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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

외국인의 눈에 비친 12세기 고려의 모습

1123년(인종 1)

고려도경 대표 이미지

선화봉사고려도경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고려도경(高麗圖經)』은 1123년(인종 1)에 송의 사절 서긍(徐兢, 1091∼1153)이 고려에 사행을 다녀왔다가 지은 책으로, 전 4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제목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선화 연간에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본 것을 글과 그림을 곁들여 설명했다는 의미이다. 책은 모두 28개의 큰 항목으로 나뉘었고, 다시 300여 개의 작은 항목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형상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먼저 글로써 설명하고 그림을 덧붙이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현재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2 서긍의 고려사행과 『고려도경』의 편찬

1123년(인종 1) 3월, 송 휘종(徽宗)은 정사 노윤적(路允迪)과 부사 부묵경(傅墨卿)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고려에 보냈는데, 서긍은 이 사절단의 일행으로 고려에 들어왔다. 이 사절단은 그 해 2월부터 사행을 준비하여 3월 14일에 송의 수도인 변경을 떠나 5월 4일에 지금의 중국 절강성 은현(鄞縣) 땅인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5월 16일 명주를 떠나 7일 간의 항해를 거쳐 6월 6일에 군산도에 당도하였다. 같은 달 12일에는 개경에 도착해, 숙소인 순천관(順天館)에 들어갔다. 이들은 1개월간 고려에 체류하다가 7월 13일에 다시 송으로 돌아갔다.

서긍이 『고려도경』을 찬술하면서 서술한 내용들은 이 1개월 사이에 보고 듣고 한 것들이다. 내용들 가운데 주로 개경을 중심으로 한 서술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고려도경』 서문에서 서긍은 “고려에서는 겨우 한 달 쯤을 머물렀을 뿐이다. 숙소가 정해진 뒤에는 파수병이 지켜, 문 밖을 나가 본 것이 5∼6차례에 불과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어, 그러한 사정을 알려준다. 서긍은 송에 돌아간 지 약 1년 만에 저술을 마치고 휘종에게 바쳤는데, 이 책을 열람한 휘종이 대단히 기뻐하고 그의 지위와 관직을 높여주기도 하였다.

『고려도경』의 1권과 2권은 고려 이전의 예종(睿宗)까지의 고려 왕 계보 등에 대해 서술하고, 3권부터 7권까지는 고려의 영역과 형세, 개경의 성곽 그리고 궁전과 관복(官服) 등을, 8권에서는 이자겸(李資謙)과 김부식(金富軾) 등의 고려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였다. 9권부터 15권까지는 의례 용품과 의장 호위대의 복장·칼 등의 무기·다양한 깃발 그리고 수레 등을, 16권은 고려의 관부(官府)에 관한 내용을, 17권부터 18권까지는 도교와 불교 등의 종교에 관한 사항을, 19권부터 23권까지는 사회계층과 생활풍속 등을 서술하였다. 24권부터 32권까지는 사절단에 대한 여러 가지 예우와 의례 절차 그리고 숙소에 마련되어 있는 그릇 등의 비품을, 33권부터 39권까지는 고려의 각종 배와 바닷길에 관한 내용을, 마지막 40권에는 중국과 같은 고려의 문물을 기록하였다.

3 『고려도경』이 말하는 고려

『고려도경』은 외국인이 직접 보고 겪었던 12세기 고려의 모습과 고려인들의 생활상 등을 기록한 당대의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한편 『고려도경』에서는 고려를 고구려의 후예로서의 서술하고 있다. 2권 세차(世次) 왕씨조를 보면,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려의 큰 씨족이다. 고씨(高氏)의 정치가 쇠퇴하게 되자,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군장으로 세웠다” 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서긍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중국에서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가라는 인식을 일반적으로 갖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위만조선(衛滿朝鮮)→사군(四郡)→고구려→발해→고려 로 이어지는 역사 계승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기자로부터 고려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이해한 인식은 『송사(宋史)』에도 나타나고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당시 중국에서 인식했던 역사인식이었을 것이다. 다만 단군조선의 존재를 서술하지 않고, 삼국 가운데 하나였던 백제와 신라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되며, 아울러 고려가 발해를 계승했다고 한 이해 역시 『송사』에 보이지 않는 흥미로운 해석이다.

