다. 3개의 가람들은 회랑으로 서로 이어지고 강당을 공유하고 있어 전체를 하나의 사원으로 볼 수 있다. 1탑+1금당을 하나의 원(院)으로 하여, 동원·중원·서원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일제 시기 콘크리트로 보강한 탑은 서원의 석탑이고, 동원의 탑지가 1974~75년에 조사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당간지주가 있는 곳은 3원의 앞쪽 구역이다.

3 익산 미륵사지석탑

국보 제11호인 익산 미륵사지석탑은 미륵사지 서원에 위치한 탑으로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절반 이상 붕괴되어 6층까지 일부가 남아 있던 것을 일제가 1915년에 콘크리트로 보강하였다. 이에 1999년에 해체하여 보수하기로 결정하였고,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체가 시작되어 2018년 7월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 탑은 그 규모가 매우 장대하고,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며, 석재를 사용하여 목조탑을 표현한 독특한 탑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해체 작업 중 석탑 안에서 사리를 넣어 안치한 유물 일체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미륵사지의 3원 가람배치를 생각해 볼 때, 서원과 동원의 탑은 동일한 모양의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현재 동탑은 남아 있던 원래 탑의 석재를 사용하여 복원되어 있다. 중원의 탑은 탑이 있었던 곳의 면적으로 보아 서탑이나 동탑보다 그 규모가 컸을 것으로 생각되며, 주변에서 불에 탄 목탄과 기와 등이 발견되어 목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 미륵사의 창건

미륵사는 동양 최대라 일컬어질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백제의 사찰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미륵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719년에 미륵사에 벼락이 쳤다는 기록만 확인된다. 미륵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만 보이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지어 달라고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고,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전(殿)과 탑(塔)과 낭무(廊廡:회랑)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라고 하였다.

위의 미륵사 연기 설화에는 사실로 믿기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전·탑·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웠다는 것은 미륵사지의 발굴조사 결과와 일치하기도 하는 등, 실제 사실을 반영하는 내용도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무왕의 왕비가 미륵사 창건을 발원(發願)하였다는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무왕의 아버지는 못의 용왕이고, 꾀를 내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절을 세울 것을 간청한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일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런데 2009년에 탑을 해체하면서 사리함이 발견되고, 이 사리함과 함께 글자가 새겨진 금판이 발견되었다. 이 금판에는 사리를 안치한 시기는 639년(무왕 40)이고, 사리를 봉안한 인물은 “왕후인 사탁적덕(沙乇積德)의 딸”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사탁(혹은 사택)’氏는 곧 사씨(沙氏)로 백제 후기의 유력 가문의 성씨이다. 639년은 무왕 재위 40년이므로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여야 하지만, 639년 작성된 사리봉안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새로운 자료를 활용하여 무왕과 선화공주 그리고 사탁적덕의 딸 3인의 관계에 대해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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