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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승정원의 왕명 출납 기록, 조선의 역사서가 되다

1623년(인조 1) ~ 1894년(고종 31)

승정원일기 대표 이미지

승정원일기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승정원일기』는 승정원(承政院)에서 처리하는 모든 일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문헌이다. 승정원은 왕명(王命) 출납(出納)을 맡았던 관청이었고, 그에 따라 『승정원일기』에는 국정 전반이 기록되어 있다. 총 3,243책으로, 글자 수가 2억 4,300만 자에 달한다. 분량만으로는 조선왕조실록(총 888책, 5,400만 자)의 다섯 배에 달할 정도로 방대하다.

『승정원일기』는 적어도 세종대부터 편찬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세종실록』 편찬시 찬술 업무를 맡기 꺼려했던 사관들이 『승정원일기』만을 베껴 옮겨서 책임을 면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세종대에 이미 『승정원일기』가 편찬되었음을 알려준다. 이후 기록에서도 세종대의 『승정원일기』를 고증하여 관련 사실을 보고하라는 내용이 몇 차례 더 보인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관제가 변경됨에 따라 일기의 명칭도 변하였다. 『승선원일기(承宣院日記)』는 1894년(고종 31) 7월부터 10월까지, 『궁내부일기(宮內府日記)』는 1894년(고종 31) 11월부터 1895년(고종 32) 3월까지, 『비서감일기(秘書監日記)』는 1895년 4월부터 10월까지와 1905년 3월부터 1907년 10월까지, 『비서원일기(秘書院日記)』는 1895년 11월부터 1905년 2월까지, 『규장각일기(奎章閣日記)』는 1907년 11월부터 1910년 8월까지의 기록이다. 일기 명칭은 변화했지만, 이 역시 『승정원일기』에 속한다.

현재 『승정원일기』는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까지 288년 동안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전기의 기록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조선 후기 정국 운영에 대한 가장 풍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2 승정원과 승지

조선시대 승정원은 국왕의 비서기관으로, 주로 왕명의 출납(出納)을 담당하였다. 즉, 국왕의 명령을 해당 관서·관원에 전달하고, 각 관서·관원의 보고와 의견을 검토하여 국왕에게 전하는 업무이다.

승정원은 국정 운영의 주체가 되기도 했는데, 의정부, 육조 등과 함께 정국의 쟁점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승정원의 여섯 승지(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는 그들의 고유 업무 외에 다른 관직을 겸하는 예가 많았다. 모두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그들은 경연관, 춘추관, 홍문관, 상서원, 내의원, 상의원, 사옹원, 전옥서 등 다양한 관서의 책임을 맡았다. 일례로 승지는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을 겸하면서 국왕의 학문 증진에 기여하였으며, 경연에서 논의되는 각종 현안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였다.

승정원에는 승지 외에 정7품 주서(注書) 2명이 있다. 조선 전기에 주서는 2원(員)이었지만, 선조대에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1원을 추가하여 총 3원이 되었다. 그리고 서리(書吏)와 사령(使令) 등이 있다.

3 『승정원일기』는 어떻게 기록되었나

『승정원일기』는 초서(草書)로 기록된 필사본이다. 일기를 기록하는 업무는 승정원의 주서가 맡았다. 주서는 매일 출근하여 승정원을 거쳐 가는 각종 문서를 일기로 정리했다. 또한 각종 회의가 열렸던 정사 자리와 경연 등에도 참석하여 회의 혹은 대화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따라서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의 왕명 출납 기록이지만, 동시에 조선의 역사를 매우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문헌이기도 하다.

주서는 자신이 근무한 날의 일기를 작성하여 1개월 단위로 정리하였다. 대개 1책이나 2책으로 묶어 다음달 20일 전에 승정원으로 납입하였다. 그러면 이것을 승지들이 다시 검토한 후 말일 전에 국왕에게 보고했다. 평상시에 국정 운영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는 주서들이 논의 내용을 모두 받아 적을 수가 없기 때문에 대략의 내용만 기록하고 나중에 정리하여 제출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서들이 기록해야 하는 양이 매우 많았다. 따라서 이를 제대로 적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서 외에 관련 사실을 기록하는 사람은 사초(史草) 기록을 맡은 사관도 있었는데, 간혹 이들 사이에 기록이 서로 맞지 않을 때도 있었다. 사실상 주서의 업무는 매우 고역이었다. 신중하게 기록하지 않는 경우, 남을 시키는 경우, 기한 내에 바치지 않는 경우 등 주서의 직무 태만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어느 문건보다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기는 대체로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여느 일기처럼 날짜와 날씨를 적었다. 둘째, 좌목(座目)으로, 그날 근무한 승지와 주서(注書)의 명단을 썼다. 셋째, 국왕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쓴 후에 상참(常參)과 경연(經筵) 등의 시행 여부와 거기에 관료들이 얼마나 참석했는지를 기록하였다. 넷째, 그날 승정원에서 출납한 문서를 베껴놓았다. 다섯째는 국왕과 신하의 언동에 대한 기록이다.

