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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중국을 배우다

1778년(정조 2)

북학의 대표 이미지

북학의 표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박제가 개혁론의 정수 『북학의』

『북학의(北學議)』는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흔히 『북학의』는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 지식인 중의 하나인 박제가가 ‘중국의 문물을 조선에 도입하자’고 주장한 내용의 책으로만 알려져 있다. 물론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박제가가 『북학의』를 지은 진정한 목적은 그가 조선 곳곳에서 목격한 폐단의 원인을 진단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론을 일목요연하게 개진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북학의』에는 그가 목격한 중국 문물의 우수성을 찬탄하며 이를 본받자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곳곳에는 박제가가 생각하는 조선의 부조리와 그 원인, 이를 치유하기 위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보인다. ‘중국을 배우자’는 이를 위한 중요한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박제가의 개혁론·경세론을 엿볼 수 있는 『북학의』의 성격은 1798년(정조 22)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에 대한 답으로 그가 이 책을 요약하여 바쳤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상황과 현실과 점차 괴리를 보이는 조선 초의 법과 제도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를 개혁해 보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간의 연구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지배 엘리트들을 ‘실학자’라고 지칭하였으며, 박제가도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주목하여 왔다. 특히 실학자들 중에서도 서울과 그 주변에 세거하며 대대로 관직을 보유하던 경화사족들이 주축이 되어 청의 학문과 문물을 배우고 조선에 적용하기를 주장하던 지식인 그룹을 ‘북학파’라고 부른다. 박제가는 북학파의 대표적인 사람이며, 그의 개혁론도 실학의 북학파 흐름에서 이해해야 한다. 중요한 사실은 조선에서 개혁의 방안을 모색하고 주장한 사람들이 ‘실학(實學)’에만 있었거나, 이것이 기존 조선의 지배적 사상체계를 제공한 성리학(性理學)을 부정·극복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박제가의 개혁론 역시 조선 성리학의 세계관과 경세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2 『북학의』의 구성과 내용

박제가는 1750년(영조 26) 서울에서 승지를 지낸 박평(朴玶)의 서자로 태어났다. 서자였지만 글과 예술에 뛰어나 어릴 때부터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성대중(成大中) 등의 서얼 출신 문사와 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채제공(蔡濟恭) 등 당대의 이름난 지식인들과 어울렸다. 박제가는 일생동안 모두 네 번의 연행(燕行)을 하는 행운을 누렸다. 『북학의』는 그가 1778년(정조 2) 첫 연행을 마치고 돌아와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지은 책이다.

『북학의』는 크게 내편(內篇)과 외편(外篇) 두 부분으로, 각 편 1권, 총 2권 1책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한꺼번에 완성한 것은 아니고 시차를 두고 보충하고 다듬어서 최종적으로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띤 것으로 보인다. 박제가는 중국에서 돌아와서 3개월만인 1778년(정조 2) 9월에 일차적으로 북학의를 완성하고 서문을 썼는데, 그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에는 내외편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1781년(정조 5) 서명응(徐命膺)과 박지원의 서문에는 『북학의』가 내외편으로 나눠져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박제가가 3년 사이에 외편을 더 작성하고 이를 기념하여 두 사람에게 서문을 부탁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영평현령으로 재직할 때에는 『북학의』 중에 농사와 관련된 부분을 보충하고 그 밖에 백성들의 생활과 관련한 내용을 추려서 『진소본북학의』를 정조(正祖)에게 바쳤다. 박제가는 1786년(정조 10)에 정조에게 올린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丙午所懷)」를 『북학의』에 부록으로 수록하였는데, 역시 『북학의』의 내용과 관련이 깊은 개혁책을 담은 글이라는 점에서 『북학의』의 성격과 상통한다.

