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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조선 후기 국정 최고기관의 업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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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등록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비변사등록』은 국방과 군사에 관한 기밀 뿐 아니라 국정 전반을 총괄해 처리한 최고의 기관인 비변사(備邊司)에서 행한 매일의 회의 내용을 연대별로 기록한 자료이다. 비변사를 비국(備局)으로도 불렀기 때문에 ‘비국등록(備局謄錄)’이라고도 한다. 편찬기관인 비변사가 명종 대 정식 관청이 되면서 등록을 작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비변사등록』은 모두 소실되었다. 현재는 1617년(광해군 9)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비변사의 활동을 기록한 273책만이 규장각에 남아 있다. 『비변사등록』은 조선후기 국정 운영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기본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어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에 참고 자료로 이용되는 등 중요한 기록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 『비변사등록』의 편찬기관, 비변사

비변사는 16세기 초 군사력이 약화된 틈을 타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끊이지 않는 등 변방에서 국방에 관한 일이 발생하자 이를 처리하기 위한 기구의 필요성이 부각되어 임시로 설치되었다. 중종 대 왜구의 출몰이 잦아지고 비변사 도제조가 왜구 대책을 올리는 등 그 역할이 본격화되어 관료 기구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으며, 1555년(명종 10)에 이르러 정1품아문의 정식관청으로 발전하였다.

1592년(선조 25) 발생한 임진왜란은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변방의 긴급 사안을 처리했던 비변사는 임진왜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국방과 군사에 관한 기밀 뿐 아니라 국정 전반에 걸친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기구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비변사는 대신을 비롯한 문무 고위 관료들이 합좌 회의를 통해 정책을 심의하였다. 비변사에서 논의, 결정된 사항은 왕에게 보고되어 재가를 받으면 곧 시행되었다. 따라서 17세기 이후 비변사는 최고 정무 기구로 인식되었다.

비변사의 조직은 정식관청이 된 명종 대부터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 부제조(副提調), 낭청(郞廳)으로 구성되었다. 전임의정과 현임의정이 도제조를 겸임하였으며, 제조는 변방 지역의 정세를 잘 아는 대신으로 차출하되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의 판서,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대장, 개성(開城)과 강화(江華)의 유수(留守), 대제학(大提學)이 겸임했다. 부제조는 군사업무에 능통한 정3품의 관원으로 임명하여 상주하도록 하였다. 이들을 비변사당상으로 호칭했는데, 비변사에 상시로 출근한 유사당상(有司堂上)과 구관당상(句管堂上)이 있었다. 유사당상은 비변사의 모든 업무를 장악하여 공사(公事)를 전담할 뿐 아니라 관리의 인사문제, 병무를 주관하였다. 구관당상은 비변사의 군정, 재정, 교역 등의 사안을 주관하는 한편, 지방의 군정, 행정 등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낭청(郞廳)은 실무를 맡았는데 문관 낭청 4명과 무관 낭청 8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밖에 서리(書吏) 16명, 서사(書寫) 1명, 고지기[庫直] 2명, 사령 16명, 대청지기 1명, 문서지기 1명, 수직군(守直軍) 3명, 발군(撥軍) 3명이 있었다.

이러한 비변사는 국가통치를 총괄하는 기구로 그와 관련된 제반업무를 관장하였다. 먼저 비변사의 고유임무인 국방 문제에 대해서는 수도권 방위 및 남북변방의 방어, 대외정세 파악, 대외교역 사안을 조정하였다. 전정, 군역, 환곡 등 국가재정의 처리 또한 비변사의 중심 업무였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주요 관직의 인사권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비변사의 역할은 19세기 이후 세도정치기에 이르러 척신세력이 비변사의 요직을 독점하여 인사나 정무권을 장악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국왕의 권한 또한 위축되자 1865년(고종 2) 3월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타파와 왕정복고의 조치로 국정 의결권을 의정부로 이관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비변사는 혁파되었다.

