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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훈민정음, 우리가 모두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이유

1446년(세종 28)

훈민정음 대표 이미지

세종어제훈민정음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훈민정음(訓民正音)’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조선의 4대 왕인 세종(世宗)이 1443년(세종 25) 창제한 글자의 공식 명칭으로 오늘날 흔히 한글이라 부르는 우리말 표기체제이다. 다른 하나는 이 새로운 글자를 설명하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1446년(세종 28) 정인지(鄭麟趾) 등 집현전 학사들이 집필한 한문 해설서의 제목이다. 이 책은 해례(解例)가 붙어 있어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이라고도 한다.

세종대왕이 새로 만든 글자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뜻은 『월인석보(月印釋譜)』의 책머리에 실려 있는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에서 ‘훈민정음’의 뜻을 주석하기를 “訓은 칠 씨오 民 百姓이오 音은 소리니 訓民正音은 百姓 치시논 正 소리라”라고 하였으니, 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이다.

2 우리 글자를 만들다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실생활에서 쓰는 말인 구어(口語)와 그 말을 문자화 할 때의 글인 문어(文語)가 전혀 다른 이중적인 언어생활을 해 왔다. 여기서 비롯된 불편함은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이두, 구결, 향찰 등과 같은 독특한 차용표기 체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차용표기 체계가 아무리 발달해 있어도 말과 글이 다른 문자생활은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말과 글이 달라 겪는 불편은 훈민정음 창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세종은 『훈민정음』해례본 어제서문(御製序文)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훈민정음 창제의 이유를 스스로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문 글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완성된 글자에 대해서는 『훈민정음』 뒤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에 그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정인지는 세종이 만든 28자는 그 전환이 끝이 없지만 배우기는 매우 쉬워 지혜로운 자는 하루 만에 배울 수 있고, 어리석은 자도 열흘이면 모두 익힐 수 있는 글자라고 하였다. 또한 바람소리나 동물소리까지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글자라고 하였다.

말과 글이 일치하고 자연의 소리나 외래어까지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우리말 표기수단이 생긴 것은 우리 문자생활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 실정에 맞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고 사용한다는 사안의 중대함에 비해 그 창제 과정과 관련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당대의 『세종실록(世宗實錄)』에도 언문을 만들고 훈민정음이라 이름 하였다는 1443년(세종 25) 기사 와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는 1446년(세종 28)의 기사 두 건 정도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 기사들을 살펴보았을 때, 세종은 1443년에 28개의 문자를 만들고 간략한 예의(例義)를 들어 훈민정음의 기본 틀을 완성하고 이후 3년 동안 집현전 학사 정인지·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의 8인과 함께 보완하고 글자의 이론적 근거를 해설하여 1446년 9월 『훈민정음』(일명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국보 제70호인 동시에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3 훈민정음, 그리고 언문

한편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언문’은 1443년 세종이 만든 28자의 음소문자를 지칭하는 말이며, ‘우리말(언, 諺)을 적기 위한 문자’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은 새로 만든 문자가 한자음 등 외래어까지 표기할 수 있는 표음문자라는 뜻이 함의된 공식 호칭이었는데, 이후에 종종 언문이라는 용어와 혼용되었다. 이 ‘언문’의 의미에 대해 ‘훈민정음을 비하한 말’이라거나 ‘훈민정음 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였다’는 이해가 있기도 하나 이는 근거가 빈약한 것으로 관련 학계에서 비판받는 주장이다. 『세종실록』 세종 25년 12월 30일 기사에서 ‘언문 28자를 만들고 …… 이를 훈민정음이라 한다 ’는 기사가 나오고, 세종 스스로도 ‘언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언문, 즉 한글은 중국의 한문을 숭상하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반적인 표기수단으로 수용되지 못했고 이러한 풍조는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다.

