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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신라의 두 청년이 돌에 남긴 맹서

미상

임신서기석 대표 이미지

임신서기명석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신라의 두 청년이 임신년(壬申年)에 하늘에 충도(忠道)를 지킬 것을 맹세하고, 그 전년(前年)인 신미년(辛未年)에는 유교 경전을 학습할 것을 맹세하는 내용을 새긴 비석이다. 비문은 한자(漢字)를 사용하여 새겼지만, 정격한문(正格漢文)이 아닌 변격한문(變格漢文)의 모습이다. 현재 임신서기석 제작 시기인 임신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934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지 부근 언덕에서 발견되었으며, 2004년에 보물 제1411호로 지정되었다. 임신서기석은 국가의 지도자가 아닌 신라 청년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라는 점, 신라의 유학(儒學)에 대한 이해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 임신서기석의 형태와 비문 그리고 신라의 변격한문(變格漢文)

1934년,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慶州分館)의 주사(主事)였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는 기와를 탐구하기 위해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에 소재한 석장사지(錫杖寺址)를 방문하였다. 점심때가 되어 절터의 북쪽에 있는 작은 언덕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우연히 그의 발끝에 걸리는 곡선 모양의 돌이 있음을 발견하고 파내었다. 그 돌이 바로 임신서기석이었다. 임신서기석은 그렇게 세상에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임신서기석의 길이는 약 34cm이며, 상단의 너비는 12.5cm, 하단의 너비는 9cm로 아래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모양이다. 두께는 2cm이며, 냇돌의 자연석(自然川石)으로 비교적 반질반질 한 면을 이용하여, 1행 18자, 2행 16자, 3행 14자, 4행에 16자, 5행에 10자, 도합(都合) 5행 74자의 한자(漢字)를 새겼다. 새겨진 글자는 모두 판독이 가능하며, 다음과 같다.

[판독문]
01. 壬申年六月十六日二人幷誓記天前誓今自
02. 三年以後忠道執持過失无誓若此事失
03. 天大罪淂誓若國不安大舐世可容
04. 行誓之又別先辛未年七月卄二日大誓
05. 詩尙書礼傳倫淂誓三年

임신서기석은 한자를 사용하여 글을 새겨놓았지만, 정격한문(正格漢文)은 아니다. 신라인은 중국의 한자와 한문을 수용하여 문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본래 중국어와 다른 자신들의 언어를 한자와 한문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한자와 한문을 자신들의 언어 현상에 맞추어 사용하였는데, 이를 신라식 한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식 한문은 어순을 비롯한 여러 모습에 있어서 중국의 문법에 맞는 한문, 즉 정격한문과는 다른 원칙에서 벗어난 변형된 변격한문(變格漢文)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 변격한문 자료 중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금석문이며, 임신서기석도 그중 하나이다.

임신서기석은 한국식 어순에 따라서 동사인 ‘맹세할 서(誓)’를 임신년(壬申年)의 맹세 내용과 신미년(辛未年)의 맹세 내용 다음에 두고 있다. 예를 들어 5행의 ‘詩尙書礼傳倫淂誓三年’가 정격한문이라면 ‘誓三年倫淂詩尙書礼傳’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今自三年’과 ‘天大罪得’도 ‘自今三年’과 ‘得天大罪’의 한국어식 표현이다. 이처럼 임신서기석은 동사를 목적어 뒤에 두는 변격한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따라 임신서기석의 판독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해석문]
임신년(壬申年)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하기를,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실한 도(道)를 지키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잃으면 하늘에게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하는 것을 용납함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이전 신미년(辛未年)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시〈경〉(詩〈經〉)』,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전(〈春秋〉傳)』 등을 차례로 3년 동안 얻기를 맹세하였다.

3 임신서기석의 제작 시기와 작성자

임신서기석에는 비석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제작 시기 또한 임신년과 신미년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이에 작성자와 제작 시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임신서기석에 새겨진 간지(干支), 각자(刻字)의 서체(書體), 문장 구조, 발견지역 등의 요소를 분석하고, 이미 연대가 명백히 밝혀진 기존의 금석문(金石文)이나 문헌과 상호비교를 통해 추정해야 한다.

첫째, 임신서기석의 발견지역이 신라의 고도(古都)인 경주라는 것과 임신서기석에 기록된 ‘卄’자의 용례로 보아 임신서기석의 제작 시기를 고려 이전 신라 시대로 확정할 수 있다. 고려 이후의 금석문에서는 대부분 ‘卄’자를 사용하지 않고, ‘二十’으로 사용하고 있는 반면, 신라의 금석문에서는 대부분 ‘二十’을 ‘卄’로 표현하고 있다.