3 비변사의 업무일지, 『비변사등록』

『비변사등록』은 비변사에서 처리한 각종 정책의 결정사항을 기록한 회의록이다. 비변사회의는 비변사자체에서 하는 주좌(籌坐)와 입궐해서 하는 빈청회의인 빈좌(賓坐)가 있었다. 주좌의 경우 수시로 열려 비변사의 업무에 관한 사항을 논의했으며, 빈좌의 경우 대신과 비변사당상이 정해진 일자에 빈청에서 회동하여 회의를 열었다. 이처럼 비변사의 대소사는 비변사회의인 주좌나 빈좌에서 처리되었다. 회의가 시작되면 서장(書狀)이나 상소문, 주요 논의사안 등을 대신들이 돌려 보고 논의한 후 결정되면 관인을 찍어 왕에게 아뢰었다. 변경(邊境), 외교, 내정 등의 사안과 각종 별단(別單), 사목(事目), 절목(節目) 등을 제정할 때에도 신중을 요해 어떤 경우 수개월간 회의를 하기도 하였다. 이때 비변사의 실무를 맡은 낭청이 비변사 회의의 내용과 의결과정을 작성하여 책으로 묶었는데, 이것이 『비변사등록』이다.

『비변사등록』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등록류(謄錄類)의 형태를 띠고 있다. ‘등록’은 국가기관에서 처리한 행정 사무를 기관마다 기록하여 후대에 참고할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의정부등록』, 『사헌부등록』, 『포도청등록』 등이 그러한 예이다. 현재 남아 있는 『비변사등록』은 필사본으로 1617년(광해군 9)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총273책이 규장각에 남아있다. 비변사가 정식 관청으로 된 명종 대부터 선조 이전의 등록은 전하지 않는다. 비변사가 설치된 초기부터 『비변사등록』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측은 하고 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비변사등록』이 단순한 비변사 회의 내용을 작성한 것이므로 작성방법 및 이의 보관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없다. 책의 표지에는 ‘비변사’, ‘비국 상(備局 上)’, ‘비변사 상(備邊司 上)’ 등 다양한 표제로 적혀있다. 또한 1년마다 1책을 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므로 ‘무오등록(戊午謄錄)’, ‘계유등록(癸酉謄錄)’, ‘임진등록(壬辰謄錄)’등 그해의 간지를 써서 표기하였다.

현존하는 『비변사등록』은 광해군과 인조대의 경우 결본이 많다. 광해군대의 경우 1616년(광해군 8) 11월, 12월 기사와 1617년(광해군 9), 1618년(광해군 10) 6월까지 일부기간만 살펴볼 수 있다. 인조대의 경우는 1624년(인조 2), 1634년(인조 12), 1638년(인조 16), 1641년(인조 19)부터 1649년(인조 27)의 기록만 제대로 확인할 있다. 이러한 『비변사등록』은 비변사가 1865년(고종 2) 의정부와 통합된 이후에도 1892년(고종 29)까지 계속 작성되었다.

4 『비변사등록』의 구성과 내용

『비변사등록』은 편년체(編年體) 형식에 의해 날짜순으로 기록하였다. 먼저 연월일과 날씨가 기재되고 내용을 좌목(座目)과 기사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매월 1일마다 당시 비변사에 참여하고 있는 도제조 및 제조 이하 당상과 낭청의 명단인 좌목을 기재하였다. 이것은 해당 달에 비변사에 소속된 관원들의 목록을 적은 것이다. 좌목은 도제조인 의정, 당상관 이상의 제조와 부제조, 실무를 담당하는 낭청의 순으로 기록하였다. 좌목의 기록방식은 먼저 직함을 쓰고 아래에 이름을 썼으며, 질병과 관련된 사안이나 조정의 일로 지방에 있는 경우 등 해당 인원에 대한 특별한 점을 세주로 기록하였다.

