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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조선 시대 국가 운영의 근간이 된 만세성법(萬世成法)

1460년(세조 6) ~ 1466년(세조 12)

경국대전 대표 이미지

경국대전 권3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조선 시대의 법령은 기본적으로 국왕이 내린 명령을 성문화(成文化)한 것이다. 따라서 법전의 편찬은 새로운 법을 창제하는 일이 아니라 기왕에 내려진 국왕의 명령인 수교(受敎)·수판(受判)이나 이것을 법조문화한 조례(條例)들을 정리하고 취사선택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집록(輯錄)’하는 작업이었다.

한편, 조선 시대의 법전은 그 내용에 따라 크게 ‘전(典)’과 ‘록(錄)’의 두 단계로 구분되었다. ‘전’은 영구히 보존하고 준수해야 할 항구적이고 근본적인 법규를 가리키는 것으로, 『경제육전(經濟六典)』·『경국대전(經國大典)』·『속대전(續大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록’은 일시적이며 지엽적으로 시행되는 규정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속등록(續謄錄)』·『대전속록(大典續錄)』·『수교집록(受敎輯錄)』 등이 이에 해당한다.

2 『경국대전』 이전의 법전 편찬

조선 시대의 법전 편찬은 개국 초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1397년(태조 6) 12월에 조준(趙浚)이 주관하여 1388년(고려 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부터 당시까지 시행된 수판(受判)·정령(政令) 중에서 앞으로 계속 준행해야 할 조례(條例)들을 선별해서 육전(六典) 체재에 따라 분류하여 편찬하였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이하 『원육전(原六典)』으로 약칭)이다. 『원육전』은 법조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에 이두(吏讀)로 토(吐)를 붙였기 때문에 『이두육전(吏讀六典)』 또는 『방언육전(方言六典)』이라고도 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는 『경제육전』이 편찬된 이후에 내려진 국왕의 수교·조례들을 모아서 정리하여 속전(續典), 즉 법전의 속편(續編) 제작을 계속하였다. 태종 대에는 하륜(河崙) 의 주관으로 1398년(태조 7)~1407년(태종 7)의 수교·조례 등을 모아 정리한 『속육전(續六典)』을 편찬했고(1423년 완성), 1415년(태종 15)에는 『속육전』의 내용 중에서 『원육전』과 모순되는 조문을 삭제·정리하였다. 세종 대에는 1428년(세종 10)에 이직(李稷)·이원(李原) 등이 주관하여 1408년(태종 8) 이후의 각종 조례들을 정리한 『속육전』(6책)을 편찬했으며, 이때 일시적인 규정들을 모은 『등록(謄錄)』(1책)도 함께 제작하였다. 또 1433년(세종 15)에도 황희(黃喜) 등이 주관하여 1398년~1432년에 시행된 조례들을 종합 정리한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과 일시적으로 적용되었던 규정들을 모은 『육전등록(六典謄錄)』(6권) 등을 편찬·간행하였다. 한편, 문종 대에도 『속육전』과 『등록』 찬수를 추진하여 1433년(세종 15)~1450년(문종 즉위년)의 수교·조례 등을 정리·편찬할 계획이었으나, 문종이 갑자기 서거하면서 완성을 보지 못했다.

3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

앞에서 검토한 조선 초기의 법전 편찬은 태조 대에 편찬된 『원육전』을 조종성헌(祖宗成憲)으로 준수하면서 이후 내려진 교령(敎令)들을 분류하여 증보한 『속육전』을 편찬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속육전』 편찬이 무한히 반복되어야 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세조 대에 들어 종래의 법전 편찬 방식을 바꾸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기존의 『원육전』·『속육전』 및 등록(謄錄)과 기타 교령(敎令)을 모두 종합한, 하나의 조직적이고 통일된 ‘만세성법(萬世成法)’의 편찬이 추진되었다.

1455년(세조 1) 세조(世祖)는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육전상정관(六典詳定官)들에게 기존의 법조문들을 정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1458년(세조 4) 세조는 상정관들이 정리하여 보고한 법조문의 내용을 직접 검토한 다음, 이듬해에 최항(崔恒) 등에게 본격적인 법전 찬수(撰修)를 지시하였다. 이때 세조는 사람들의 실생활에 직접 관계되는 부문부터 먼저 편찬하도록 했는데, 그 결과 1460년(세조 6)에 「호전(戶典)」, 1461년에 「형전(刑典)」 이 차례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호전」 편찬이 완성되었을 때 새 법전의 이름을 ‘경국대전’으로 확정하였다.

