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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조선은 자주 독립국이다

1896년(고종 33)

독립문 대표 이미지

서울 독립문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대한제국의 성립과 독립문

조선은 1876년(고종 13) 일본에 통상을 허용한 이래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과도 조약을 맺어 나갔다. 시종일관 조선의 개항을 강요하고 이를 성사시킨 일본은 조선에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며 자신의 세력확장을 도모하였다. 조선 내 일본 세력의 확장에 대해 조선 시대 내내 조선과 조공-책봉관계를 맺고 있던 청은 서구 열강들로부터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확인받고자 하였으며,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등 서구 제국은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조선에서 각종 이권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은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이로써 경제적, 정치적 혼란을 야기,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같은 정변이 잇달아 연출되었다.

청과 일본을 큰 축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당시 열강의 세력각축은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일본의 승리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박영효(朴泳孝)를 끌어들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추진케 하는 한편 왕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등 조선에 대한 침략의도를 노골화하였다.

이에 고종(高宗)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내각의 총사퇴를 이끌어내었으며, 러시아공사관에 1년가량 머문 뒤 1897년 경운궁(慶運宮)으로 환어하여 황제에 즉위,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며 조선이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바로 대한제국 선포에 즈음하여 건립된 것이 독립문이다.

2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세우다

1896년 6월 『독립신문』에는 ‘모화관에 이왕 연주문 있던 자리에다가 새로 문을 세우되 그 문 이름은 독립문이라 하고 새로 문을 그 자리에다 세우는 뜻은 세계 만국에 조선이 아주 독립국이란 표를 보이자는 뜻’이라며 독립문의 건립과 그 의미를 알리고 있다.

독립문 건립이 전해지던 당시는 청일 전쟁 이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세력 다툼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던 때이다. 즉 조선 건국 이래 조공국으로서 조선에 대한 우위권을 주장하던 청 세력이 청일 전쟁에서 패배로 인하여 퇴조하던 때이다. 독립문 건립을 추진한 『독립신문』에서는 ‘대군주 폐하께서 청국 임금에게 해마다 사신을 보내서 책력을 받아오시며 공문에 청국 연호를 쓰고 조선 인민은 청국에 속한 사람들로 알면서도 몇 백 년을 원수 갚을 생각은 아니하고 속국인체 하고 있었다.’며 중국에 조공하던 조선시대의 외교를 비판하는 한편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하였다.

독립문의 건립은 바로 이러한 시대상을 잘 드러내는 건축물로 이는 그 건립위치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독립문의 건립을 알리는 초기 기사에는 그 위치를 ‘새문 밖 모화관’ 또는 ‘모화관에 이왕 연주문 있던 자리’라고 전하고 있다. 이는 모화관(慕華館)과 영은문(迎恩門, 건립당시 이름은 홍살문)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각각 조선 1407년(태종 7) 과 1425년(세종 7) 에 건립된 것으로 중국으로부터 오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즉 전통시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종속으로 정의하고 청일 전쟁 이후 청 세력의 퇴조에 발맞추어 과거 외교관계의 청산을 모화관을 대신하여 독립관을, 영은문을 대신하여 독립문을 세워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조선의 독립국임을 과시하기 위해 세워진 독립문은 1896년 7월 독립문 건립추진위원회로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창립되어 모금운동을 벌여나가며 그 건립이 본격화되었다. 독립협회는 이후 정치단체화 하지만 그 시작은 독립문 건립을 위해 결성된 것으로 반청적 입장에 섰던 이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으며, 전통적인 대중국관계의 상징물들을 대체하는 것으로 그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개화파(改化派)로 갑신정변을 주도 하고 정변 실패 후 미국에서 망명생활 중이었던 서재필(徐載弼)은 갑오개혁 이후 사면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벌여나가며 독립문 건설을 진두지휘하였다.

