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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장엄한 왕실의 사당, ‘국가’의 다른 이름

1394년(태조 3)

종묘 대표 이미지

종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종묘(宗廟)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훈정동)에 위치한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조선 왕실의 사당이다. 1963년 1월 18일에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었고 199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울러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인 종묘제례악과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제례가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2 종묘의 의미

원래 종묘란 조상신을 제사 지내는 공간으로 일종의 조상숭배 관념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연원은 고대 중국 주나라 때까지 올라간다. 고대 중국인들은 귀신도 살아있는 사람처럼 먹고 마시며 잠자는 등의 일상생활을 한다고 믿었다. 제사란 이 귀신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행위이고 그 장소로서 사당, 즉 묘(廟)를 세웠던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 선조의 혼령이 내려와 의지하는 곳이 신주인데, 신주 각각은 자신만의 독립된 거주공간을 가지며 이를 묘(廟) 혹은 묘실(廟室)이라 한다. 종묘는 왕조의 창업자와 그 후계들의 공간으로, 창업자를 비롯한 극히 제한된 수의 통치자만이 입묘할 수 있는 배타적 공간이다. 국가의 등장과 더불어 종묘는 천명을 받아 국가를 세운 창업자와 그 후손이 이어가는 왕조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자리 잡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국가’를 뜻하는 대명사로 일컬어졌고, 나라를 세웠을 때 가장 먼저 건립하는 것이 종묘였다. 요컨대 종묘란, 역대의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왕실의 사당이다. 다른 말로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3 우리나라 종묘의 흐름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삼국 시대부터 기록이 확인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의 신으로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시는 가묘적 성격을 띠는 원묘(原廟)가 함께 존재해 왔는데, 묘제의 이러한 특징은 이미 신라 시기부터 보이고 있다. 원묘란 이중으로 거듭 세운 묘라는 뜻으로 이미 정묘(正廟)인 종묘가 있는데 다시 세운 묘를 말한다. 신라는 종묘 외에 신궁(神宮)이 있었고, 고려 시대는 태묘(太廟) 외에 예조묘(藝祖廟)와 경영전(景靈殿)이 있었다.

신라의 경우 소지마립간 9년에 시조가 탄생한 곳에 신궁이 세워져 제천 의례와 새로운 왕의 즉위의례를 거행하였다고 하였다. 신궁이 건립되기 전에는 시조묘(始祖廟)에서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신궁이 건립되면서 시조묘는 왕실의 조상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고려의 경우, 예조묘를 두었다고 하는데 예조(藝祖)란 역대 태조의 통칭이다. 관련하여 『고려사』에는 왕이 신하들을 보내 예조묘에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 명종 20년(1190) 10월에 서도(西都)에 사신을 보내어 예조묘에 제사하였는데, 그때까지도 의관이 그 사당에 보관되어 있어 후대의 왕들이 매년 연등과 팔관회 때에 신하들을 보내 제사지내게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도 국초 한양 도성을 계획할 때 궁궐, 성곽보다 종묘를 먼저 구상하였다. 조선은 건국하면서, 천자는 7대의 묘를 건립할 수 있고 제후는 5대의 묘를 건립할 수 있다는 ‘천자칠묘(天子七廟) 제후오묘(諸侯五廟)’와 ‘우사직 좌종묘(右社稷左宗廟)’,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따라 종묘를 건립하였다.

4 조선 시대의 종묘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천자는 칠묘, 제후는 오묘, 왼쪽에 종묘를 세우고 오른쪽에 사직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그것이 전조(前朝)에서는 소목(昭穆)의 차례와 당침(堂寢)의 제도가 법도에 합하지 않고 또 성 밖에 있으며, 사직은 비록 오른쪽에 있었으나 그 제도는 옛날의 것과 어긋남이 있다. 예조에 명하여 상세히 구명하고 의논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게 할 것이다.” 라고 하여 궁의 왼쪽에 종묘를 배치하고 제후국의 제도에 따라 오묘제(五廟制)로 정하였다. 종묘 정전은 동당이실(同堂異室)의 구조에 대실(大室) 7간(間)으로, 안에 석실(石室) 5간을 만들고 좌우의 익랑(翼廊)은 각각 2간씩이며, 공신당(功臣堂) 5간, 신문(神門) 3간, 동문 3간, 서문 1간 등의 규모로 건립하였다. 이는 전조(前朝) 고려의 태묘제도(太廟制度)를 참고한 것이었다. 즉 조선의 종묘 정전은 동당이실 서상제(西上制)를 따라 대실 7간에 좌우익실 2간을 구성으로 하여 건립하였다. 동당이실이란 한 사당 아래 실(室)만 달리 하여 각각의 신위를 모신 것이며 서상제는 서쪽 끝에 제일 높은 신주를 두고 왼쪽(동쪽)으로 차례대로 신위를 봉안하는 제도이다. 이 체제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그대로 반영되어 명문화되었다.

