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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

고려를 대표하는 국가 행사이자 초계층적 불교 축제

미상

1 개요

인도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된 불교 행사 팔관회는 신라 때 그 최초의 설행 기록이 보인다. 고려 때에는 전시기에 걸쳐 전국적으로 매년 겨울 설행된 대표적인 국가의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팔관회는 이후 조선 시대에 폐지되었다.

2 팔관회의 기원과 전래

팔관회의 기원은 인도의 팔계재(八戒齋)이다. 원래 인도에는 특정한 날 착한 일을 하고 복을 지어 흉함을 피하려는 재래의 액막이 풍속이 있었는데, 팔계재는 이 풍속에서 기원하여 인도의 불교 재가신자들에게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절에 가서 여덟 가지의 계를 지키도록 하였다. 여덟 가지 계는 ① 살생하지 말 것, ② 도둑질 하지 말 것, ③ 음란한 일을 하지 말 것, ④ 거짓말 하지 말 것, ⑤ 술 마시지 말 것, ⑥ 몸에 꽃 장식을 하거나 향을 바르지 말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하지 말고 그런 것을 하는 데 가서 보거나 듣지 말 것, ⑦ 높고 큰 평상에 앉지 말 것, ⑧ 때가 아닌 때 먹지 말 것이다. 앞의 다섯 가지는 재가신자들이 늘 지켜야 하는 것이나, 뒤의 세 가지는 재가신자들이 늘 지키기 어려운 출가자의 계여서 정해진 하루라도 이를 지키도록 하는 행사가 인도의 팔계재였다.

인도의 팔계재는 불교와 함께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중국에서 팔계재가 언제부터 설행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3세기경 팔계재에 대해 설하는 『불설재경(佛說齋經)』이 한역되어 그 존재가 알려졌을 것으로 생각되며, 남북조시기가 되면 중국에서 중요한 불교의식으로 자리 잡고 그 명칭도 팔관재(八關齋) 로 불리었음이 확인된다. 당(唐)에 이르면 설행 규모가 대형화되고 승려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반승(飯僧) 의식이 중요하게 되며 법회의 성격도 띠면서 팔관재회(八關齋會)로 불리게 되었다.

3 우리나라의 불교 수용과 신라의 팔관회

팔관회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록상으로 고구려나 백제와 관련한 것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불교의례에 대한 기록이 신라의 팔관회에 관한 것이다. 신라에서 진흥왕(재위 540~576)이 고구려에서 온 승려 혜량(惠亮)을 승통(僧統)으로 삼고 551년(진흥왕 12)에 처음으로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의 법을 두었다고 한 것 이 그것이다. 당시 신라의 거칠부(居柒夫)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10군을 공취하고 승려 혜량을 모시고 돌아오자 진흥왕은 그를 승통으로 삼았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150여 년 늦은 527년(법흥왕 14)에야 불교를 공인하였는데, 위 기사에 의하면 불교의례로서 팔관회의 설행이 신라에 들어온 고구려 승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로 보아 고구려에서는 신라에 앞서 이미 팔관회가 설행되고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때 혜량이 전한 팔관회는 전몰장병을 위한 위령제의 성격이 있었는데 , 이는 중국의 팔관회가 위령제로 설행되고 있어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신라의 팔관회 설행 의식은 화랑도(花郞徒)가 중심 주체가 되어 진행되었으며 화랑집단에는 낭도승려가 한 명씩 속해 있어서 의례를 이끌었다. 의례 설행 시에는 무대를 설치하고, 화랑 및 낭도들로 조직된 4부의 악대인 사선악부(四仙樂部)와, 용과 봉황, 코끼리와 말의 형상을 싣고 있는 배 모양의 수레들인 용봉상마거선(龍鳳象馬車船)을 동원하여 화려한 백희와 가무를 공연하였다. 고려의 팔관회에서 백희와 가무를 진설하고 사선악부와 용봉상마거선을 공연한 것은 이러한 신라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한편 팔관회에는 고구려의 10월 제천의식인 동맹의 유풍이 잔존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통일 후 고구려 유민들은 10월 동맹의 전통을 계승하고 아울러 전쟁에서 죽은 가족이나 동료들을 위한 위령제로서 팔관회를 개최하여 자신들만의 공동체 의식을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팔관회는 신라에도 존재하는 의례였으며 경주 지역 사찰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어서 신라와의 마찰 없이 고구려적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4 후삼국시기 궁예의 팔관회

후삼국시기에 이르면 팔관회는 이미 지역적 보편성을 띠어 신라왕실을 위한 것으로만 인식되지 않았다. 당시 궁예는 왕을 자칭하며 송악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었는데 898년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궁예(弓裔)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하며 국호를 고려로 공표한 것은 이후 901년(효공왕 5)의 일이었다. 이처럼 국가의 면모를 정식으로 갖추기도 전에 궁예가 팔관회를 개최한 것은 계속되는 전란의 공포를 팔관회를 통해 위로하고 세력권 내 주민들의 공동체의식을 고양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여기서 궁예가 10월에 팔관회를 개최한 것은 고구려의 10월 동맹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고구려 지향적인 궁예 정권의 성격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송악을 중심으로 한 팔관회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바탕으로 동맹의 전통을 잇는다는 인식은 위령제나 액막이의 성격을 지녔던 팔관회에 추수감사제라는 농경의례적 성격을 더하여 주었다.