4 글자창제 반대여론을 물리친 세종의 의지

한문을 향유하는 계층이었던 조선의 지식인층은 한자를 매개로 한 문자언어의 사용에 큰 문제의식이 없었으므로, 우리말 표기수단을 만들기 위한 세종의 시도는 순탄치 못했다. 1443년 28개의 글자를 만들고 이어 새 운서(韻書)를 편찬하는 작업 등을 진행하지만 지식인층은 새 문자 창제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정황은 1444년(세종 26) 2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를 위시한 집현전 학사들이 공동으로 올린 상소에서 극렬하게 드러난다. 이 상소에서 우리 글자를 만들면 안 되는 이유를 여섯 가지 조목에 걸쳐 나열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조선이 새 문자를 만든 것은 중국을 섬기고 중화(中華)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 둘째,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과 같이 모두 오랑캐라는 것, 셋째, 신라 설총의 이두는 한자를 빌어 토씨에 사용하므로 이두를 쓰려면 한자를 익혀야 하니 바람직한데다 지금껏 폐단 없이 잘 사용하여 왔는데, 한자를 몰라도 배우기 쉬운 언문을 시행하면 관리(官吏)가 되려는 사람들조차도 한자를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니 성리학을 연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원래 이런 글자가 있었더라도 없애자고 해야 할 판에 학문과 정치에 유익함이 없는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려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것, 넷째, 관에서 형벌을 줄 때의 일을 이두와 한자로 쓰면 글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이 원통함을 당할 수 있다고 하나 말과 글이 같은 중국에서도 그런 원통함은 있으며 이는 관리가 공평한 인물인가의 문제이지 말과 글이 달라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 다섯째, 많은 신료에게 의견을 물어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것을 관리 10여 명에게만 맡기고 국가의 정사를 의정부에 미루면서까지 글자를 만드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 여섯째, 설사 언문이 유익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만드느라 왕의 학문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위 상소의 대표로 이름을 올렸던 최만리는 이 상소를 계기로 관직생활을 마감하고 낙향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세종의 문자 창제 의지가 확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위와 같은 반대 논리들은 뒤집어 보면 세종이 왜 우리 글자를 만들고자 했는지 그 의도도 잘 드러나고 있다.

5 훈민정음을 해설한 책, 『훈민정음(訓民正音)』

세종은 우리 글자 훈민정음을 만들고, 이 문자를 만들게 된 원리와 이론적 근거, 실제 운용 예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책 『훈민정음』을 만들도록 하였다. 세계 문자사에서 문자를 만들고 그 원리 등을 기록한 설명서가 함께 있는 경우는 훈민정음의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이 『훈민정음』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세종이 만든 문자 훈민정음에 대한 해설서로 집현전 학사 정인지·신숙주·성삼문·최항·박팽년·강희안·이개·이선로 등이 참여하여 1446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한문으로 쓰인 목판본으로, 훈민정음에 대한 자세한 해설인 「해례(解例)」가 들어있어 『훈민정음 해례본』, 『해례본』이라 불리며 『훈민정음 원본(原本)』 이라고도 불린다. 장수 33장에 광곽크기 세로 22.9cm, 가로 16.9cm에 전체 1책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수백 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1940년 7월 경상북도 안동군 주하리의 이한걸씨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간송 전형필이 입수하여 그 서재로 들어갔다가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훈민정음』이라고 부르고 국보 제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책이 바로 이 『해례본』이다.

이 『훈민정음』, 일명 『해례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세종이 친히 지은 서문(序文)(어제서문, 御製序文)과 새 문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 두 번째 부분은 정인지 등 신하들이 기술한 해례(解例), 세 번째 부분은 정인지의 서(序)이다.

첫 부분은 흔히 「훈민정음 예의(例義)」 혹은 「예의」라고 불리는데, 정인지의 서문에서 “계해년(1443)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를 처음으로 만들고 간략하게 예의(例와 義, 보기와 뜻)를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고 한 데서 가져온 용어이다. 세종이 직접 지은 이 「예의」 부분에는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적을 밝힌 어제서문, 28자의 글꼴과 그 음가 및 병서, 연서, 부서, 종성, 성음, 사성에 대한 규정이 담겨있다.

두 번째 부분은 「해례」라고 불리는데, 이 부분이 들어있는 『훈민정음』 한문간본만을 『훈민정음해례본』이라 부른다. 집현전 학자들이 집필한 이 「해례」에서는 「예의」에서 소개한 대강의 내용을 다시 세분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글자를 만든 원리가 설명된 제자해(制字解), 훈민정음의 23초성체계에 있는 자모의 음가를 설명하는 초성해(初聲解), 중성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중성해(中聲解), 종성이 무엇인가 등을 설명한 종성해(終聲解), 초중종성글자가 합해져 음절단위로 표기되는 것 등을 설명하는 합자해, 단어 표기의 실제 운용 예를 보이는 용자례(用字例)가 그것이다.

