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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한국 고대 불교조각의 기념비적 작품

미상

반가사유상 대표 이미지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불교조각은 크게 서 있는 형태의 입상(立像)과 앉은 형태의 좌상(坐像)으로 나눌 수 있다. 좌상의 불교조각 중 의자에 앉은 보살상의 자세에서 오른쪽 다리를 굽혀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형태를 반가좌(半跏坐)라 한다. 이 반가좌 자세로 앉아서 오른손을 뺨에 대고 생각에 잠긴 듯이 사색을 하는 보살상을 반가사유보살상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약 30여구가 알려져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높이 80cm)과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높이 93.5cm)이 있다. 두 반가상은 밀랍(벌집을 정제하여 만듦)을 이용해 주조하는 방법인 밀랍주조법을 기본으로 제작되었다. 이 주조 방법은 먼저 점토로 불상을 제작한 후 밀랍을 바르고 불상과 똑같이 밀랍을 조각한 후 그 위에 다시 점토를 입히고 밀랍 부분에 청동쇳물을 주입하는 불상제작 방법이다. 이 방법은 정교한 불상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중국의 그것과는 달리 주존불과의 종속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조형성을 보여준다. 국보 78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한국 고대불교조각의 기념비적 작품이며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친 고대 불교조각의 걸작이다.

2 반가사유상의 유례와 의미

반가사유상은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의 젋은 시절, 출가하기 전 싯달타 태자의 사유하는 모습에서 유래한다. 석가족 왕국의 왕자로 태어난 싯달타 태자는 궁궐 속에서만 갇혀 살다가 궁성 밖으로 나와 생로병사의 현장을 보게 되었다. 중생들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에 대해서 여러 번 사유를 하였다. 그 결과 태자는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하여 왕이 되기를 포기하고 원대한 중생구제의 길을 찾아 출가하여 구도자가 되었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러한 불전의 내용에 따라 중국의 반가사유상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반가사유형 보살상의 표현은 인도 쿠샨왕조시대의 간다라 지방 불상에서 보이며 마투라 지방의 상에서도 발견되나 미륵보살상(彌勒菩薩像)이라고 명문에 명시된 것은 아직 발견된 예가 없다. 중국의 반가사유상은 대부분 태자사유상으로 명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반가사유상을 미륵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 배경은 일본의 야쮸지(野中寺)에 있는 금동반가사유상에 병인년(丙寅年), 즉 666년에 미륵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명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반가사유형 보살상이 미륵의 자태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예가 된다.

반가사유형 보살상이 중국에서 유행한 것은 6세기로, 그 전반기인 북위(北魏)와 동위(東魏), 서위(西魏) 그리고 후반기인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시대에 많이 보이며 6세기 말인 수대(隨代)에 이르러서 차차로 사라진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약 30여구가 알려져 있으며 이 상들의 제작시기는 대체로 6세기 후반경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국보 78호,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현상과 특징

반가사유상은 반가좌라는 특이한 자세 때문에 얼굴과 팔, 허리 등 신체 각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복식과 옷주름의 처리도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 불교조각의 대표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사산조 이란계 통치자의 왕관장식에서 유래되어 그 형태가 발전한 보관을 착용하고 있다. 이 보관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특이한 형식이다. 국보 78호 상은 정면에서 보면 허리가 가늘어 여성적인 느낌이 들지만 측면에서 보면 상승감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탄력 넘치는 신체의 곡선이 강조되었고 양쪽 어깨부터 끝이 위로 올라와 날카로움을 더해주는 천의자락은 유려한 선을 그리면서 몸을 감싸고 있다. 양 무릎과 뒷면의 의자 덮개에 새겨진 주름은 타원과 S자형 곡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국보 78호 보살상은 반가좌의 자세로 허리를 약간 굽히고 고개는 살짝 숙인 채 팔을 길게 늘인 비사실적인 비례를 통하여 가장 이상적인 사유의 모습을 창출하고 있다. 국보 78호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그동안 미술사학자들이 조성시기와 제작 국가를 밝히고자 많은 연구를 진행해 왔다. 국보 78호의 조성시기는 6세기 후반경으로 알려져 있으나 제작 국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경우 신라 작품으로 보는데 큰 이견은 없으나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보는 사람에 따라 고구려작, 백제작 혹은 신라작으로 다양한 이견이 제시되고 있다.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은 일본 교토 코류지(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이유로 국보 83호 상은 한일 고대 불교조각의 교류 연구에 있어 큰 주목을 받아 왔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얼굴은 양 눈썹에서 콧마루로 내려진 선의 흐름이 시원하고 날카롭다. 가늘고 아름다운 눈매를 보여주며 입가엔 미소가 있다. 가슴과 팔은 가냘프지도 풍만하지도 않으며 비교적 작고 통통한 손과 손가락은 미묘한 움직임이 표현되어 있어 생동감이 느껴진다. 반가한 오른쪽 발은 오른손과 대응하여 생동감 있게 만들어져 있다. 이에 비해 족좌에 내린 왼발은 경직된 모습인데 이것은 연꽃과 함께 뒤에 수리되었기 때문이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둘러싼 가장 큰 쟁점은 신라 작인가, 백제 작인가 하는 제작지의 문제이다. 근래의 연구 성과는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신라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일본의 국보 1호인 코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전반적인 이미지가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코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만들어진 7세기대의 일본 목조불상은 대부분 녹나무로 만들어진 반면 코류지 반가사유상은 일본에는 드물고 경상도 일대에서 많이 자생하는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만드는 방법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일본 목불이 신체의 각 부분을 나누어 여러 조각을 짜 맞춰서 하나의 상을 만드는 반면, 코류지 반가사유상은 하나의 나무에 상을 직접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 당시 일본의 일반적인 목불 제작 방법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 623년조에 신라 사신이 불상 1구, 금탑, 사리 등을 가지고 왔는데 불상은 진사(秦寺, 지금의 코류지)에 안치하고 나머지는 사천왕사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근래의 연구를 통해 현재의 코류지를 세웠다는 진(秦)씨가 신라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코류지의 목조 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주장이 더욱 힘을 받고 있다.

