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4년(태조 3)
조선 왕조 개창과 함께 수도 한양에 처음 새로 지어진 이래 조선 전기 주요 궁궐로 쓰이던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탄 이후 폐허로 남아 있다가 고종 대에 중건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었던 경복궁은 1990년대 이후 복원 공사를 통하여 고종대 궁궐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는 1392년(태조 즉위) 7월 16일 개성(開城)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고, 1394년(태조 3) 7월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태조는 도읍을 결정하고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경복궁을 창건하였는데,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크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배치 속에 군신(君臣) 간의 공식적 의례의 공간인 법전(法殿), 임금과 신하가 만나 정사를 논하는 편전(便殿), 임금이 휴식과 수면을 위한 침전(寢殿)의 전각이 일렬로 늘어선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좌우 대칭 구조는 고종 대 중건된 경복궁에서도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궁궐의 이름과 여러 전각의 이름은 정도전(鄭道傳)에게 짓게 하였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토록 그대 큰 복을 누리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이라 하였다. 침전은 강녕전(康寧殿), 동쪽의 작은 침전을 연생전(延生殿), 서쪽의 작은 침전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였다. 또 침전의 남쪽, 편전을 사정전(思政殿), 그 남쪽 법전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남쪽으로 난 궁궐 문을 정문(正門)이라고 하였다. 정도전이 명명한 궁궐의 전각명은 전체적으로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의 체계를 구현하고 있고, 성리학적 경세관이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다. 경복궁의 전각명은 고려 말 조선 초 사회개혁을 희망하고 성리학을 근간으로 군주의 수신을 강조하였던 유학자 정도전의 문제의식과 지향이 집약되어 있으며, 강화된 재상권에 대한 구상도 담겨있었다.
그런데 경복궁이 법궁(法宮: 정궁(正宮))답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세종(世宗) 즉위 이후였다. 세종은 재위 7년 되는 해부터 본격적으로 경복궁에 머물면서 전각의 수리와 건축을 이어나갔다. 세종의 경복궁 건축은 단지 최고 권력자의 건축적 유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세종은 ‘유교적 예치 공간’으로 궁궐을 인식하고 국가의 의례체제 정비와 병행하여 건축 공사를 진행하였으며, 이때 학자의 양성과 문풍의 진작을 위해 경복궁 내부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였다.
세종 대 크게 정비되었던 경복궁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선조(宣祖)가 한양을 떠난 사이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때 창덕궁과 창경궁(昌慶宮), 종묘(宗廟)도 모두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5년(선조 38) 중건 대상으로 논의되었던 궁궐은 경복궁이었다. 궁궐을 중건하기로 논의가 모아진 직후인 1605년 11월 궁궐영건도감에서 경복궁의 정전 구역을 먼저 착공하기로 결정하면서, “조종조(祖宗朝)의 법궁(法宮)”이 경복궁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착공을 하고 공사가 진행되자 인력과 물자의 투입이 과도하니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라 제기되었다. 이런 가운데 선조는 승정원에 국초에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경복궁을 영건할 때 신료들의 논의와 술사들의 의견을 빠짐없이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영건해야 한다는 술사의 주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중건하기로 결정하였다.
폐허로 남게 된 경복궁은 18세기 영조(英祖)에 의해 다시 주목되었다. 조선 후기 경복궁은 터만 남았지만,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역대 국왕들은 이 터를 없애지 않았다. 그리고 영조는 이러한 상징성을 실제적인 사업과 연결시켰다. 경복궁 터가 태조의 창업 사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영조는 이곳에서 중흥의 이념을 담은 행사를 여러 차례 벌였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正祖) 재위 기간에는 경복궁을 중건하고자 하는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세기 전반 세도정치(勢道政治) 시기에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효명세자(孝明世子)는 경복궁 중건 의지를 박규수(朴珪壽)에게 피력한 바 있으며, 대리청정 기간에도 경복궁 옛터를 참배하는 등 중건 의지를 계속 보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종 즉위 후 1865년(고종 2) 4월 2일 신정왕후는 대신들에게 경복궁 중건 의논을 명하였다. 신정왕후는 경복궁 중건의 명분으로 자신의 남편 효명세자가 경복궁을 중건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헌종(憲宗)도 그러한 뜻을 이어받기는 하였으나 구체적인 시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효명세자와 헌종의 궁궐 영건을 통한 왕권강화 시도는 당대에는 그들의 이른 죽음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으나, 결국 고종 초 경복궁 중건으로 이어졌다.
