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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擇里志]

조선시대 인문 지리서의 시초

1751년(영조 27)

택리지 대표 이미지

택리지 서문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택리지』는 1751년(영조 27) 이중환(李重煥)이 저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지리서라 할 수 있다. 각종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어 『팔역지(八域誌)』, 『팔역가거지(八域可居地)』, 『형가승람(形家勝覽)』,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등 다양한 이름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택리지』는 1책으로 구성되었고, 내용은 이중환이 쓴 서문을 비롯하여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총론(總論), 발문(跋文)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전국 각 지역의 풍수지리적 특성과 함께 자연과 인간 생활과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어 인문 지리서의 시초로 평가받고 있다.

2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은 1690년(숙종 16)에 출생하였다. 자(字)는 휘조(輝組)이며, 청담(淸潭)·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1682년(숙종 6)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예조참판,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이진휴(李震休)이며, 어머니는 함양 오씨 오상주(吳相冑)의 딸이다. 또한 이중환은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재종손(再從孫)이다.

그는 1713년(숙종 39) 24세의 나이로 증광 병과(增廣丙科)에 합격한 후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 병조정랑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중환은 관직에 있으면서 정변에 휘말리게 되었다. 1722년(경종 2) 이중환은 김천찰방 재임 시 목호룡(睦虎龍)에게 역마(驛馬)를 빌려 주었다고 지목되어 탄핵을 받았던 것이다. 영조가 즉위해서는 목호룡이 임인옥사 때의 수공(首功)을 이중환에게 돌려 여러 차례 국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목호룡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아 1726년(영조 2) 12월, 사형을 감등하여 절도(絶島)로 정배되었고 1727년(영조 3) 10월에 참여한 증거가 없어 풀려났다. 하지만 동년 12월에 사헌부의 논계(論啓)로 다시 먼 변방으로 정배되었다.

이처럼 이중환은 당쟁에 휘말려 유배된 이후 죽을 때까지 전국 8도를 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이중환은 전 국토의 역사와 지리, 사람들의 주거 등을 기록하였고, 이를 『택리지』라는 결과물로 내놓았다.

『택리지』의 저술 연대는 이중환이 쓴 발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발문 끝에 “백양초하상완 청화산인서(白羊初夏上浣 靑華山人書)”라고 썼는데, 백양은 1751년(영조 27)이며, 이중환이 61세 되던 해이다. 이중환은 자신의 역작 『택리지』를 서술한 후 5년 뒤인 1756년(영조 32)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사민(四民)과 팔도(八道)를 말하다

이중환은 『택리지』의 첫 부분인 사민총론에서 사(士)·농(農)·공(工)·상(商)이 나오게 된 원인과 내력을 서술하였다. 그는 옛날에는 사대부가 따로 없고 모두 민(民)이었으며, 민은 다시 사(士)를 비롯하여 농(農)·공(工)·상(商)으로 분류되었다고 하였다. 이때 사(士)인 사람이 어질고 덕(德)이 있으면 왕께서 벼슬을 주었고, 벼슬을 받지 못한 자는 농·공·상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사대부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추구하는 것도 달라져 사대부의 지위는 더욱 높아졌고, 농·공·상은 천한 신분이 되었다고 하였다.

팔도총론에서는 평안도를 시작으로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의 순으로 전국 8도의 지리적 위치와 지형, 역사, 산맥 및 하천, 기후 등의 자연환경과 생업, 물산, 경치, 취락, 그 지역과 연관된 인물과 사건, 풍속을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다. 또한 도내를 하천과 산맥을 중심으로 다시 구분하였다. 일례로 청천강을 경계로 평안도를 청북(淸北)과 청남(淸南)으로, 멸악산맥을 경계로 황해도를 이남과 이북으로 구분하였다. 충청도의 경우는 차령(車嶺)을 기준으로 이북은 경기에, 이남은 전라도에 가깝다고 서술하였다.

지역적 특색과 아울러 사대부에 대해서도 나라의 습속이 문벌을 중시하게 됨에 따라 서울 사대부는 서북지방민과 혼인을 하거나 친구로 사귀지 않았으며, 서북인 또한 서울 사대부와 동등하게 여기지 못했다고 서술하였다. 그리하여 서북 양도에는 사대부가 없게 되고, 서울 사대부들도 그 지역에 가서 사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4 살 만한 곳에 대한 이야기, 복거총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살기 좋은 곳의 기준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살만한 곳을 선정하는 기준으로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를 조건으로 들어 서술하였다. 이중환은 이 네 가지 요소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이상적인 거주지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먼저 지리는 그 지역의 풍수(風水)를 의미한다. 이중환은 지리를 논하는 데 있어 우선 수구(水口)를 보고, 다음으로 들의 형세를 보며, 순차적으로 산의 형태, 흙의 빛깔[土色], 조산(朝山)과 조수(朝水)를 봐야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집터는 수구가 꼭 닫히고, 그 안에 펼쳐진 들을 유심히 살펴본 후 구해야 하며, 토질은 사토(砂土)로 굳고 촘촘하면 물도 맑고 차기 때문에 집터로 살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만약 흙이 붉은 찰흙과 검은 자갈이 있거나 누런 질흙이면 죽은 흙으로 판단하고 물 또한 좋지 못하므로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하였다.