이처럼 독립문 건립 당시의 시대 상황, 위치, 추진 주체들을 살펴볼 때 독립문은 일본이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독립문의 건립은 그 의의를 알리는 한편 기금 마련이 개시되며 본격화되었다. 모금의 형태로 진행된 기금 마련은 독립협회 창립 발기인들이 510원을 모은 것을 시작으로 사회 각계의 호응을 얻으며, 모금 1년여 만인 1897년 8월까지 5,800여원이 답지하였다고 한다. 특히 당시의 모금에는 왕태자(훗날의 순종)가 1,000원을 하사하였는데, 이는 독립문 건립이 독립협회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 하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건립을 위한 모금이 진행되는 중인 1896년 9월 16일부터 공사의 시작을 전하고 있으며, 같은 해 11월 21일 성대한 정초식을 거행하여 독립문의 건립을 대내외에 알리고 있다. 『독립신문』은 이날의 정초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내외의 국민 5~6,000명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성대한 정초식이 이후 독립문 건설과정이나 완공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공사 1년 후인 1897년 11월 20일 경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공사과정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정한 크기로 돌을 잘라 쌓은 석축문인 독립문은 높이 14.2m, 너비 11.48m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 이는 아무것도 없던 벌판에 우뚝 솟아 어느 곳에서도 눈에 띄는 구조물로, 조선의 독립의지를 드러내기에 손색없는 것이었다. 또 완공된 독립문의 앞 쪽에는 한글로 ‘독립문’과 태극기와 더불어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을 새겨 독립의 의지와 더불어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 황실의 국가 이미지를 적극 드러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독립문과 이완용(李完用)의 관계이다. 독립문 건립당시 친미파 관료였던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창립 위원장으로서 협회에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으며 많은 보조금을 기부하기도 하였고, 이러한 연유로 독립문에 새겨진 글씨 ‘독립문’은 이완용의 필체라고 전하는 기사도 있다.

한편 독립문은 영은문의 자리에 들어섰지만 영은문의 주초석 2개를 그 앞에 두어 독립문이 이를 내려다보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의 종속적 외교를 경계하여 되풀이 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3 독립문의 설계자와 건설책임자

독립문은 첫 눈에 보아도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이 전통시대의 대문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이는 당시 독립문의 건립을 주도했던 독립협회의 의지, 바로 서구화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든 서구식 건축물인 독립문에 대해서는 파리의 개선문을 본 떠 만들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서구식 건축물인 독립문은 누가 설계한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두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어 있다.

하나는 독일공사관에 근무하던 스위스 사람이 설계했다는 것이다. 이는 서재필이 사망 4년 전인 1947년에 발간된 자서전에 의한 것이다. 이는 독립협회를 주도했으며 독립문 건립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서재필의 회고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을 할 당시 서재필의 나이가 임종을 얼마 남기지 않은, 80세 이상의 고령이었던 점, 또 서재필의 기억 외에는 이를 뒷받침할 관련 기록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시 스위스 기사의 실명도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친(Sabatin, A. I. S.)이 설계했다는 설이다. 당시 조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서구인들이 발간한 몇몇 문헌들에서도 독립문의 설계자로서 사바친을 지목하고 있다. 독립협회가 서구화를 지향하고 외국인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당시 서구인들의 이러한 기록을 무시할 수는 없다.

독립문의 설계자로서 거론되는 사바친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목격자로, 을미사변이 일본에 의해 자행된 것임을 알린 것으로도 유명한데, 당시 서울에 세워진 서양식 건축물의 설계에 많이 관여하였다. 러시아공사관과 러시아 정교회 성당, 정동의 손탁호텔과 같은 서구인들을 위한 시설물은 물론 아관파천 후 고종이 거처한 경운궁의 중명전(重名殿), 정관헌(靜觀軒), 구성헌(九成軒), 돈덕전(惇德殿) 역시 그의 손으로 설계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가 설계한 러시아 공사관 입구의 아치가 독립문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독립문과 그의 관련성이 엿보여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당시 서울에 있던 근대 건축물과 사바친의 관련성과 더불어 독립문의 건설이 처음 논의될 당시인 1896년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때로, 조선의 내정과 외정에 러시아 세력이 득세하고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독일공사관에 있던 누군가 보다는 러시아인인 사바친이 독립문에 관계한다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군다나 사바친은 스위스계 러시아인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말년의 서재필이 기억에 혼란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설계 이후 독립문의 건축을 담당한 것은 당시 서양인의 기술을 배우던 심의석(沈宜碩)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학을 수학했지만 감리교에 입교하며 이른 시기부터 서구 문물을 접했으며, 이를 계기로 배재학당(培材學堂),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 이화학당(梨花學堂) 본관, 상동교회(尙洞敎會)와 같이 감리교 관련 건축물의 공사에 참여하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서구 건축 기술에 익숙한 건축가였다. 심의석은 이러한 감리교 관련 서구식 건축물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탄생과 관련하여 황제 즉위 장소인 환구단(圜丘壇), 황제로서 고종이 친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황궁우(皇穹宇), 고종이 즉위한지 40년이 된 것과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 51세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稱慶記念碑殿)과 같이 황실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야 했던 건축물의 건축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전통적인 방식과 더불어 서구식 건축에도 익숙했던 심의석에 의해 축조된 독립문은 서구적 조형물로서 보이지만 실제 돌을 엇물려서 쌓아 올린 방식은 숭례문(崇禮門)이나 화성의 팔달문(八達門)에서도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독립문은 서세동점의 시대에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접목되어 탄생한 조형물이라고 하겠다.