태종 8년 태조가 승하하자 종묘 5실에 신의왕태후와 함께 부묘 되었는데, 다음번에 정종이 승하하여 부묘할 시점이 되자 문제가 발생한다. 보통 정상적인 왕위의 부자승계에서는 다음 왕이 승하한 왕의 아들이었다. 제후 5묘는 불천위 태조 1묘와 더불어 왕의 4대 선조를 모시게 되어 있는데, 새로 신주가 들어오면 가장 선대의 신주는 종묘에서 빼도록 하였다. 이를 조천(祚遷)이라 한다. 그런데 태종은 정종과 형제관계였으므로, 정종과 같은 4대조의 신주를 모셔야 했으므로 조천할 신주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 정종의 신주가 새로 종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종을 종묘에 부묘할 경우 6묘가 되어 제후 5묘에 위배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중국의 선례를 찾아 논의하다 송(宋) 별묘(別廟)의 제도를 두어 태조의 추존 4대조를 별묘에 모신 예를 보고 이 예에 따르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 때 상왕이었던 태종은 옛 제도를 따라 대실의 서쪽에 별묘의 전각을 세우고 전각 이름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편안하다는 뜻을 지닌 ‘영녕(永寧)’으로 정하였다. 이후 태조의 4대조 신위는 새로 신주가 종묘에 부묘될 때마다 차례대로 조천되어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졌다.

세실이란 대대로 그 실에 신주를 모신다는 뜻이다. 덕이 높은 군주의 신주는 옮기지 않고 계속 종묘 정전에 모시는 불천지주로 삼는다는 내용인데, 이는 곧 후대인들이 선대왕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였다. 본래 종묘의 원형적인 제도에서는 불천지주를 모시는 세실은 태조 하나였으나, 조선 시대에는 공업이나 덕이 높은 왕의 신주를 조천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불천지주의 세실이 늘어갔다. 그리고 이러한 불천지주 세실의 증가는 종묘가 처음 건립 이후 자꾸 증치되어 현재와 같이 좌우로 긴 건물을 갖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를 지나며 그 모습과 제도를 이루어가던 종묘는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5월 1일에 왜군에 의해 소실되는 변을 당한다. 왜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에 선조(宣祖)는 이미 도성을 비우고 피란하였는데, 이 때 국왕과 함께 도성을 빠져나간 성물(聖物)이 바로 종묘의 신주들과 사직의 위판(位版)이다. 이 때 신주와 위판들은 개성과 평양, 황해도와 강원도, 정주 등 전국을 전전하다가 이듬해 임금이 피란에서 돌아왔을 때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도성에는 이미 궁궐도 종묘도 모두 불타버린 후였는데 이때 월산대군이 살던 집을 임시 궁궐로, 영의정을 역임한 심연원의 집을 임시 종묘로 삼게 되었다. 곧 조정에서는 궁궐의 영건에 앞서 종묘 중건에 대한 논의가 먼저 이루어졌다. 국가를 상징하고 왕실 의례의 정점에 자리한 종묘의 정비부터 서두르는 것은 이 시기 위정자들의 당연한 인식이었다. 그러나 전란 뒤끝의 어려운 사정으로 인해 빠른 복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1608년(선조 41)에야 그 복구를 시작하여 완료하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다시 한 번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위기를 맞는다. 청군의 침입으로 인조의 파천이 결정되면서 왕실은 다시 한 번 궁을 버리게 되는데 이때 가장 먼저 피란을 시킨 것도 역시 종묘의 신주와 사직의 위판이었다. 피란길에 오른 신주와 위판은 강화도로 보내져 행궁의 신묘(新廟)에 봉안되었고, 인조와 세자는 적병의 요격을 염려하여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병자호란은 결국 인조가 청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는 치욕을 겪으며 끝이 났는데, 그 사이 청군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사당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신위가 손상되고 심지어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신위를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또한 복구되었던 도성의 종묘 역시 훼손되었다. 때문에 조선은 종묘를 복구하는 동시에 손상된 신위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 유례없는 일을 겪게 되었다.

복구된 종묘는 몇 차례에 걸쳐 증축되는데 1668년(현종 8)에 영녕전 익실을, 1726년(영조 2)에 종묘 정전의 신실을, 1836년(헌종 2)에 종묘 정전의 신실과 영녕전 익실을 거듭 증축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종묘는 1836년까지의 증축을 거쳐 이루어진 모습이다.

5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를 ‘신혼체백(神魂體魄)’이라 하는데 신혼은 신주에 기대고 의지하여 사당에 모셔지고 체백은 릉(陵), 원(園), 묘(墓) 등에 모셔진다. 여기서 혼백이 깃든 신주를 봉안하는 사당과 체백을 모신 무덤에서 음식을 바치며 정성을 다하는 행위가 제사였다. 유교경전인 『논어(論語)』에서는 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마치 살아있을 때처럼 할 것을 거론하였는데, 돌아가신 뒤에도 선조에게 효(孝)를 계속하는 뜻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왕의 조상을 섬기는 종묘는 백성에게 왕이 효(孝)를 솔선수범한다는 상징성을 지닌다. 이 때문에 유교문화권에서 사당과 무덤, 나아가 종묘는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전통시대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국가’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으므로 그곳에서 지내는 제사 역시 제사의 등급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대사(大祀)로 분류하여 매우 중시하였다. 조선 시대의 국가 제사는 대사,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 중 종묘와 영녕전, 사직이 대사에 해당되었다.

이렇게 종묘에서 이루어지는 제례의식이 종묘제례(宗廟祭禮)이다. 조선 시대에는 종묘제례에 국왕을 비롯하여 세자와 문무백관, 종친 등이 모두 종묘에 나와 제향을 올렸다. 혹 왕이 참여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때에는 세자나 영의정이 그 역할을 대행하기도 하였다. 종묘제례는 1975년 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종묘제례가 진행될 때 연주하는 음악과 노래, 무용을 아울러 지칭한다. 1964년 무형문화재 제 1호로 지정되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오랜 시간 지속해온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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