아울러 조산에 이상한 형태의 돌로 된 봉우리가 있거나, 비뚤어진 모양의 외봉우리가 있는 곳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또한 봉우리의 형상이 무너지고 떨어지는 것 같거나 엿보고 넘겨보는 모양이 있는 곳, 산 위나 밑에 괴이한 돌과 바위가 보이는 곳, 긴 골짜기로 된 충사(沖砂)가 전후좌우로 보이는 곳도 이중환은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하였다. 조수는 물 너머의 물을 말하는 것인데, 작은 냇물이 역으로 흘러드는 곳이 좋은 곳이라고 하였다.

생리는 생활하는데 이로움이 되는 지리적 위치를 말한다. 따라서 벼농사와 목화 재배에 유리한 비옥한 토지, 해상과 육상의 교통이 편리하고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어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강조되었다. 이중환은 전국에서 가장 기름진 땅으로 전라도의 남원(南原)·구례(求禮)와 경상도의 성주(星州)·진주(晋州) 등을 꼽았다. 특히 경상도의 경우 좌도(左道)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지만, 우도(右道)는 기름지다고 하며 좌우도의 차이를 언급했고, 전라도에선 지리산 주변이 가장 기름지다고 평했다. 반면, 강원도의 영동과 함경도는 땅이 메마르고, 평안도의 경우 산중 고을은 땅이 메마르나, 바닷가 주변은 기름진 것이 충청도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목화는 영남과 호남에서 가장 잘 되며, 특산물로 이득을 얻을 수 것은 진안(鎭安)의 담배, 전주(全州)의 생강, 임천(林川)과 한산(韓山)의 모시, 안동(安東)과 예안(禮安)의 왕골(龍鬚)이 라고 하였다. 물자를 교류하는 데 있어서는 조선의 경우 산이 많고 들이 적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수레의 통행이 어려워 상인들이 말을 이용하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데 반해 이익이 적다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그 방편으로 배로 운반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며, 각 도 각처에 배가 통행할 만한 강과 항구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인심에서는 풍속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팔도 인심을 비교하여 기록하였다. 이중환은 “마을 인심이 착한 곳이 좋다. 착한 곳을 가려서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랴”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인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옳은 풍속을 가리지 않으면 자신에게만 아니라 자손들도 반드시 나쁜 물이 들어서 그르치게 될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살터를 정하는 데에 그 지방의 풍속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전국 팔도의 인심에 대해서 평안도가 가장 순후하고, 경상도가 다음으로 풍속이 진실하다고 하였다. 반면, 함경도는 오랑캐 땅과 경계에 있으므로 도민의 성질이 강하고 사나우며, 황해도는 산수가 험한 까닭에 사납고 모질다고 파악하였다. 또한 강원도민은 산골인 지형적 특징으로 어리석고, 전라도민은 간사함을 숭상하여 나쁜 데 쉽게 움직인다고 했다. 경기도의 경우 도성 밖 백성들은 재물이 보잘것없고, 충청도는 세도와 재리만 좇는다고 파악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중환은 우리나라의 주요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를 살펴 이름난 산수를 논하였다. 그는 집 근처에 유람할 만한 산수가 없으면 정서를 함양할 수 없음을 지적하며, 땅이 기름진 곳을 고르면서 10리나 반나절 거리 이내로 산수 좋은 곳을 매입해 두고 그 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돌아오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5 택리지, 조선시대 종합적인 인문지리서

이중환은 붕당 간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인 18세기 초반에 정계에서 밀려난 뒤 전국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경험은 조선 전국의 지리에 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그 결과 『택리지』를 저술할 수 있었다. 기존의 지리서가 각 군현의 지리적 특성과 토산, 유적 등을 적어 놓았다면 『택리지』는 사대부의 역사를 비롯하여 한반도의 인문지리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과 사람과 자연 간의 상호 작용, 이에 대한 이중환 개인의 생각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전국 각 도의 인심을 자연환경과 결부시키고, 배산임수의 주거입지를 과학적인 입장에서 해석하였으며, 생활권이라는 시각에서 각 지역을 접근한 점 등은 현대적 의미의 지리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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