좌목에 이어 각종의 기사들이 수록되었다. 기사에는 계사(啓辭) 및 회계(回啓), 인견(引見), 절목류(節目類), 천망(薦望)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비변사에서 논의하고 결정한 내용을 왕에게 아뢰는 계사와 왕의 전교, 혹은 지방 감영의 장계, 변방장수의 치계(馳啓), 민간인의 상소 등이 비변사에 내려오면 이에 대해서 비변사가 답변하는 회계(回啓)의 내용이다.

비변사 계사의 주요 내용은 국방, 외교, 재정, 인사, 의례, 시무, 비변사 행정 등으로, 비변사의 업무와 관련된 것이다. 국방에 관한 계사로는 파병, 조련, 군기(軍器), 관방(關防), 진(鎭)의 설치, 보장지, 군적(軍籍), 군령, 군공과 처벌, 군사정책 등이 주요 내용이다. 외교는 사신파견 및 접대, 외교문서 처리, 표류인의 쇄환(刷還)문제, 대외무역 등에 관한 내용이며, 의례는 궁중 제향, 능침, 학교 및 궁궐 수리와 관계된 것이다. 재정은 양전, 군향(軍餉), 수세(收稅), 환곡, 둔전, 주전(鑄錢), 공물변통, 공명첩, 진휼, 경비절용, 면세, 면역 등에 관한 내용이다. 수령, 감사의 천거, 어사와 사신의 선발, 읍호의 치폐, 관직신설 등도 기록되었다. 비변사가 답변하는 회계의 경우 먼저 계를 올리는 관사가 비변사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어 회계를 하게 된 국왕의 전교나 관찰사의 장계 등의 주체 및 작성자를 밝힌 뒤 내용을 요약하고 비변사의 의견을 첨부하였다.

비변사에서 추천한 관원 후보자에 관한 기록도 수록되었다. 비변사가 행한 주요 관직의 후보자 추천권은 붕당정치기 인사 행정의 한 형태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조선시대 인사 행정의 실무는 이조와 병조에서 담당하였고, 국왕이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이 강화되면서 주요 관직에 대한 후보자 추천권을 비변사에서 행사하였다. 비변사에 의한 인사권 장악은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의 강화뿐만 아니라 정치 세력 집중에 크게 기여하였다. 『비변사등록』에는 후보자 추천 대상관직을 먼저 기록하고 후보자 명단을 나열한 천망단자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국왕이 신하들과 군국의 주요 사안을 논의하는 인견(引見)과 규칙의 조목에 해당하는 절목류의 내용이 수록되었다. 특히 절목류는 『승정원일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5 『비변사등록』의 자료적 가치와 의의

『비변사등록』은 비변사에서 국방과 군사에 관한 기밀 뿐 아니라 국정 전반에 관해 처리한 회의내용을 기록하고 후대 행정업무의 전례로 이용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매일의 기록을 작성한 것이 아닌 비변사회의가 개최된 날에만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1년에 한 책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비변사가 1865년(고종 2)에 폐지되었음에도 1892년까지 약 30년간 『비변사등록』이 기록되었다. 이것은 의정부가 폐지된 비변사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종전과 동일한 형식의 등록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비변사등록』은 편찬기관인 비변사의 변화양상 뿐 아니라 조선후기 사회, 경제적 모습을 살필 수 있는 내용들이 충실히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1차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특히 국토 방비와 관련된 기사 중 군복, 무기, 포로의 정황, 표류인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지 않는 『비변사등록』만의 고유 내용이다. 비변사의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재정이나 무역과 관련된 기사도 풍부하며 대외무역품 거래나 사신행차시 사용된 사행은(使行銀) 관련기사는 『비변사등록』에서만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별단(別單), 사목(事目), 절목(節目) 등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보다 더 풍부하게 담고 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편찬 시 기본 자료로 『비변사등록』을 참고했기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는 높게 평가되었다.

이처럼 『비변사등록』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과 상호 보완하여 조선시대 제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연대기 자료이다. 현재 『비변사등록』은 국보 제152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비변사등록』의 탈초 작업 및 국역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이를 전산화하여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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