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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 우리나라의 역사를 강목체로 재정리하다

1778년(정조 2)

동사강목 대표 이미지

동문선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동사강목』은 안정복(安鼎福)이 1778년(정조 2)에 완성한 역사서이다. 전부 20권(각 권 상, 하 구성)으로, 고조선에서부터 고려 공양왕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기본적으로는 편년체이면서도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본떠 강목체 구성을 핵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책명이 ‘동사강목’이 되었다.

2 순암 안정복의 삶

안정복(1712~1791)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역사가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백순(百順)이다.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중에서 순암을 가장 많이 썼다. 가문은 남인 계열이다. 선조들이 대대로 중앙의 고위 관리를 지냈지만, 영조 즉위 후 조부인 예조참의 안서우(安瑞羽)가 노론의 배척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점차 정계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안극(安極)은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못했다.

안정복은 젊은 시절에 경기도 광주에 정착하여 홀로 학문에 전념했고, 29세에는 『하학지남(下學指南)』을 저술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자기 학문의 본류로 삼았지만, 병법(兵法)·의약(醫藥)·복서(卜筮)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반계수록(磻溪隧錄)』을 통해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에 감화되어 실학과 인연을 맺었다. 35세 때에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섬겼다. 스승과 제자가 직접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훗날 안정복은 이익 계열 근기학파(近畿學派)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그는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제도와 수취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안정복은 38세에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아갔다. 43세에 사헌부 감찰까지 올랐지만, 곧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광주로 물러나 약 18년 동안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동사강목』을 비롯하여 『임관정요(臨官政要)』, 『열조통기(列朝通紀)』 등을 저술하였다. 그가 다시 벼슬길에 나간 시기는 61세였다. 당시 세자였던 정조를 보위하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찬(翊贊) 등을 역임하였고,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60~70대의 고령이었지만 목천 현감(木川縣監), 돈녕부 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73세에 다시 학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당시 근기남인들은 천주교 인식을 둘러싸고 갈라졌다. 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형제, 정약종(丁若鍾)·정약용(丁若鏞) 형제 등은 천주교를 수용하는 입장이었고, 안정복, 황덕길(黃德吉) 계열은 천주교를 배척하면서 보수적인 주자학풍으로 회귀하였다. 특히 권철신은 안정복과 함께 이익 문하에 있었고, 권일신은 안정복의 사위였다. 안정복은 1785년(정조 9)에 천주교 비판 서적인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한 반면, 권일신은 1791년(정조 15)에 신해박해로, 권철신은 1801년(순조 1)에 신유박해로 순교하였다.

3 『동사강목』은 어떻게 작성되었나

안정복이 역사서를 편찬하겠다고 결정한 데에는 기존 역사서에 대한 불만이 깊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역사서가 사료 수집이 철저하지 못하고, 서술이 난잡하여 체계가 잡히지 않았으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시비를 가리지 못했다고 평했다.

『동사강목』을 짓기 위해 안정복은 여러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토론을 했다. 스승 이익에게는 기존의 역사책에 대한 문제점을 토로하였다. 그의 견해로는 삼국의 역사는 황망하고 잡스러워 말할 것도 없으며, 고려 역사는 조금 간략하지만 사료가 많이 유실되어 그런 것이지 역사를 편찬하는 사람들의 잘못은 아니라고 하였다. 길재(吉再)가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빠진 것은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익을 비롯하여 윤동규(尹東奎), 이병휴(李秉休)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동사강목』의 편찬 방향과 체재에 대한 논의를 했다. 그가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은 강목체 서술에서 강조하는 정통론, 절의론, 춘추필법(春秋筆法,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자신의 판단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 등을 균형적 사고의 틀에서 서술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료를 수집하였고, 평가의 기준으로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의 범례를 기준으로 삼았는데, 내용만 다를 뿐 형식은 거의 같다. 또한 기존 사서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계통을 밝히고, 시비를 바르게 하며, 법제를 상세히 밝혀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더불어 충절을 높게 평가하는 한편, 찬탈자와 반역자는 엄격히 평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결과 『동사강목』의 초고는 1756년(영조 32)부터 1759년(영조 35)까지 작성되었다. 그러나 20여 년 동안 완성하지 못했다가 1776년(정조 즉위)에 충청도 목천현감을 지내는 동안 여가를 활용하여 정서하였고, 1778년(정조 2)에 완성하였다. 즉, 40대 중반에 광주에서 집필한 것을 67세가 되어서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사건의 인과관계를 중시하여 강(綱)에서는 기본 사실을, 목(目)에서는 그 사실과 관련된 내용을 기존의 여러 역사서에서 모아서 서술하였다. 안정복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헌을 고루 이용하여 우리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자 하였는데, 편찬에 활용했던 책 제목이 기록되어 있어 독자들은 원하는 주제와 관련된 자료에 대한 정보도 획득할 수 있다.

