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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토종 의서(醫書)의 꿈, 백성을 치료하다

1610년(광해군 2)

동의보감 대표 이미지

동의보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許浚)이 1610년(광해군 2)에 저술한 조선의 대표적인 의서이다. 인체의 모든 병증에 대하여 당시까지 전해지던 이론과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동시에, 독자적인 질병 분류체계를 세워 조선의 의학 수준과 의료 환경을 한 차원 끌어올린 역작으로 평가된다. 1613년(광해군 5) 내의원(內醫院)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으며, 이 때 간행된 작품이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보물 제108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전란과 이상기후, 역병이 만연하다

『동의보감』이 편찬되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은 임진왜란과 같은 큰 전쟁을 치르는 동시에 이상기후 현상이 빈발하여 생태학적 환경이 악화되었다. 16세기 후반에는 전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모기로 인한 학질 등 열병이 크게 유행하였고, 17세기 초반에는 수재와 한재, 냉해가 번갈아 일어나는 이상기후 현상으로 성홍열이나 인플루엔자 등과 같은 겨울철 역병이 만연해 있었다. 특히 겨울철 역병으로 인한 피해는 매우 컸는데, 이에 임란 이후 전후복구에 전력하던 조선 정부는 역병에 대한 대책으로 허준에게 의서를 저술하도록 하였다. 이때 쓰인 책이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 『벽역신방(辟疫神方)』, 그리고 전염병과 관련한 의서들을 우리말로 쉽게 풀이한 언해본 의서들이었다. 훗날 이 책들의 내용은 『동의보감』에서 일관되게 정리된다.

3 『동의보감』의 편찬 과정

허준은 언해본 의서를 저술한 이후 계속해서 『동의보감』의 찬술에 힘을 쏟는다. 『동의보감』은 1596년(선조 29) 당시 태의(太醫)였던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아 동료들과 함께 편찬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쟁 등으로 인해 허준은 구급용 언해본 의서 편찬 작업에 몰두한데다, 정유재란의 발발로 의관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져 편찬이 중단되었다. 이에 선조는 허준에게 혼자서 편찬하도록 지시하였고, 허준은 내장방서(內藏方書) 오백 권을 자유롭게 이용하며 편찬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해에 갑작스레 선조가 죽자 사헌부 등 관련 기관은 수의(首醫)였던 허준의 죄를 물어 추국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양사(兩司)는 허준의 죄를 물어 상소를 계속 올렸고 이에 허준은 파직되어 도성 밖으로 쫓겨난다. 사간원 등에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를 위리안치 시킬 것까지 계속 주장하여 , 1608년(광해군 즉위)~1609년(광해군 1) 사이의 2년 동안 귀양살이와 복귀를 되풀이하였다. 허준은 이 기간 동안 『동의보감』 25권을 완성시켰으며 이때가 1610년(광해군 2), 그의 나이 65세였다.

4 『동의보감』 의 특징

『동의보감』은 완성된 지 4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임상에서 널리 활용하고 있는 우리나라 한의학의 대표적인 서적이다. 오늘날까지 『동의보감』이 한의학에서 부동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내용상의 특징에서 기인한다.

