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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흥선 대원군과 함께 피고 지다

1863년(고종 1)

운현궁 대표 이미지

서울 운현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운현궁의 유래와 궁역

사적 제257호인 운현궁(雲峴宮)은 고종(高宗)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과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가 기거하였던 사가(私家)로, 고종이 태어나고 자란 잠저(潛邸)이다. 운현궁이 자리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일대는 천문관측기관인 옛 관상감(觀象監) 터로, ‘운현(雲峴)’이라는 이름은 관상감의 전신인 서운관(書雲觀) 앞 고개(峴)라는 지명을 따온 것이다.

1863년(철종 14)에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군(興宣君) 이하응을 흥선 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여흥부대부인으로 봉작(封爵) 하면서 고종의 잠저로서 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왕대비 조씨(大王大妃 趙氏)의 하교에 따라 운현궁이 신·증축에 착수 함으로써 궁역(宮域)의 확장이 시작되었다. 흥선 대원군의 집권 기간 동안 꾸준히 궁역은 확장되어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흥선 대원군에 의해 확장된 운현궁은 그 담장의 길이만 수리(數里)에 이를 정도였다 고 한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 고종의 친정(親政) 선포로 흥선 대원군이 실각하고, 특히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흥선 대원군이 청에 압송되어 3년의 연금생활을 하는 동안 구명비용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운현궁은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1898년(광무 2) 흥선 대원군이 타계하고 운현궁은 장남인 이재면(李載冕)이 이어 받지만, 이미 크게 쇠락하여 유지·관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고종이 채무 변제를 위한 내탕금과 백미를 하사하고, 영선사(營繕司)에 운현궁의 수리를 명하였다 고 한다.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운현궁도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으로 보아 몰수, 국유화하였다. 이에 따라 운현궁의 법적 관리 주체는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이 되었으나, 이재면의 장남인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그의 양자인 이우(李鍝) 등 흥선 대원군 후손들의 거주가 금지된 것은 아니어서 실제 유지·관리는 후손들이 맡고 있었다.

1948년 7월 군정장관 딘(William Frishe Dean)소장에 의해 운현궁의 소유권은 이우의 아들인 이청(李淸)에게 이전되었다. 이청은 운현궁 가계의 채무를 정리하기 위하여 운현궁 내 양관과 토지 일부를 덕성학원에 매각하였고, 이후에도 운현궁 앞 삼일대로의 확장 과정에서 일부 대지를 수용당하거나 채무변제를 위해 건물과 토지를 매각하는 등으로 궁역이 축소되어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1991년 운현궁의 소유권은 이청에서 서울특별시로 이전되었으며, 현재까지 서울특별시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2 흥선 대원군과 함께 피고 지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을 대신하여 흥선 대원군이 섭정에 나서면서 운현궁은 정국의 핵심 무대로 떠오르게 된다. 이 시기 운현궁이 갖는 위상은 『고종실록』의 여러 대목에서 나타난다. 고종은 먼저 운현궁과 금위영(禁衛營) 사이에 문을 내도록 하였으며 , 운현궁 공사가 마무리되자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운현궁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고종의 가례(嘉禮)를 위한 별궁(別宮)으로 운현궁을 지정 하여 국혼 당일 고종은 왕비를 맞이하는 친영례(親迎禮)를 위하여 운현궁에 방문하게 되었다.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관찬사료는 국왕의 동정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관계로 흥선 대원군의 활동기록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은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 대원위가 명함)’를 통해 국사의 구석구석까지 관여하고 있었다. 다만 흥선 대원군은 고종이 정사를 보는 곳에 직접 나타나지는 않았는데, 왕에게 보고할 정도의 중요사안은 이미 흥선 대원군의 검토를 거친 것이어서 굳이 불편하고 어색한 대면 상황을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흥선 대원군은 각 기관과 관료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정책을 결정하기 위한 자신의 집무 장소로 운현궁을 이용하였으리라 추측된다.

