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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慶運宮]

광무연간 대한제국의 유일한 궁궐

미상

경운궁 대표 이미지

덕수궁 함녕전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경운궁은 1593년(선조 26) 선조가 정릉동(貞陵洞)에 있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저택을 행궁(行宮)으로 삼아 점차 확장하면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611년(광해군 3)에 경운궁이라는 궁호(宮號)가 제정되어 조선 왕실의 궁궐로 그 위상을 확보했으며, 1618년(광해군 10) 폐비가 된 인목대비(仁穆大妃)가 경운궁으로 유폐될 때에는 ‘서궁(西宮)’으로도 불렸다.

이러한 경운궁은 광무연간 이후 대한제국의 중심공간이 되었으며, 황제의 궁궐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07년(광무 11) 고종이 강제 퇴위된 이후 경운궁은 고종의 거처가 되어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되었다.

2 선조, 월산대군의 사저를 행궁으로 삼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때 피난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환어(還御)하면서 불타버린 경복궁과 창덕궁을 대신하여 정릉동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하면서 시작되었다. 전란기간 동안 정릉동 일대는 일본군이 주둔했던 곳이었다. 당시 한양에 입성한 일본군들은 종루까지 진입해 종묘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종묘를 태워버리고 남별궁(南別宮)으로 진지를 이전하였다. 소공주동(小公主洞)에 위치했던 남별궁은 정릉동 인접지역이었다. 선조는 ‘왜군이 머물던 곳에서 지낼 수 없다.’며 남별궁 대신 월산대군 집에 행궁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월산대군의 집 주변에는 많은 종실들이 모여 있었다. 이 지역에는 덕풍군(德豊君)의 차자인 계림군(桂林君)의 집이 인접해 있었으며, 창빈 안씨(昌嬪安氏)의 집도 있었다. 선조의 행궁은 임시적인 거처로 마련한 것이지만 장기간 체류하게 되면서 점차 실질적인 궁궐로 기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인접한 종친의 집을 수용하면서 경역도 확장해 나갔다.

3 경운궁으로 호칭하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이 소실되었으나, 전란 이후의 궁궐 복구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선조는 창덕궁의 중건을 완료하지 못한 채 1608년(선조 41) 정릉동 행궁(경운궁)에서 승하했으며, 뒤를 이어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였다. 이후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의 궁호를 신하들에게 올리게 했다. 새 이름으로 흥경궁(興慶宮)이 거론되었으나 광해군이 전대(前代)의 궁호인 것을 이유로 거절하여 경운궁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왕의 거처로 삼았던 경운궁은 광해군이 이곳에 인목대비를 유폐하면서 격하시켜 ‘서궁’으로 불리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경운궁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한 후 선조가 거처하던 침전인 즉조당과 석어당(昔御堂)만 제외하고 경운궁을 월산대군의 후손에게 돌려주었다. 경운궁이 인목대비를 유폐한 폐정의 상징이므로 선조의 침전만 남기고 훼철하였던 것이다. 이후 경운궁은 즉조당과 석어당, 그리고 왕비의 토지를 관리하는 궁방인 명례궁 등만 남은 상태로 200여 년 동안 비어 궁궐로서의 위상은 상실되었다.

4 대한제국의 중심 무대, 경운궁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쓰이게 된 시기는 1896년(고종 33)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이다. 고종은 1895년(고종 32) 명성왕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되는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자, 이듬해 고종과 왕태자(王太子)는 경복궁에서 대정동(大貞洞)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왕태후(王太后)와 왕태자비(王太子妃)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공사관에 머물면서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기 위해 궁궐의 수리를 명하였다. 8월 10일 궁내부(宮內府)와 탁지부(度支部)에서 주관하여 경운궁을 수리할 것을 명하고, 23일에는 경복궁에 있던 명성왕후의 빈전(殯殿)과 선왕의 어진을 모신 진전(眞展)을 경운궁으로 옮겼다. 이후 9월 28일 궁내부는 고종에게 경운궁의 수리가 완료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처럼 궁의 보수 공사가 모두 끝나자 고종은 이듬해인 1897년(고종 34) 2월 20일 경운궁으로 이어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 궁에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이 갖추어져 있었을 뿐이다. 환궁 이후 고종은 함녕전(咸寧殿), 선원전(璿源殿)을 새로 짓고 경복궁의 만화당(萬和堂)을 경운궁으로 옮기게 했으며, 경운궁에 새 문을 내고 ‘대안문(大安門)’의 현판을 다는 등 정비를 계속하였다.