봉경(封境)조에는 당시 고려의 국제 형세를 말해주는 부분이 보이고 한다. 고려의 서쪽은 요수(遼水)와 맞닿았고 북쪽은 거란(契丹)의 옛 땅과 연속이 되고 동쪽은 대금(大金)과 맞닿았으며 일본(日本)·유구(流求)·담라(聃羅)·흑수(黑水)·모인(毛人) 등 나라와 서로 엇물려 있다 고 서술되어 있다. 당시는 거란이 쇠퇴하고 여진족이 성장하여 금을 건국한 이후였다. 고려는 신흥세력인 금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도 거란에도 여전히 사신을 파견하는 등거리외교를 시도한 바 있었다. 그 외에 유구는 지금의 오키나와나 타이완 지역을, 담라는 제주도를, 모인은 일본 동북쪽의 지역을, 흑수는 말갈이라고 하여 고려 북쪽에 위치한 여진족의 일파를 가리킨다.

민서(民庶)조에는 “그 나라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거나, 인물조에는 “동남쪽의 이적(夷狄)들 중에는 고려의 인재가 가장 왕성하다. 나라에 벼슬하는 자라야 귀한 신하가 되며, 족망(族望)으로 서로 겨룬다.” 또한 유학(儒學)조에는 “아래로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 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를 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무리에 따라 불사에서 공부하며,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에게서 글을 배운다.” 와 같이 학문을 숭상하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4 『고려도경』의 한계와 가치

『고려도경』은 기본적으로 송 사람의 시선으로 고려를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서긍이 서술한 고려의 풍속에도 그 자신의 주관성이 상당부분 들어가 있다. 그 내용 가운데 민거(民居)조를 보면,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구멍 같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비바람을 막았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 두 집뿐이다.” 고 되어 있거나, 민서(民庶)조에 “그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분별없이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기며,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헤어지기를 쉽게 하여 전례(典禮)를 본받지 않으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우(祠宇)조를 보면, “고려는 본래 귀신을 두려워하여 신봉하고, 음양에 얽매여서 병이 들면 약은 먹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같이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저주와 압승(壓勝)을 알 뿐이다.” 라는 서술이 있기도 한다. 압승은 사악한 기운을 눌러 힘을 못 쓰게 만드는 일종의 방술이다. 이러한 언급은 고려인들이 합리적이지 못하고 미개한 수준에 있는 것처럼 이해되는 서술이다.

하지만 서긍 스스로 언급했듯이 그가 숙소 밖을 나가 본 것이 5∼6차례뿐이었다 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고려의 풍속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서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은 백성의 삶에 대한 부분에서 좀 더 크지 않을까 한다. 서긍이 일반 백성들의 생활을 기록한 것은 가치가 있으나, 그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려도경』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는 사료이다. 아울러 『고려도경』이 찬술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이 전쟁에 휘말린 탓에, 『고려도경』의 원본을 찾기 어렵게 되었고 이로 인해 판본도 여러 가지가 있어 연구에 혼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려도경』의 사료적 가치를 절대로 폄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려도경』은 고려시대 당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충분한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의 정사류 사서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내용들, 예를 들면 고려 여성에 대한 정보 등도 풍부하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귀부(貴婦)조를 보면, “부인의 화장은 향이 나는 기름을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눈썹은 넓고, 검은 비단으로 된 너울을 쓰는데, 너울은 세 폭으로 만들었다. 폭의 길이는 8척이고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다만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이 땅에 끌리게 한다,” 고 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백성들의 생활이나 풍속 그리고 고려와 송이 교류를 하는 바닷길 등에 대한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처럼 『고려도경』이 당대 자료로서 갖는 가치가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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