5 태조의 유훈과 고려의 팔관회

고려의 팔관회는 고려의 대표적인 국가의례로, 국왕부터 일반민까지를 아우르며 고려시기 내내 지속적으로 설행된 전국적인 불교행사이다. 고려를 개창한 태조 왕건(王建)이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부터 그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으며, 고려시기 국가적으로 설행된 가장 중요한 불교행사 중 하나였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의 여섯 번째 조항에서 자신이 지극히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으로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은 천령과 오악, 명산, 대천, 용신을 섬기는 것이라 하였다. 또 후세의 간신들이 마음대로 이 행사를 늘리거나 줄이려 한다면 이를 절대로 금지해야 하며 행사 날짜가 국기일과 서로 겹치는 일 없이 하여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길 것을 굳게 맹세하였으니, 후대 왕들은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를 시행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여기서 태조는 연등과 팔관이라는 기존의 불교행사를 국가의례로 승격시키고 국가의 공식행사로서 지속시키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아울러 신라 이래의 전통적 토속신앙인 천령․오악․명산․대천․용신이 불교적 신앙체계 내로 흡수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훈요십조에서 태조는 토착신앙을 중시하여, 지역적으로 산재되어 수시로 열리던 토착적 신앙대상에 대한 제사를 11월에 종합적으로 합사하여 팔관회라는 고려 최고의 의례로 수도 개경에서 매년 거행할 것을 당부하였다. 즉 고려의 팔관회는 지역적인 산천신앙을 고려왕실 중심의 일원적 국가행사로 수렴한 것이며, 이를 통해 국왕의 권위를 장엄하게 보이고 국왕을 정점으로 국민을 결속하며 고려인으로서의 일체감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고려의 팔관회는 원래의 팔관재가 가졌던 금욕의례로서의 본질을 사회문화적으로 확장시켜 계절축제적 농경의례의 양상을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최승로(崔承老)의 시무28조에서는 ‘봄에는 연등을 실시하고 겨울에는 팔관을 연다’고 하여 팔관회의 겨울축제적 성격을 언급하고 있다. 즉 팔관회는 무르익은 곡식을 추수한 후 한해를 마감하며 열리는 풍요축제의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특히 팔관회에서 공연되었던 가무백희나 산대잡극 등에서는 유희적인 공동체적 계절축제로서의 성격이 보이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기록도 여럿 전한다. 예종이 팔관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다가 궁정 합문 앞에서 행차를 멈추고 시를 짓고 화답하며 광대들을 시켜 자정이 되도록 노래를 부르고 춤추게 하였다 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팔관회는 고려왕조에서 가장 중시된 국가행사로 고려 전 시기를 함께 하였으며, 국가적 위기상황에서도 공동체의식을 결집하는 대표적 국가의례로 중단 없이 지속되었다. 때문에 몽골 침입 때 강화도 천도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팔관회는 연등회와 함께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6 조선의 개창과 팔관회의 폐지

고려 태조가 훈요십조에서 토속적이고 지역적인 산천신앙을 중앙에서 불교적 의례인 팔관회로 합사하여 그 설행을 항례화하도록 한 이래, 팔관회는 지극히 고려적 성격을 지닌 국가의례가 되었다. 이 ‘고려적인’ 팔관회는 조선이 개창된 후 더 이상 존속될 수 없었다. 조선 개창세력은 고려문화의 청산 차원에서 팔관회를 최우선의 철폐 대상으로 지목하였고 급기야 그 혁파를 주청하였다. 더구나 유교이념의 도입에 따라 유교의례와 관련되지 않은 제사는 모두 음사로 간주하였고 조선 건국 직후 전통적 토속신앙을 제도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팔관회가 포섭하고 있던 토속적 산천신앙 역시 음사로 간주되어 타파되었다. 조선에서 토속적 산천신앙은 오례의 길례 가운데 중․소사로 편제되었고 이제 산천신앙은 국가의 유교제례로 존재하게 되었다. 더구나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조 원년 이후 중동팔관에 대한 기사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팔관회는 조선 건국 직후부터 철폐된 것으로 간주된다. 불교행사에서 기원하여 고려문화의 총체적 행사가 되었던 팔관회는, 조선시대에 다시 그 국행의례적 성격을 잃고 재가신자의 수행방법인 팔관재계의 형태로 회귀하여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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