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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고종,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

1897년(고종 34)

환구단 대표 이미지

환구단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대한제국 수립과 환구단

환구단은 1897년에 고종(高宗)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大韓)’으로 바꾸고 왕의 지위를 ‘황제(皇帝)’로 올리면서, 이를 국내외에 알리고 천지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이는 유교적 황제 관념에 입각한 것이면서도, 대한제국이 청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국임을 명확히 하고 황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조선을 왕국에서 황제국으로 전환하려는 조치는 1894년(고종 31) 청일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화되었다. 1894년(고종 31) 12월(음력)에는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내무대신 박영효(朴泳孝) 등의 요청을 수용해 ‘주상 전하(主上 殿下)’를 ‘대군주 폐하(大君主 陛下)’로 바꾸는 등 왕실의 호칭을 격상시켰고, 음력 고종 32년(1895) 11월 17일부터는 이날을 양력 1월 1일로 바꾸고 ‘건양(建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조선에서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명성 황후를 시해한 후 일본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는데, 일본은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열강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고종은 일본과 친일 내각에 포위되어 있던 경복궁에서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서양 각국의 공관이 몰려 있는 정동에서 새로운 정치를 펼칠 준비를 했다. 그 결과, 아관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에는 고종이 경운궁(慶運宮)으로 복귀하였다. 5월부터는 고종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건의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활발해졌다. 이는 고종이 고의로 유도한 측면이 있으며, 6월에 장례를 치룰 명성 황후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는 민심도 반영되었다. 이때 신하들이 황제의 칭호를 건의한 논리 중 하나는, 다른 나라들과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근대적인 세계 질서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즉, 서양에서는 황제, 대군주, 대통령 등으로 위상이 동등하지만 동양에서는 황제와 왕의 구별이 있기 때문에, 청과 일본이 모두 황제를 칭하는 상황에서 우리만 왕을 칭하면 군신 관계로 보이기 쉽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단군과 기자 이래 중화 문화의 정통을 계승한 조선이 중국의 황제 칭호를 따르는 것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로마의 정통을 잇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조정의 대소 신료들과 시전 상인들까지 나서서 근대적 만국공법과 유교적 정통론을 망라하며 황제를 칭할 것을 청하자, 반대 입장을 표하던 고종도 10월 3일에는 이를 받아들였다. 온 나라가 바라니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고종은 이미 황제에 등극할 결심을 하고 실제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6월에는 황제국의 위상에 맞는 국가 전례를 정비하기 위해 사례소(史禮所)를 설치했고, 9월 21일에는 장례원경 김규홍(金奎弘)의 건의를 받아들여 환구단의 제도를 정비할 것을 명했다. 25일에는 의례를 마련하고, 10월 1일에는 신축 장소를 남서(南署) 소공동으로 결정했으며, 곧이어 3일에 고종이 황제 칭호를 받아들인 것을 계기로 환구단의 탄생에도 박차가 가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둘러 완공된 환구단에서 천지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황제에 등극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의식을 위해 경운궁에서 환구단으로 향하는 황제의 행렬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앞세웠고, 황제는 황제국을 상징하는 황룡포(黃龍袍)를 입고 황금색을 칠한 가마를 타고 이동하였다. 또한 13일에는 최초의 조칙을 내려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왕후와 왕세자를 황후와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불과 2년 전에 왕후가 시해당하는 등 국가의 존립마저 위협받던 상황을 타개하고 대한제국을 통해 새로운 국가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려 한 이러한 시도에 대해 10월 14일자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광무 원년 10월 12일은 조선 사기에 몇 만 년을 지나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 천 년을 왕국으로 지내어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 대접을 받고 청국의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이 있더니 하나님이 도우시어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시어 이달 12일에 대군주 폐하께서 조선 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나라가 이렇게 영광이 된 것을 어찌 조선 인민이 되어 하나님을 대하여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오.”

2 환구단의 건축 과정과 공간적 특징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거행된 환구단은 그 위치와 건물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황제국에 적합한 형태로 건축되었다. 이전에도 고려나 조선 초기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단(圓壇)을 두었지만, 천자가 아닌 제후국의 왕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 환구단의 재건축은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 때 ‘원구 건축 청의서’에서 논의가 시작되어 도성 밖인 목멱산 남쪽에 간단한 시설이 마련되었지만, 고종은 이를 폐지한 후 경운궁 바로 앞에 있는 옛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새로 건축하기로 한 것이었다. 남별궁은 선조 26년(1593)에 명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주둔한 이후 중국 사신이 머무는 곳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환구단을 세우는 것은 그 자체로 영은문(迎恩門)을 없애고 독립문을 세운 것과 같은 취지로 중국과의 단절 및 독립국의 위상을 드러내는 의미가 있었다. 또한 환구단을 도시 확대에 의해 훼손될 여지가 있는 교외가 아니라 황성 내에 건립함으로써, 경운궁을 핵심으로 하는 서울의 도시 개조 계획 속에서 그 상징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환구단의 제반 시설물들은 1897년 착공 이후 1900년에 1차적으로 완성되었지만, 이후 1901년의 중수, 1903년의 주변 정리를 거쳐 순차적으로 그 형태가 완성되어갔다. 가장 먼저 수축된 것이 황제 등극 의식에 활용된 환구단으로, 화강암으로 둥글게 3단의 석축을 쌓고 맨 윗단에 황금색의 원추형 지붕을 얹은 형태였다. 예로부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라고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기 때문에, 환구단도 그에 따라 원형을 기본으로 만든 것이다. 각 단의 지름은 아래로부터 약 43.2m, 21.6m, 10.8m 정도의 크기였고, 제사를 지낼 때는 하늘과 땅, 일월성신, 산천과 자연에 관련된 신위를 위에서부터 차례로 모셨다. 또한 제단을 이중의 담장으로 둘러 보호하되, 안쪽 담장은 둥글게, 바깥쪽은 네모나게 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이념을 시각화했다.