1897년 8월 고종은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9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할 원구단 축조공사를 행한 후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고종의 황제 즉위와 함께,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중심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황궁으로의 면모를 갖추기에는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1900년(광무 4) 이후부터 경운궁 확장사업이 본격화되었다.

1901년(광무 5) 8월 고종은 법전(法殿)을 영건하라고 명하여 중화전(中和殿)을 신축하는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었다. 중화전 공사는 이듬해 9월 마무리 되어 고종은 수고한 관리들을 시상하고, 대사령을 반포하였다. 11월 중화전의 외삼문(外三門)인 조원문(朝元門) 완성 이후 경운궁에는 여러 전각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석조전(石造殿)도 1900년에 착공하였는데, 영국인 하딩(G.R. Harding)이 설계한 것으로 1910년 완공되었다. 3층으로 세워져 1층은 시종신의 거실, 2층은 황재의 접견실과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거실로 사용되었다.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靜觀軒) 또한 1900년경 세워졌다.

이처럼 경운궁 중건 및 확장 공사가 계속되던 1904년(광무 8) 4월 경운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궁의 일부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함녕전의 구들을 고치고 불을 지피다가 화재가 났는데, 이날의 불로 함녕전,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과 각 전각 등 경운궁의 중심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경운궁에서 화재가 발생했지만 고종은 다른 궁으로 이어하지 않고 수옥헌(漱玉軒) 영역으로 옮겼다. 그리고 즉시 대신들을 만나 재용이 없더라도 반드시 궁궐을 중건해야 한다고 하며 경운궁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이에 다음날 경운궁중건도감이 설치되었고,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때 중건된 전각은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함녕전, 준명당(濬明堂), 흠문각(欽文閣), 영복당(永福堂), 함유재(咸有齋), 함희당, 양이재, 중화문 등이다.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은 본래 2층 구조로 건설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된 이후 단층 구조로 재건되었다.

1906년(광무 10) 4월에는 경운궁 동문인 대안문을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대안문의 일부를 수리하고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었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1906년 이후 대한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이처럼 경운궁이 어느 정도 복구되자 1906년 9월 고종은 준명전에서 각국 영사들을 접견하였고, 1907년 1월에는 중화전이 복구되어 고종은 중화전에 나아가 황태자비 책비례를 행하였다.

5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1907년(광무 11) 7월 20일 고종은 일본의 압력에 의해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강제로 순종실록에게 양위하고 퇴위하였다. 이때 태황제 고종의 궁호(宮號)를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德壽)라 정하였다. 순종실록은 경운궁의 돈덕전(惇德殿)에 나아가 즉위식을 행하고 11월 태황제가 된 고종을 경운궁에 남겨둔 채 황후, 황태자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순종실록의 창덕궁 이어 후 경운궁은 고종의 궁호를 따서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인조가 즉위하고 대한제국기 중심 무대였던 경운궁은 국왕의 공적 활동을 하는 궁궐로서의 기능보다 퇴위당한 고종의 거처가 되면서 궁의 권위가 상실되었다. 1911년 덕수궁 즉조당에서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가 세상을 떠났으며, 고종은 강제퇴위 당한 후 13년 동안 덕수궁 함녕전에 거처하다가 1919년 1월 승하하였다. 고종의 승하 후 덕수궁 궁역은 잘려 나가고 전각도 헐리는 등 빈 궁궐로 남게 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12월 덕수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사무처가 되었으며, 1946년 3월에는 석조전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어 한반도문제가 논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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