『북학의』에 담긴 소재와 내용은 다양하나,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먼저 『북학의』 내편에서는 주로 박제가가 중국에서 보고 들은 내용이 대부분으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중국과 같이 바꾸면 효율적이고 윤택한 삶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수레·선박·성곽·벽돌·기와·주택·삿자리·창호·도로·교량 등의 항목은 사람과 물자의 유통, 효율적인 방어, 견고한 건축 등을 위한 국가의 기반시설을 확대하고 기준을 마련하자는 내용이다. 목축·소·말·나귀·안장·구유통과 같이 가축을 키우고 활용하는 방법을 소개한 것, 시장과 우물·장사·은·화폐·철 같이 상업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내용도 있다. 이밖에 부녀자들의 옷·약·간장·담요·종이·활·문방구 등 중국인들의 생활 물품을 소개하고 조선의 것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북학의』 외편에서는 밭·거름·양잠·농기구·수차 등 농업기술 향상을 위한 제도나 기술을 논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존주론(尊周論)·북학변(北學辨)에 나타난 박제가의 중화(中華)에 대한 인식이다. 박제가는 여기서 조선이 청의 문물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중국 주나라 때부터 전수된 중화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여 동시기 지식인들처럼 성리학적 세계관의 틀에서 사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과거론(科擧論)이라는 글에서 과거제의 폐단을 지적하고 인재 선발에 대한 개혁이 필요함을 말하였다.

『진소본북학의』(陳疏本北學議)는 농서를 구하는 정조의 윤음에 부응하여 올린 것이기 때문에 농업에 대한 내용이 한층 보강되어, 외편에 있는 농업에 관한 항목은 물론 곡식·볍씨·논·수리·모내기·감자심기 등의 항목이 추가되었다. 이밖에 농사를 짓고 농산물을 원활하게 유통시키는 데에 필요한 기반시설을 신설·확충하자는 뜻에서 하천의 준설, 창고 마련하기, 선박의 통행을 말하였다. 생산뿐만이 아니라 생산물의 유통이 활발해야 한다는 박제가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상업에 대한 강조로 나아갔는데, 이를 위해 말리(末利), 재부론(財富論), 강남 절강 상선과 통하는 논의(通江南浙江商舶議) 라는 글을 지었다.

3 『북학의』가 강조한 것은? - ①백성들을 가난에서 구제하기 위한 이용후생

박제가는 『북학의』를 통하여 중국 연행길에서 목격한 다양한 제도와 문물을 논하고 이를 통해 정립한 개혁의 방법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박제가가 『북학의』를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핵심적인 생각은 무엇일까?

박제가는 『북학의』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재 백성들의 상활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고, 국가의 재정은 날이 갈수록 고갈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대부가 팔짱을 낀 채 바라만 보고 구제하지 않을 것인가?” 또한 정조에게 올린 「병오소회」에서는 “지금 나라의 큰 폐단은 한마디로 가난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난을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라며 나라의 곤궁함을 해결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때 박제가가 강조한 말이 바로 ‘이용후생(利用厚生)’이다. ‘이용후생’이라는 말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쓰임을 이롭게 하고 삶을 넉넉하게 한다는 말로 반드시 백성들의 덕을 바르게 한다는 뜻의 ‘정덕(正德)’과 짝지어서 쓰였다. 그래서 박제가도 “이용과 후생은 한 가지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정덕을 해친다.”고 하여 정덕의 조건으로 반드시 이용과 후생이 강조되어야 함을 말하였다.

그렇다면 정덕을 위해 백성들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이용후생’의 방법은 무엇일까? 조선은 농업이 중심이 되는 나라였기 때문에 당연히 농업 생산이 잘 되어야 했다. 따라서 박제가도 농업의 생산력 증진을 위한 여러 방법을 논하고, 이를 위해 중국의 선진 농업 기술과 제도가 소개 되었다. 하지만 박제가는 농업 생산의 증진만큼이나 상업과 유통, 외국과의 통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당시 말단의 일이라고 천시된 상업을 발전시켜야 하며 유통의 촉진을 위한 수레·선박·도로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용한 물건을 유통시키고 거래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쓸모 있는 물건이라도 대부분 한 곳에 묶여 유통되지 않거나 홀로 떠돌다가 쉽게 고갈될 것이다.”라는 말과 “상인들이 교역을 하지 않고 놀고먹기만 한다면 이는 사람이 할 일을 잃은 것이다.”라는 말은 박제가가 상행위를 통한 물자의 유통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말이다.