이어서 1898년에서 1899년 사이에 황궁우(皇穹宇)가 환구단의 북쪽에 건축되었다. 황궁우는 황천상제(皇天上帝)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등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줄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신의 신위를 보관하는 공간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8각의 황궁우는 내부가 통층으로 되어 있지만, 외부에서 보면 지붕이 3층이다. 이는 환구단 자체를 주변보다 다소 높은 언덕에 둔 것과 같은 취지로, 높은 건물을 지어 서양의 영사관이나 교회에 뒤지지 않는 지고성과 위엄을 나타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신위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건립 당시에는 공간이 없어서 신위를 주변 건물에 두었다가, 1908년(융희 원년)에야 황궁우로 옮겨 왔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건물 내부의 천장에는 발톱이 7개인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는 등 황제국의 상징을 채택했다. 이후 1899~1900년에 부속 건물인 동서무와 황제의 휴식 공간인 어재실(御齋室) 등까지 건축됨으로써, 비로소 환구단의 시설들이 완성되었다. 다만, 도시 중심가의 한정된 공간에 여러 부대시설까지 축조하게 되자, 1901년에는 환구단을 중수하여 밑단의 넓이를 10m 정도 축소하였다.

1902년에는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석고단(石鼓檀)을 만들어 환구단 동쪽에 세웠다. 석고단은 석고를 싸고 있는 석고각과 정문인 광선문으로 구성되었다. 대한제국은 이처럼 환구단 일대가 확장될 때마다 주변을 정리해야 했는데, 1903~1904년에도 동쪽과 동남쪽에 위치한 외국인 가옥들을 매입하여 철거하고 부속 건물들과 담장을 축조했다. 이러한 주변 정리 사업은 외국인의 황궁 주위 가옥 소유를 금지하고 건물의 높이를 제한하는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고, 이로써 사방에 드러난 소공동 언덕 자체가 성스러운 의례의 무대가 되었다.

3 철도호텔의 건설, 대한제국과 환구단의 명운

대한제국과 함께 탄생한 환구단은 완성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면서, 다시 한 번 그와 운명을 함께 했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다음 해인 1911년 2월에 환구단의 건물과 대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관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1915년에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1913년부터는 공진회 관람객들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을 환구단 일대에 신축하기 시작했다. 철도 이용객과 외국인이 증가함에 따라 서양식 호텔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환구단이 대한제국의 상징물이었던 만큼, 일제가 이를 허물고 철도호텔을 세우기로 한 것도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철도호텔의 건설로 핵심 시설인 환구단은 철거되었고, 철거를 면한 부속 건축물들도 1914년 개관한 호텔의 부대시설로 활용되거나 다른 시설로 이전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환구단의 정문은 그대로 호텔의 정문이 되었고, 제사를 위해 황제가 머물던 어재실은 아리랑하우스로 개명되어 호텔의 음식점 및 연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1923년에는 석고단이 있던 영역에 총독부립경성도서관(조선총독부도서관)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1927년에 정문인 광선문을 남산에 있던 일본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옮겨 그 정문으로 사용했고, 1935년에는 석고각 역시 장충단(奬忠壇) 앞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해 건축한 박문사(博文寺)의 종루로 활용했다. 훼철을 면한 석고단은 황궁우와 함께 현재까지도 남아 있지만, 원위치에서 벗어나 철도호텔의 후원으로 옮겨졌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은 일제의 등장과 함께 철저히 분해된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수난은 계속되었다. 1967년에 철도호텔 자리에 웨스틴조선호텔이 착공되면서 황궁우를 중심으로 한 환구단 일대가 사적 157호로 지정되었지만, 이후 각종 명목으로 문화재 지정 면적이 1,505평에서 1,310평으로, 다시 1,070평으로 축소되어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환구단 정문, 어재실 등 철도호텔에서 사용되던 부속 시설들이 훼손되거나 방매되었다. 국제관광공사의 『조선호텔처리지(1967)』에 의하면, 정부는 팔각정, 석고단, 환구단 외의 호텔 건물 자체는 일본인이 시공한 건물로 문화재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방매된 시설들은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2007년 서울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의 재개발 과정에서 정문이 발견되었고, 음식점인 인수각도 변형되긴 했지만 환구단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문은 우여곡절 끝에 42년 만인 2009년에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이전되었고, 2013년에는 일본식 조경으로 지적받던 잔디와 석등을 제거하는 등 복원 공사를 거쳐 일반에 재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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