4 강목체의 단점을 보완하다

『동사강목』은 강목체 사서이기 때문에 기전체(紀傳體)의 열전(列傳), 지(志), 표(表) 등이 없다. 안정복은 이러한 항목을 보완하기 위해 「전수도(傳受圖)」, 「지도(地圖)」, 「관직연혁도(官職沿革圖)」, 「고이(考異)」, 「괴설변증(怪說辨證)」, 「지리고(地理考)」, 「강역고정(疆域考正)」 등을 서술하였다.

이 중 「전수도」의 동국역대전수지도(東國歷代傳授之圖)에서는 단군조선부터 조선까지의 역사를 계보화하여 조선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지도』에서 삼국초기도(三國初期圖), 고구려전성도(高句麗全盛圖), 고려통일도(高麗統一圖)를 비롯한 각종 지도를 그려 국경선, 수도 천도 등을 기록하였고, 지명의 변천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관직연혁도」의 경우는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역대 문무 관직의 연혁을 도표화하였다. 그리고 「괴설변증」에서 정사(正史)에 기록되지 않은 괴이한 이야기[怪說]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내리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5 안정복은 각 시대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안정복은 조선 전기에 서거정(徐居正) 등이 편찬한 사서인 『동국통감(東國通鑑)』을 기본 자료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동국통감』에 비해 고대사를 대폭 보완하였고,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쓴다는 직서(直書) 원칙에 더욱 엄격했다. 따라서 『동국통감』과 『동사강목』은 여러 측면에서 다른 점이 많다.

우선 단군조선에 대해 『동국통감』은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정복은 단군 관련 기록을 인정함으로써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단군조선을 우리나라의 시작점으로 여겼다. 한편, 『동국통감』과는 달리 기자조선의 문화가 중국에 예속된 것이 아닌 우리나라의 독창적이고 우수한 문화로 보았다. 삼한에 대해서는 『동국통감』이 삼한과 기자조선의 관계가 무관하다고 보았지만, 『동사강목』은 삼한 중 마한이 기자조선을 이은 정통국가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삼국에 대해서는 『동국통감』에서 세 나라를 동등하게 서술하겠다는 원칙이 있었는데, 『동사강목』은 그런 원칙을 더욱 철저히 지키려 노력하였다. 우선 삼국의 건국 순서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서로 인식하였고, 건국 신화는 배제한 채 믿을 만한 사실만 기록했다. 다만 삼국통일에 대해서는 중국을 존숭하는 입장이 반영되어 “〈신라가〉대당(大唐)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오만한〉 백제와 〈교만한〉고구려의 죄를 문책하였다.”고 서술하였다. 발해도 고구려의 옛 영토에 있었던 나라로 서술했을 뿐 남북국 개념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고려에 대한 서술은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드러내고자 했다. 『동국통감』에서는 조선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해 고려 말의 시대적 상황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에 최영(崔瑩), 이색(李穡), 조민수(曺敏修) 등을 비판하고, 우왕(禑王)·창왕(昌王)을 신우(辛禑), 신창(辛昌)으로 기술했다. 이러한 점에 대해 『동사강목』은 매우 비판적이다. 안정복은 우왕과 창왕을 모두 정통으로 인정하였고, 최영의 경우에는 『용재총화(慵齋叢話)』와 변계량(卞季良)의 시(詩)를 인용함으로써 그가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쳤음을 부각하였다.

6 『동사강목』의 사료적 가치

『동사강목』은 역사적 고증이 광범위하고 철저한 편이다. 안정복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 『동국통감』, 『여사제강(麗史提綱)』 등을 비롯한 우리 역사서와 『사기』, 『한서』, 『삼국지(三國志)』, 『문헌통고(文獻通考)』 등 중국 역사서를 백여 종 확보해 놓고, 각 사실을 비교·검토한 끝에 『동사강목』을 저술하였다. 중국 사서를 매우 많이 참고했기 때문에 다른 사서에 비해 중국이나 일본과의 대외관계가 매우 상세하다는 특징이 있다. 안정복은 『동국통감』을 많이 참고했는데, 조선 전기의 관찬 통사인 『동국통감』의 역사 인식이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새롭게 정리되는 것을 통해 조선 전기와 후기의 역사인식의 변화를 알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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