마지막 정인지의 서문에서는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으며 배우기도 쉬운 훈민정음의 우수성과 이런 문자를 창제한 세종의 영명함을 칭송하고 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편찬하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편찬 연월일을 적고 있다. 책 뒤에 달린 서문이라 하여 「훈민정음 후서(後序)」라고도 부른다.

『훈민정음』은 이 『해례본』 외에도 『언해본(諺解本)』, 『실록본(實錄本)』이 있다.

언해(諺解)란 한문으로 쓰인 내용을 우리말로 해석한 것을 이르는데, 『훈민정음 언해본』은 『월인석보(月印釋譜)』 권1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세종어제훈민정음」 부분을 가리킨다. 「세종어제훈민정음」은 『해례본』의 첫 부분인 「예의」를 우리말로 해석하여 싣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월인석보』에 붙어 있는 부분이나, 이 부분만 따로 제책되어 유통되기도 했는데 대개 『언해본』들은 이런 경우이다. 현재 서강대학교 로욜라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세종실록』 병인년(1446) 9월 기사에 『훈민정음』(해례본)이 완성되었다는 내용을 실으면서 그 첫 부분인 「예의」를 요약한 내용과 마지막 부분인 정인지의 서문을 함께 싣고 있다. 따라서 이 『세종실록』의 병인년 기사를 『훈민정음』의 『실록본』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훈민정음예의(訓民正音例義)」라고 하면 『세종실록』의 이 병인년 기사의 해당 내용을 지칭하기도 한다.

『해례본』과 『언해본』,『실록본』의 가장 큰 차이는 해례부분의 유무이다. 해례는 『해례본』 에만 수록되어 있다.

6 훈민정음으로 찍어낸 책들

훈민정음 창제로 우리말의 전면적인 표기가 가능해졌지만 문자 보급 수단 및 교육 여건이 미비한 상황에서 훈민정음의 보급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택된 방법은 주로 한문 문헌에 대한 우리말 번역, 즉 언해나 새로 만든 훈민정음으로 글을 짓는 이른바 정음 문헌의 간행이었다. 이 문헌들은 주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연산군대에 이르는 약 50년간 집중간행 되었는데 대체로 두 가지의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언해나 정음문헌 대부분이 왕실이나 간경도감(刊經都監)같은 국가기관 주도로 만든 관판본이었다는 것이다. 즉 간행사업은 국가와 왕실 주도로 이루어진 국가의 문화적 역량이 결집된 성과물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15~16세기에 간행된 언해나 정음문헌은 전체 간행분 중 불경(佛經)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1447), 『석보상절(釋譜詳節)』(1447),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1447), 『월인석보(月印釋譜)』(1459),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1459), 활자본 『아미타경언해(阿彌陀經諺解)』(1461), 활자본『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1), 목판본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2),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1463), 『선종영가집언해(禪宗永嘉集諺解)』(1464) 등이 대표적이며 현재 40여종에 이르는 간본이 밝혀진 상태이다.

7 훈민정음의 창제와 현재의 한글날

주지하다시피 『세종실록』에는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하여 2건의 기사가 실려 있을 뿐이다. 1443년(세종 25) 계해년 12월 기사와 1446년(세종 28) 병인년 9월 29일 기사가 그것이다. 여기에 한 건을 더하자면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에 적힌 ‘1446년(세종28) (음력)9월 상한(上澣)’이라는 날짜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을 정확히 언제 완성하고 반포하였는가와 관련하여는 『실록』을 비롯한 그 어디에서도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현재 학계에서는 『세종실록』의 기사에 의거하여 훈민정음이라는 문자가 창제된 것은 1443년 계해년이고, 그 해설서인 『해례본』이 완성된 것을 1446년 병인년으로 보는 것에 큰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한글날인 10월 9일은, 『해례본』 정인지 서문의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의 상한이니 대략 10월 9일쯤으로 잡자고 하여 정해진 날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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