흥선 대원군의 섭정기간 동안 운현궁이 지녔던 의미는 고종이 운현궁에 처음으로 행차한 뒤 이를 기념하여 짓게 한 「노락당기문(老樂堂記文)」에서도 드러난다. 또 흥선 대원군의 사랑채로 쓰였던 노안당(老安堂)을 상량(上梁)할 때 좌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지어 바친 노안당 상량문(老安堂 上梁文)도 흥선 대원군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인 합하(閤下)라고 칭하며 찬양함으로써 흥선 대원군과 운현궁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 흥선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운현궁도 퇴락의 시기를 맞는다. 흥선 대원군은 실각 후 운현궁에서 칩거하면서 복권을 노렸다. 흥선 대원군은 1874년(고종 11) 7월 양주 직곡(直谷)으로 거처를 옮겨 고종을 압박하였으나 실패하고 1876년(고종 13) 6월 운현궁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흥선 대원군은 복권되지만, 불과 33일 만에 청군(淸軍)의 개입으로 실각하고 청으로 압송되어 3년 동안 연금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운현궁은 흥선 대원군의 구명비용을 마련하느라 매우 궁핍해졌다.

1885년(고종 22) 8월 흥선 대원군은 귀국하였으나, 고종과의 관계는 더욱 험악해졌다. 예조에서 새로 마련한 규정인 「대원군존봉의절(大院君尊奉儀節)」을 통해 흥선 대원군은 사실상 연금당하는 처지에 놓이고 , 운현궁에는 방문객의 발길조차 끊기게 되었다. 이 시기 운현궁에서는 자객 침입 사건이나 원인 미상의 폭발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흥선 대원군을 활용해 고종의 자주적인 노선을 견제하려고 한 것은 청이었지만, 실제 흥선 대원군을 이용할 기회를 잡은 것은 일본이었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한다는 명목 하에 이루어진 일본군의 개입 하에 갑오개혁(甲午改革)이 단행되면서 흥선 대원군은 허울뿐이지만 정권 수반이 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동학농민군을 활용하여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고 개화파 정권을 타도하여 실권을 장악하려는 모의를 하였으나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발각되고 만다. 결국 흥선 대원군은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재차 운현궁에 연금 당하였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明聖皇后)가 시해당하고 시국이 불안정해지자, 이듬해인 1896년(고종 33)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친일내각에 대한 포살령(捕殺令)을 내리고, 「대원군존봉의절」을 준수할 것을 명하였다. 이로써 흥선 대원군은 또 한 번 연금되었고, 타계할 때까지 운현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운현궁은 흥선 대원군과 영욕의 세월을 함께 했다. 국왕의 잠저로, 국혼을 위한 별궁으로, 섭정의 집무 장소로 위세 높았던 운현궁은 흥선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도성 속 유배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3 운현궁의 주인들

운현궁의 1대 주인, 곧 종주(宗主)는 흥선 대원군이다. 흥선 대원군이 언제부터 운현궁을 소유하면서 거주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고종의 출생지로 알려진 정선방(貞善坊)은 운현궁이 위치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일대를 포함하므로, 고종이 태어난 1852년(철종 3)에는 이미 흥선 대원군이 운현궁에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흥선 대원군이 양주 직곡에 머무르거나 청에 연금되었을 때, 그리고 손자 이준용의 유폐에 반발하여 공덕리의 별장 아소정(我笑亭)에서 은거한 기간에는 장남 이재면이 운현궁을 맡았다. 흥선 대원군 사후 운현궁의 2대 종주가 된 이재면은 순종의 즉위 이후 비로소 조선황실의 큰 어른으로서 지위를 회복한다. 1910년(순종 3) 8월 15일 순종은 이재면을 흥왕(興王)에 책봉한다는 조령(詔令)을 내렸고, 같은 해 8월 28일에 책봉식을 거행하여 운현궁은 흥친왕궁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일제의 한국병합을 목전에 둔 때의 일로,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된 8월 29일 일본천황의 조칙에 의해 이재면은 다시 공(公)이 되고 흥친왕궁도 운현궁으로 돌아갔다.

1912년 이재면이 사망하자 그의 작위를 아들 이준용이 세습하여 이준공(李埈公)이 되니 그가 운현궁의 3대 종주이다. 이준용은 순종의 즉위로 복권된 다음부터 사망할 때까지 일본공사관 및 통감부가 주최한 행사에 왕족의 일원으로 참가하는 등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한일병합 직전 이준용은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대한제국 최고훈장인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받았고, 한일병합 직후에는 일제로부터 16만 8천원의 은사금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이준용은 일본천황에 의해 육군소장에 임명되었다.