둘째, 임신년의 맹세 내용 중 ‘충도집지(忠道執持)’는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근본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충도(忠道)라는 용어는 신라 화랑들의 국가 의식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으며, 세속오계(世俗五戒) 에서 ‘사군이충(事君以忠)’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임신서기석의 작성자들은 두 사람이 맹세를 약속하는 형태(二人盟約)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신라 중고기(中古期)에 활동한 사다함(斯多含)과 무관랑(武官郞)의 이인맹약(二人盟約), 과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의 이인맹약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넷째, 신미년 맹세 내용에 등장하는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은 신라 국학(國學)에서 학습하는 유교 경전 이지만, 국학이 설치 되는 682년(신문왕 2) 이전에도 유교 경전이 학습되고 있었다. 진평왕 때 김후직(金后稷)이 『서경(書經)』을 인용하여, 왕에게 상소한 것이나, 박제상(朴堤上)이 신라의 사신으로 고구려에 갔을 때 시경을 인용하여 인질을 돌아오게 한 것 이 바로 그 예이다.

이를 볼 때 임신서기석의 작성자는 두 명의 화랑(花郞)이며, 제작 시기는 국학 설치 이전, 화랑도가 융성했던 중고기의 임신년이 된다. 중고기의 임신년은 552년(진흥왕 13)과 612년(진평왕 34)이 있다. 이에 대해서 임신서기석에 쓰인 글자가 단양적성비의 글자들과 서체(書體)가 유사한 점을 근거로 임신서기석의 제작 시기를 552년(진흥왕 13)으로 보는 견해와 진흥왕 시대는 화랑이 초기 단계였다는 점, 김유신이 611년(진평왕 33)에 중악(中嶽)의 석굴로 들어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한 점 등을 근거로 임신서기석의 제작 시기 612년(진평왕 34)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임신서기석의 작성자가 화랑이라는 주장을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임신서기석의 작성자를 화랑으로 볼 수 있는 직접적인 근거가 없다. 둘째, 충도(忠道)는 왕조 국가의 일반적인 덕목으로 굳이 화랑이 아니어도 나올 수 있다. 셋째, 세속오계에서 충(忠)이 가장 앞서 나오는 것은 국가 이념에서 항상 나타날 수 있다. 넷째, 이인맹약 역시 특정 시기에 국한할 수 없다. 다섯째, 김후직과 박제상의 사례는 「열전」(『三國史記』「列傳」)기사로서 후대에 윤색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임신서기석의 작성자를 화랑으로 특정 짓기보다는 신라에 살았던 두 청년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4 신라의 유학(儒學)을 통해 본 임신서기석

신라의 두 청년은 신미년에 『시경』, 『예기』, 『춘추』 등 유교 경전을 학습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처럼 유교 경전을 학습한 사례로 강수(强首)가 있다. 강수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을 보이자 강수의 아버지는 그를 길러 국사(國士)가 되도록 하겠다는 뜻을 가졌다. 관리로 진출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아버지가 강수에서 유학과 불교 중 어느 것을 배울 것인가를 묻자 강수수는 유학을 선택하였다. 이는 강수가 유학의 학습을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을 도모했음을 보여준다. 강수는 『효경(孝經)』, 『곡례(曲禮)』, 『문선(文選)』 등을 배워, 마침내 관직에 올랐다. 강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유교 경전의 학습은 그것을 통한 관리 선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이는 교육제도와 연결이 된다. 신라는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국가적 교육을 시행하였다. 국학에서는 신미년 맹세 내용에 등장하는 『시경』, 『예기』, 『춘추』 등의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雜志)」에 따르면 신라 국학의 교육법(敎授之法)은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예기(禮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선(文選)』으로 구분하여 학업으로 삼고, 박사(博士)와 조교(助敎) 1명을 두었다고 한다.

나아가 788년(원성왕 4)에는 새로운 인재 등용법으로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시행되었다. 독서삼품과의 규정에 따르면 유교 경전의 이해 정도에 따라 상(上品), 중(中品), 하(下品)로 나누어 관리를 선발하였다. 신미년 맹세 내용에 등장하는 『예기』와 『춘추』는 상품에 들어있으며, 오경(五經), 즉 『시경』, 『예기』, 『춘추』를 통달할 경우 등급을 넘어 발탁한다는 규정도 존재하였다.

이를 볼 때 신라의 유학은 처음부터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기 위한 학문으로 기능하였고, 국가는 유학을 장려하고 교육을 통해 유교 경전 내용을 습득한 인재들을 관리로 임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유학 교육과 관리 임용 체계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강수가 유교 경전을 학습한 이유도 관직에 오르기 위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임신서기석에서 두 청년이 『시경』, 『예기』, 『춘추』 등 유교 경전의 학습을 다짐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유교 경전을 학습함으로써 관리로 임용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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