1467년(세조 13) 세조는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구치관(具致寬)·박원형(朴元亨) 등에게 『경국대전』의 나머지 4전(典)을 감수·교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어 이들이 감수·교정한 내용을 승지들에게 검토하게 한 후 자신이 다시 직접 조항별로 심의하였고, 또 종친·대신들과의 논의 과정을 거쳐서 같은 해 12월에 완성하였다. 하지만 이 법전은 이듬해(1468년) 9월 세조의 서거로 인해 반포·시행하지 못하였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睿宗)은 1469년(예종 1)에 최항·김국광(金國光) 등에게 세조대 편찬된 『경국대전』을 개정·보완하도록 했으나, 예종이 같은 해 11월 서거하면서 이 역시 반행되지 못했다.

성종은 즉위 후 신숙주·한명회·정창손(鄭昌孫) 등에게 『경국대전』의 철저한 교정 및 보완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1470년(성종 1) 11월에 『경국대전』이 완성되었고 이듬해(1471년) 1월부터 이를 준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辛卯大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누락된 조문들이 많다는 지적이 나옴에 따라, 1471년~1473년에 『신묘대전』에서 누락된 조문 130여 건과 향후 시행할 조문들을 증보·개정하여 1474년 1월 새로운 『경국대전』을 반포했는데, 이것이 『갑오대전(甲午大典)』이다. 그리고 이때 『경국대전』에 실리지 않은 72개 조목을 정리한 『속록(續錄)』도 함께 반포되었다.

『갑오대전』이 편찬된 후에도 대전의 수정·보완 및 이후 새로 제정된 법조문의 추가 정리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1485년(성종 16)에 이르러 최종 확정된 『경국대전』이 다시 반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현전하는 『을사대전(乙巳大全)』이다. 이후 『경국대전』은 1511년(중종 6)에 한 차례 중간(重刊)되었는데 『신미대전(辛未大典)』, 법조문의 내용은 『을사대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한편, 1555년(명종 10)에는 『경국대전』의 법조문 중에서 이해하기 어렵거나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곳에 주석(註釋)을 붙인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가 편찬되었다.

4 『경국대전』의 주요 내용

『경국대전』은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전 체재에 따라 6개의 전(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전의 첫머리에는 육조(六曹)에 소속되어 있는 속아문(屬衙門)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으며, 이어서 각 조에서 담당하는 업무의 내용들이 항목별로 기술되어 있다. 각 전의 주요 내용들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이전(吏典)」은 총 29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명부(內命婦)·외명부(外命婦)의 조직과 품계, 중앙과 지방의 관서(官署) 조직과 관직(官職)·관품(官品) 체계, 문신(文臣) 관료의 임용과 인사(人事) 행정에 관련된 규정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밖에 사망 문관에 대한 추증(追增)·시호(諡號), 휴가, 관원 간의 상피(相避), 항리(鄕吏) 등에 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호전(戶典)」은 총 30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의 재정 운영과 관련된 각종 제도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전근대 국가 경제의 근간인 호적(戶籍)과 토지 제도, 조세 제도에 관한 내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이와 관련된 창고(倉庫)·조운(漕運)·회계(會計) 등에 관한 내용도 실려 있다. 또, 관리의 녹봉, 권농(勸農), 어염(魚鹽)·양잠 등의 기타 산업, 토지·가옥의 매매 등에 관한 내용도 「호전」에 수록되어 있다.

「예전(禮典)」은 총 61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 제도와 과거제(科擧制)에 관한 내용, 오복제(五服制)에 근거한 친족 제도, 국가와 왕실의 각종 의례(儀禮), 대명(代明) 및 대일(對日)·대여진(對女眞) 외교 의례 등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또 중앙과 지방 관서에서 사용하는 각종 공문서의 서식(書式)도 수록되어 있다.