4 국보 78호,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제작 방법

국보 78호 금동 반가사유상과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의 제작 방법은 양 반가사유상 모두 쇠못을 사용한 밀납주조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두 상은 내형토를 만드는 방법과 밀납을 입히고 조각하는 방법에서 제작 방법의 차이점을 보인다.

국보 78호 금동 반가사유상은 머리와 몸체 부분에 서로 다른 수직의 중심 철심이 하나씩 들어가 있고, 목과 가슴이 만나는 쇄골 부위에 안쪽으로 청동 쇳물이 침투해 들어가 생긴 흔적이 있다. 보관 장식, 천의 자락, 등판, 좌우 옆구리, 원통형 의자 등 여러 곳에 주조 결함은 보완하기 위한 수리 흔적이 보인다. 수리한 곳은 주석이 함유된 청동 본체와 달리 순동을 사용하였다. 상의 두께는 4mm 내외로 매우 얇고, 내형토는 고운 진흙을 사용하였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머리와 몸체 부분의 내형토를 각각 따로 만들어 그 위에 일정한 두께의 얇은 밀납판을 입히고 밀납 조각상을 각각 만들었다. 분리되어 있던 머리와 몸체 부분을 하나로 연결하고, 왼발 및 족좌를 내형토 없이 밀납만으로 조각하여 붙였다. 양쪽 보발, 요패 장식 등 돌출된 부분은 밀납판을 덧붙여 조각하고, 기타 필요한 부분을 세밀하게 조각하여 전체의 밀납 조각상을 완성하였다. 밀납 조각상 위에 진흙을 입혀 외형토를 만들고, 열을 가하여 밀납을 제거한 다음 청동을 부어 주조하였다. 복잡한 보관 장식, 얇은 두께, 공기가 잘 빠지지 않는 고운 진흙의 내형토 등으로 청동 쇳물의 흐름이 좋지 않아 주조 결함이 여러 군데 발생하였다. 그래서 결함 부위를 재주조하거나 새로 만들어 붙이는 등 수리 작업을 거친 다음, 표면에 금을 도금하여 완성하였다. 얇은 밀납의 사용은 완성 후 조각품의 볼륨감에도 영향을 주어 전면부가 평면적인 느낌이 강한 상을 탄생시켰다.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의 내부 철심 구조는 국보 78호 상에 비하여 비교적 단순하다. 수직의 중심 철심은 하나로 되어 있고, 양 팔로 들어가는 철심은 가슴 부위에서 중심 철심을 관통하여 X자를 이루며 지나갔다. 단순한 철심 구조는 내형토를 움직이지 않도록 견고하게 고정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내형토는 모래가 많은 사질점토에 가는 식물 줄기를 넣어 사용했으며 상의 두께도 10mm 내외로 비교적 두껍다. 바닥 두 곳과 왼발을 제외하면 수리한 곳이 거의 없는 완벽한 주조물로 처음부터 주조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철심을 세우고 하나의 내형토를 만든 다음 그 위에 밀납을 두껍게 입혔다. 이 밀납을 조금씩 깎아내거나 덧붙여 가면서 밀납 조각상을 완성하였다. 주조 결함이 거의 없어 바닥면과 왼발을 수리한 후, 금도금하여 완성하였다. 두꺼운 밀납 사용은 완성 후 조각품에 풍부한 양감을 주었고 옷주름 표현 등에 입체감과 사실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83호 반가사유상은 밀납주조법이라는 같은 제작 방법을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형토와 상의 두께, 밀납의 사용 방법 등에서 차이를 보여줬다. 매우 고운 진흙만을 내형토로 사용한 국보 78호 상은 청동 쇳물을 부어 넣을 때 틀 안에 들어 있던 공기가 외부로 원활하게 배출되지 못했다. 이것은 얇은 반가사유상의 두께와 청동 쇳물의 유동성을 크게 떨어뜨렸고 여러 곳에 주조 결함으로 이어졌다. 반면 국보 83호 상은 청동 쇳물이 잘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일정한 두께를 확보하고 공기 배출이 쉬운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질점토를 내형토로 사용하였다. 주석 함량이 5% 내외로 거의 비슷한 청동을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쇳물의 유동성 확보, 내형토를 고정시키는 철심의 사용 방법, 쇠못의 적절한 배치 등에 의해서 주조의 완성도는 큰 차이를 보였다. 즉,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이 주조면에서 발전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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