1746년(영조 22)에 『승정원일기』의 개수를 위해 일기청(日記廳)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서 마련한 개수일기범례(改修日記凡例)에서 『승정원일기』의 작성 원칙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국왕에게 보고되는 조항은 중요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기록하였다. 국왕의 전교(傳敎)와 대간(臺諫)에서 아뢴 내용도 전부 서술하였다. 다만 각사(各司)의 초기(草記)는 훗날 참고할 만한 것만 쓰고, 상소 내용은 주요한 요점만 서술하는 등의 원칙이 있었다. 신하들의 국왕에 대한 문안(問安)을 쓰고, 관상감에서 보고하는 재이(災異)는 당일에 써야 한다는 점도 정해져 있었다.

4 『승정원일기』의 소실과 개수

『승정원일기』는 한 부를 작성하여 승정원에 보관해 두고 각종 제도의 연혁이나 고사(故事) 등을 살펴볼 때 참고하였다. 왜 한 부만 만들어 두었는지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분량이 방대하여 복사본을 만들 여력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소실될 것을 염려하여 4∼5부의 복사본을 마련해 두었던 실록의 사례를 견주어 보면 복사본을 만들지 않았던 이유가 더 궁금해진다. 당대 사람들이 실록보다 『승정원일기』를 덜 중시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실록 보관은 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반면, 『승정원일기』는 관리직을 따로 두지도 않았고 제대로 포쇄(曝曬)하지도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결국 『승정원일기』는 크고 작은 사건을 겪으며 여러 차례 불에 탔고, 그때마다 소실된 『승정원일기』를 개수하는 작업이 행해졌다. 그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실록을 비롯하여 영조대의 『개수일기등록(改修日記謄錄)』, 고종대의 『일기청개수등록(日記廳改修謄錄)』 등에 기록되어 있다.

1721년(경종 1) 이전의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이괄의 난, 1744년(영조 20) 화재 등을 겪으며 소실되었다. 그 중 1623년(인조 1)부터 1721년(경종 1) 이전의 기록은 1746년(영조 22)∼1747년(영조 23)에 일기청을 설치하고 조보(朝報,, 邸報), 등록(謄錄) 등의 자료를 참고하여 개수하였다. 하지만 광해군 이전의 기록은 전거가 될 만한 사료가 없어서 복원하지 못했다. 1888년(고종 25)년에도 화재가 발생하여 1851년(철종 2)부터 1888년(고종 25)까지의 일기가 소실되었는데, 이 부분도 복원되었다.

5 『승정원일기』의 가치

『승정원일기』는 실록과 더불어 조선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주요 문헌이다. 두 문헌 모두 국왕을 중심으로 전개된 정사를 매일 매일 기록하여 연대기로 엮은 사서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두 사료의 위상과 성격은 상이하다. 우선 조선왕조에서 가장 중시했던 문헌은 실록(『태조실록』∼『철종실록』)이다. 실록은 후대의 역사적 평가를 목적으로 편찬되었고, 수정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사고(史庫)에 보관되면 열람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별한 경우에 몇 차례 꺼내 보기는 했지만, 원칙적으로는 열람 불가였다.

반면, 『승정원일기』는 당대의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편찬된 문헌이다. 정국 운영에 필요한 모든 사실은 수시로 열람할 수 있었다. 간혹 신하들의 언사가 바뀌면 그 사실을 확인하는 자료로도 쓰여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근거가 되었고, 복잡한 각종 의례의 시행 절차를 따져보는 전거가 되기도 했다. 또한 열람이 자유로운 편이었기 때문에, 일부 기사의 수정이나 삭제도 종종 행해졌다. 예컨대 1776년(영조 52) 집권 말기의 영조는 『승정원일기』의 사도세자(思悼世子) 관련 기사를 세초(洗草)하라고 명하였다. 실록이 있으니 굳이 일기에 사도세자 관련 기록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영조의 설명이었다.

『승정원일기』의 내용은 실록보다 광범위하지는 않지만, 매우 구체적이다. 또한 실록은 조선 전기보다 후기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부실한 편인데, 그 부족한 점을 『승정원일기』가 보완해주고 있다. 게다가 조선 말기의 경우는 『승정원일기』의 사료적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종실록』, 『순종실록』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했기 때문에 왜곡이 많다. 따라서 지금의 역사가들은 고종대, 순종대의 역사를 파악할 때 실록보다는 『승정원일기』의 내용을 더욱 신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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