「병전(兵典)」은 총 51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의 무반(武班) 관서들의 조직과 직무, 진관체제(鎭管體制)에 기초한 지방 군사 조직, 무과(武科)에 관한 각종 규정, 무반 관료에 대한 인사 행정, 군역(軍役) 제도, 번상(番床) 규정, 역마(役馬) 제도, 성보(城堡)·군기(軍器)·병선(兵船)·봉수(烽燧)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형전(刑典)」은 총 28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종 소송 및 재판의 절차, 여러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형률(刑律)은 『대명률(大明律)』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또, 노비(奴婢) 제도에 관한 각종 규정들도 수록되어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노비 소송에 관한 내용이 부록으로 추가되었다.

「공전(工典)」은 총 14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로와 교량(橋梁)에 관한 규정, 궁궐·관청·도성(都城)·역참(驛站) 등 각종 건물의 관리와 보수에 관한 규정, 수레와 선박에 관한 내용, 각종 나무의 재배·관리에 관한 규정, 도량형(度量衡)에 관한 규정, 서울과 지방의 각종 공장(工匠)들에 관한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5 『경국대전』 이후의 법전들

1485년(성종 16) 『경국대전』이 편찬·반포되어 조선의 ‘만세성법’으로 자리매김한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국왕의 명령인 ‘수교(受敎)’의 형식을 통해 수많은 법령들이 공포·시행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일정 기간마다 이 내용들을 정리해서 『속록』 형태의 법령집을 편찬함으로써 『경국대전』의 법조문을 보완해 나갔다. 먼저, 1492년(성종 23)에는 이극증(李克增)·어세겸(魚世謙) 등이 『을사대전』에 포함되지 않은 법조문과 『을사대전』 이후 내려진 교령 중에서 항구적인 법식이 될 만한 것들을 선별·정리하여 『대전속록(大典續錄)』을 편찬하였다. 또, 1543년(중종 38)에는 윤은보(尹殷輔)·홍언필(洪彦弼) 등이 『대전속록』 이후 50여 년 동안 내려진 수교·과조(科條)들을 정리하여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을 편찬하였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일시 중단되었던 『속록』 편찬은 숙종 대에 다시 재개되어, 1698년(숙종 24)에 『대전후속록』 편찬 이후 150여 년 동안 내려진 수교들을 분류·정리한 『수교집록(受敎輯錄)』이 편찬되었다. 또, 1706년(숙종 32)에는 『경국대전』을 본문으로 하고 『전후속록(前後續錄)』과 『수교집록』의 법조문을 『경국대전』의 각 조항 아래 분속(分屬)시킴으로써 『경국대전』과 『속록』들을 하나로 종합한 『전록통고(典錄通考)』가 편찬되었다.

한편, 영조 대에는 『경국대전』을 보완하는 새로운 ‘전(典)’이 편찬되었다. 즉, 『경국대전』이 편찬된 지 300년 가까이 지나면서 사회 현실과 법조문 사이의 괴리가 많이 나타남에 따라 이를 보완할 필요성이 매우 높아졌다. 이에 영조는 『경국대전』 이후 제정된 법령들 중에서 『경국대전』을 보완하여 만세성법이 될 만한 조항들을 선별·정리해서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고 이름을 『속대전(續大典)』이라 하였다. 『속대전』은 영조가 직접 서문을 지었으며, 1744년(영조 20) 12월에 편찬이 완료된 후 1746년에 간행·반포되었다.

정조 대에는 기존의 법전들을 하나의 책으로 집대성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즉, 『경국대전』과 『속대전』, 그리고 『속대전』 이후에 제정된 법령들을 하나로 통합한 법전의 편찬이 추진되었는데, 그 결과물이 1785년(정조 8)에 반포된 『대전통편(大典通編)』이다. 이 책에서는 『경국대전』의 조문을 ‘원(原)’, 『속대전』의 조문을 ‘속(續)’, 『속대전』 이후 새로 증보된 조문을 ‘증(增)’로 구별하여 병기(倂記)함으로써 당시까지 편찬된 모든 법전들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법전 집대성은 1865년(고종 2)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으로 이어졌다. 조두순(趙斗淳)의 건의로 편찬·간행된 『대전회통』은 『대전통편』 이후 80여 년간의 수교·조례를 정리하여 『대전통편』의 각 조문 아래 추록했는데, 이때 보완된 법조문에 ‘보(補)’를 써서 기존의 『경국대전』·『속대전』·『대전통편』 등의 내용과 구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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