4 『북학의』가 강조한 것은? - ②통일성과 계획,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상업이 발달하려면 반드시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 물자의 이동과 거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우선 기반 시설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반시설의 마련은 현대에도 그렇지만 개인적인 힘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반드시 국가가 주도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마련되는 것인데, 자원의 소유와 이동이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더더욱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박제가는 수레나 선박 같이 생산물을 실어 나르는 수단을 중요하게 여겨 중국의 것을 모범삼아 조선에도 도입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것들이 원활하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도로와 교량을 늘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모든 수단들은 효율성을 위해서 일정한 규격과 통일된 크기를 유지하는 것이 요구된다. 효율적인 건축을 위해 벽돌의 크기를 일정하게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도량형을 일정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국가의 장악력이 필요한 일이다. 상거래의 현장에서는 물건대 물건의 거래보다 화폐의 사용이 편리하다. 박제가 역시 화폐의 사용, 특히 중국에 수출만 하던 은을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박제가가 국가의 역할증대를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모든 제도의 확립은 막대한 행정력이 소요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려면 국가의 개입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정조가 박제가를 중국의 강력한 국가주의적 개혁론자인 왕안석(王安石)에 비유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제가의 개혁론은 국가의 역할을 제외하고 논할 수는 없다.

5 『북학의』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 - 중화(中華)가 모범이다

흔히 박제가의 『북학의』를 두고서 당시 조선 지배층의 폐쇄성과 대비되는 개방성을 칭찬한다. 서양 선교사 도입 주장이나 청의 문물에 대한 찬탄만을 보고, 외국을 모델로 하여 조선 내부를 개혁하자는 주장을 펼친 혁신적인 지식인으로 평가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를 비롯한 북학파들을 구한말의 개화파와 연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분히 오해이다. 박제가가 진정으로 추구한 모델은 무엇일까?

『북학의』 속의 「존주론」과 「북학변」이라는 글은 박제가의 지향성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주는 글이다. 박제가에 따르면, 청은 중화의 정통을 가진 명나라를 멸망시킨 오랑캐이다. 그러나 그들이 중화문물을 빼앗아 잘 지키고 보전하였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오랑캐이지만 그들의 땅에는 여전히 중화의 유풍이 잘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가진 중화의 문물을 잘 배워 쓰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행히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시절을 당해서 천하 백성들이 변발을 하고 여진족의 옷을 입게 되었다. (중략) 그러나 그들의 제도까지도 팽개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박제가는 명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 우리가 당한 치욕을 복수하고자 한다면 중국을 힘써 배운 다음에 논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박제가가 배우자는 ‘중국’은 ‘청’이라는 외부의 존재인가? 여기서 말하는 ‘중국’은 오늘날의 민족국가 같은 개념의 중국이 아니라 ‘중화’의 문물과 제도를 말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옛날 중국 주나라의 제도로 대표되는 유교 문화를 말한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사실상 중화 문화의 담당자가 조선이 되어야 한다는 ‘조선 중화주의’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한족 왕조가 아닌 조선이 중화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중화 문화가 이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주체에겐 언제나 열려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중화’는 무국적이다. 박제가도 이러한 큰 조류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중국’을 배우자고 한 것을 외국의 것을 받아들여 내부를 개혁하자는 ‘개방론’의 시각으로 이해한다면 오해이다. 박제가 역시도 오랑캐와 중화의 명백한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조선 개혁의 모델은 이민족 국가인 ‘청’이 아니라 청에 남아 있는 ‘중화 문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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