1917년 3월 이준용은 지병으로 운현궁에서 사망하였는데 아들이 없어 흥선 대원군의 가계가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준공비 김씨(李埈公妃 金氏)는 이태왕(李太王)에 봉해져 물러나 있던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고종의 후손 중에서 이준용의 후사를 정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고종은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둘째 아들인 이우를 직접 운현궁으로 데려가 대를 잇도록 하였다. 이로써 이우는 이준용의 작위를 세습하여 이우공(李鍝公)으로서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된다. 그러나 이우는 일찍부터 일본으로 끌려가 볼모 생활을 하였고,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사망하였기에 실제 운현궁에서 지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실제 운현궁의 살림은 이우의 부인 박찬주(朴贊珠)가 도맡다시피 하였다. 해방 후 왕실재산 국유화조치로 운현궁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 때 박찬주는 운현궁이 왕실 재산이 아니라 개인 사저라는 점을 미군정에 적극 호소하여 사유(私有) 승인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우의 사후에는 그 아들 이청이 운현궁의 5대 종주가 된다. 이청은 운현궁의 유지·관리에 어려움을 겪다가 1991년 서울특별시에 운현궁을 양도하였고, 운현궁의 각종 유물도 서울특별시에 기증하였다.

4 운현궁의 건물과 경관

운현궁의 궁역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많은 건축물이 팔리거나 철거되었다. 이하에서는 현재 운현궁 궁역 내의 건물과 함께, 매각된 건물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물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한다.

1) 출입문

전성기의 운현궁에는 정문과 후문, 그리고 고종이 운현궁 행차시 이용한 경근문(敬謹門)과 흥선 대원군이 궁궐에 출입할 때 이용한 공근문(恭勤門)까지 네 개의 대문이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 출입문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원래의 후문에 해당한다.

2) 수직사(守直舍)

수직사는 운현궁 정문 우측에 위치한 건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한 사람들의 거처로 쓰였다. 고종의 즉위 후 운현궁이 확장되면서 관리를 위한 인력이 늘어났고,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맡으면서 경호의 필요성이 커지자 궁에서 경비병을 배치하여 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해졌기에 지은 것이다.

3) 노안당(老安堂)

운현궁의 사랑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흥선 대원군이 일상에 거처하던 공간으로, 섭정 시기에 흥선 대원군의 집무실로 쓰였으리라 생각된다. 흥선 대원군이 임종한 장소도 노안당 내에 있는 방이다.

노안당이라는 이름은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제5편 제25장의 “老者安之”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늙은이를 편안히 봉양한다는 뜻이다. 흥선 대원군은 운현궁 내 건물 당호(堂號)로 ‘老’자를 많이 사용하는데, 스스로를 대로(大老), 석파노인(石波老人), 회근노인(回巹老人) 등으로 칭하였던 것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노안당의 편액(扁額)은 흥선 대원군이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든 것이다.

4) 노락당(老樂堂)

운현궁의 중심에 해당하는 건물로 규모 면에서도 가장 크다. 운현궁에서 중요한 행사를 치를 때 사용된 곳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치른 장소도 여기다. 삼간택 후 별궁인 운현궁에 머무르던 명성황후가 궁중 법도를 익힌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노락당의 편액은 당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던 신관호(申觀浩)가 썼다.

5) 이로당(二老堂)

운현궁의 안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원래 노락당을 안채로 썼으나, 노락당에서 고종의 가례를 치르고 난 후로는 이를 안채로 쓸 수 없게 되어 1869년(고종 6) 새로 이로당을 지어 안채로 삼았다. 이로당은 ‘口’자 형태에 가운데에는 정원을 두어 구조에서부터 금남(禁男)의 영역임을 표방하고 있다.

이로당의 편액은 노안당과 마찬가지로 추사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老’자와 ‘堂’자는 노안당 편액의 글자와 완전히 일치하여 같은 글씨를 본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6) 영로당(永老堂)

1869년(고종 6)에 이로당과 함께 건축된 별당채로 이재면 내외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본래 운현궁의 일부였으나 1948년 9월 이승만(李承晚) 대통령의 주치의 김승현(金承鉉) 박사가 매입하면서 궁역에서 분리되었다.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7) 양관(洋館)

흥선 대원군의 조부 은신군(恩信君)과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사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은 건물로, 일제가 왕족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이준용에게 선물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완공 시기는 불분명하나 1907년에서 1912년 사이로 추정된다. 완공 후에는 순사 40여 명이 주둔하기도 했다.

이준용의 저택으로 쓰일 당시에는 그의 호를 따 송정 사랑(松亭 舍廊)으로 불렸고, 그의 사후 이우가 상속받자 이우공저(李鍝公邸)로 불리기도 했다. 1948년 덕성학원에 매각되었으며, 현재는 덕성여자대학교 법인사무국 건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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