고종 초 수렴청정을 하였던 신정왕후(神貞王后)는 경복궁 중건의 총책임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맡김으로써 흥선대원군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사업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재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1865년(고종 2) 시작된 경복궁 중건은 1867년(고종 4) 마무리되었고, 1868년(고종 5) 고종은 경복궁으로 이어하였다. 고종 대 경복궁의 규모는 조선전기에 비해 확장되었고, 조선 후기의 변화된 의례를 반영하여 만들어졌다.
흥선대원군의 의지로 세워진 경복궁은 고종의 정치적 성장에 따라 후원에 새로운 공간이 조성되었다. 그것은 1873년(고종 10) 경복궁 안의 궁, 건청궁(乾淸宮)이다. 고종이 건청궁을 세운 목적은 어진(御眞)을 봉안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지만, 경복궁 내부에 독자적인 “궁”을 건립함으로써 아버지의 간섭을 피하고 정치적으로 독립을 꾀하기 위한 징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95년(고종 32)에 건청궁에서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비극이 일어났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이듬해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경복궁은 더 이상 궁궐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러시아 공관에 있는 사이 고종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중건하여 1897년 환궁하고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면서 경복궁은 계속해서 비어있었다.
빈 터로 남아있던 경복궁은 1908년부터 궁내부에서 일반에 공개하기로 결정하여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일본의 귀빈을 접대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경복궁에 대한 소유욕을 곧바로 드러냈다. 경복궁을 관리하던 이왕직(李王職)에서는 경복궁 유지 비용을 마련할 수 없다며 1911년 5월 경복궁을 총독부에 인도하였다. 총독부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라는 대규모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거행하면서 경복궁 내의 많은 전각을 훼손했다. 공진회가 끝난 후 박람회 기간 동안 미술관으로 쓰였던 건물은 총독부 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제1호관이 세워졌던 장소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다. 여기에 1917년 창덕궁의 희정당과 대조전 일대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건물이 소실되자 창덕궁 전각의 중건을 위해 경복궁 내에 남아있던 교태전, 강녕전 등의 건물을 헐어 그 목재를 창덕궁 화재복구에 사용하였다. 이렇게 경복궁의 전각들은 조선총독부 청사 공사를 전후하여 상당수 사라지게 되었으며,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 준공식에 맞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철거되어 원형 그대로 동쪽 건춘문 근처로 이전하였다.
일제 강점기 경복궁에서 여러 차례 대규모 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
1945년 한국은 일본에서 해방되었으나 경복궁의 수난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미군은 조선총독부를 대신해서 경복궁에 자리를 잡았고, 조선총독부청사는 미군정청사로 이용되었다. 1946년 미군정은 경복궁 내부에 숙사건립을 강행함으로써 고적의 훼손을 피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미군정에 이어 구 총독부청사를 계속해서 행정의 중심지로 사용하였고, 이어서 일어난 1950년 한국전쟁으로 광화문(光化門)과 만춘전(萬春殿), 천추전(千秋殿)이 파괴되는 등 많은 피해가 이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경복궁은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1960년 7월 경복궁이 일반에게 공개되면서 경복궁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공원과 같은 성격이 보다 강화되었다. 1960년대 말 경복궁은 ‘민족의 얼’을 살리는 교육공간으로 변모해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정신혁명, 정신의 근대화를 주창하며 ‘민족의식의 확립’을 위해 문화재를 보호하고 가꾸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정치적 목적이 다분히 담긴 이 복원사업을 통해 새롭게 건립된 경복궁 일대 여러 건물들은 이미 조선 시대의 궁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1968년 광화문은 중앙청 축에 맞추어 경복궁의 중심축과 비뚤어진 채 콘크리트로 복원되었고, 1975년에는 영추문(迎秋門)이 콘크리트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와 마찬가지로 경복궁 내에 박물관과 미술관을 조성하였다.
1990년대 이후 경복궁은 고종 대의 경복궁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1995년 구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고, 이 자리에는 2001년 옛 모습대로 흥례문(興禮門) 권역이 복원되었다. 경복궁의 복원 공사는 1991년부터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