『동의보감』은 본문을 내경(內景), 외형(外形),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針灸)의 다섯 개 편목으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각각 여러 개의 세목으로 분류하고 있다. 각 항목에서는 고금의 의서들을 취사선택하여 병의 원인과 처방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그 출전을 일일이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동의보감』은 인체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병증에 대해 명나라 말엽 이전까지 내려오는 고금의 이론과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다. 이와 같은 체계적인 정리는 처방의 선택을 용이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후학들의 학업을 게으르게 만든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위와 같은 『동의보감』의 편제는 정(精)ㆍ기(氣)ㆍ신(神)이라는 인체의 기본 구성요소를 축으로 몸 안을 비춰보고[內景], 밖을 갈라서[外形] 이해함으로써 몸의 다양한 병적 변화[雜病]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편제이다. 이 같은 편제는 기존 중국의 의서들이 병증을 중심으로 본 것과 달리, 『동의보감』은 사람의 몸을 중심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기존의 의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정ㆍ기ㆍ신의 편제는 『동의보감』이 단순한 지역적 의학이 아니라 보편성을 갖는 의학 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부여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동의보감』은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영향을 받아, 병을 치료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예방적 관점에서 보아 병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양생(養生)을 가장 좋은 방책으로 보았다. 『동의보감』의 서문에 “사람의 질병은 모두 양생을 잘못한 데서 생기므로 수양(修養)을 우선하고 약과 침은 그 다음으로 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예방을 우선하는 이와 같은 원칙은 『동의보감』 전체를 흐르는 하나의 서술 원칙이었다. 이는 『동의보감』이 당시 일반적이었던 치료 중심의 의학관과 달리 예방의학적 의학관을 표방하고 있었음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동의보감』은 기존의 의서들을 인용, 편찬한 종합의서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인용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임상에서 그 치료 효과를 실증한 후 우리의 풍토에 맞도록 처방을 조절한 것이었다. 또한 고려 때부터 정리되어 온 우리의 향약(鄕藥)이 제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처방을 고르는 데 있어서도 임상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지나치게 차거나 뜨거운 약, 강하게 깎아내리는 약을 피하면서 효과가 분명하고 빠른 처방만을 실었다. 이 때문에 훗날 “사람의 타고난 체질은 고금이 다르고 동서의 풍기도 서로 같지 않다. 고금의 의서 중에서 진실로 우리나라 사람이 쓰기에 알맞은 책을 찾자면 양평군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만 한 것이 없다.” 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동의보감』은 의사나 약을 구하기 쉽지 않은 궁벽한 곳에 사는 민중들도 쉽게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당시 널리 쓰이는 약재를 골라 수록하고, 향약의 경우 그 이름과 산지, 채취 시기, 음용법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민중의학을 개척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데, 향약의 중요성과 유용성을 강조하고 향약의 이용을 적극 권장하여 궁벽한 곳에서도 약을 구하기 어려운 폐단이 없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동의보감』에 수록된 약재는 총 1,403종인데, 이를 동물, 식물, 광물로 크게 분류하고 인부(人部), 수부(獸部), 금부(禽部) 등 15개의 부로 나누었다. 이 중 637종의 약명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어 일반 백성이 알기 쉽도록 하였으며, 전체 약재 중 중국 약재가 102종(7.2%)에 불과하여 대부분의 약재를 국내에서 구해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5 『동의보감』 간행의 의의

『동의보감』은 크게 두 가지의 간행의의를 갖는다.

먼저, 『동의보감』은 간행 이후 조선의학의 경전이 되었다. 『동의보감』을 중심으로 ‘보감파(寶鑑派)’라는 학파가 형성되어 우리나라 한의학의 주류를 형성하였으며, 후대에 『동의보감』을 토대로 하여 수많은 의서들이 연이어 간행된다. 대표적으로 『제중신편(濟衆新編)』, 『수민묘전(壽民妙詮)』, 『방약합편(方藥合編)』, 『의방촬요(醫方撮要)』 등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동의보감』이 조선의학을 하나의 독립된 의학의 반열에 올렸다는 점이다. 이 같은 의식은 『동의보감』 스스로 우리나라의 의학을 ‘동의(東醫)’라고 명명하는 데에서 볼 수 있다. 『동의보감』 집례(集例)에서 “동원(東垣)은 북의(北醫)인데 나겸보(羅謙甫)가 그 법을 전하여 강소(江蘇)와 절강(浙江) 지역에 알려졌으며, 단계(丹溪)는 남의(南醫)인데 유종후(劉宗厚)가 그 학문을 이어 섬서(陝西) 지역에서 명성을 떨쳤으니, 의학에서 남북의 이름이 드높다. 우리나라는 동쪽에 치우쳐 있으나 의약의 도가 이어져 끊임이 없었으니, 우리나라의 의학은 동의(東醫)라고 할만하다.”라고 하여 중국의 북의, 남의와 함께 우리의 의학을 동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즉, 『동의보감』의 간행은 중국 의학에 의존하고 있던 당시의 세태를 넘어, 풍부한 임상 경험과 전통의학이 반영된 우리나라의 의서가 등장한 것이며, 조선 의학의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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