4 식민지화 이후 독립의 의미 변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건립된 독립문의 의미는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條約), 1910년의 강점을 계기로 변화하였다. 강점 직후 어린이들의 동요에는 조선 강토의 돌맹이 하나까지도 모두 독립문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거나, 독립문의 삽화와 함께 ‘잠시 욕을 슬퍼마라, 부여족이 살았으니 동경성을 깨친 후에 개선문을 지으리라’며 독립을 희구하기도 하고, 3·1 운동 이후 독립의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독립군 사이에서 널리 불리던 독립군의 군가에서도 독립문을 거론하는 등,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로서 여겨졌다.

이렇듯 강점 이후 조선인들 사이에서 독립문의 의미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으로 변모해 갔지만 한동안 방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일본인들이 태극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독립문을 헐어내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독립문 역시 일제의 식민지배의 흔적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특히 3·1 운동 당시 조선인 청년이 독립문에 태극기를 꽂아두었는데 경관이 이를 발견하고 태극기를 뽑아버렸음은 물론 소방대를 불러 소방 펌프로 독립문에 있던 태극기에 퍼부어 색을 빼내었다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독립문의 오른쪽 다리에 커다란 틈이 생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중반의 신문기사에는 ‘독립문의 계단은 화장실이 되어 있고 위로부터 불시에 붕괴될 것 같다’며 당시의 형편없어진 독립문의 상태를 전하고 있다.

이렇듯 붕괴 위험이 높아져 주민들이 불안해하자 1928년 경성부에서는 지방비 4,100원을 지원하여 대대적인 독립문의 보강공사를 실시하였다. 당시 독립문에 대해 헐어내는 것이 아니라 보강공사를 계획한 것은 독립문 건설당시 이완용으로 대변되는 독립협회의 인사들 가운데 일부가 친일의 길을 걸어갔으며, 청일 전쟁을 청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일본이 치룬 전쟁이라고 보았던 일본인들의 의식이 결합된 산물이 아닐까 한다. 즉 청일 전쟁 이후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독립협회의 인사들이 주도하여 건립된 독립문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감추고 오히려 일본이 조선의 조력자였음을 선전하는 선전물로서 기능할 수 있었기 때문에 파괴가 아닌 보수를 선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의 보수가 독립문의 기본구조를 변경시켰다는 것이다. 원래 독립문은 돌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쌓고, 흙과 석회를 섞어 빈 곳을 다지는 방식으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1928년 당시 보수공사는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보강하였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독립문은 외관은 원래 형태에 가까울지 몰라도, 그 구조는 원형이 아닌 것이다.

한편 이후로 그다지 이목을 끌지 못했던 독립문이 1979년 경 사람들 입에 회자되었다. 바로 성산대로가 건설되면서 금화터널에서 성산터널을 잇는 고가도로가 독립문 위로 지나가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독립문은 원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이 결정되었으며, 1979년 3월부터 이전공사가 개시, 다음 해 8월에 마무리 되며 지금의 위치에 지금의 모습으로 세워졌다.

이후 1987년 서대문 형무소의 이전에 따라 그 빈터에 공원, 바로 서대문 독립공원 조성이 계획되었으며, 독립문은 ‘3·1 운동 기념탑’, ‘순국선열 추념탑’과 함께 독립공원의 일부가 됨으로서 식민지하 독립투쟁과의 관련 속에 위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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