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문 한국사
  • Ⅵ 조선 후기 사회 변화와 민중의 성장
  • ① 조선 왕조의 재건과 정치적 변화
  • 다. 공평한 정치로 사회 개혁을 꾀하다

붕당의 폐단이 커지자, 영조정조 임금은 탕평책을 실시하여 당쟁을 막으려 하였다. ‘탕평’이란 어느 한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붕당들을 공평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영조붕당 간의 권력 다툼을 금하고, 노론 이외 다른 붕당의 인물을 등용하여 붕당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다. 또한, 인재를 직접 선발하여 등용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산업을 일으키기에 힘썼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규장각을 설치하여 젊은 학자들을 등용하고, 친위 부대를 새롭게 설치하여 국왕의 정치·군사적 힘을 강화하였다. 이와 함께 산업 발달과 조세 제도의 개혁, 서얼노비에 대한 차별 축소, 문화 진흥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영조정조의 개혁으로 조선은 잠시 중흥기를 맞아 어느 정도 사회적 안정을 찾고 산업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정치도 사회 변화에 대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노론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강해서 개혁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정조 이후 세도 정치라는 새로운 정치적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의 문화 유산

왕의 효심이 깃든 수원 화성 - 첨단 장비로 건축되다

영조의 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인 장헌 세자(사도 세자)붕당들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에 갇혀 처형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 세자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에 경기도 양주 땅에 있던 장헌 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남쪽으로 옮기고, 수시로 성묘를 갔다. 그리고 수원부는 화성으로 개칭하고, 이곳을 성역화하기 위해 성곽을 건설하였다
1794년(정조 18년) 정월에 시작된 화성(성곽)의 건설 사업은 2년 8개월이 지난 1796년 8월에 완성되었다. 화성의 축조는 철저한 계획과 감독 아래 시행되었다. 설계 도면은 물론, 투시도, 건축에 들어간 자재와 수량, 동원된 사람의 명단과 작업 일수, 노임 등 세세한 내용까지 일일이 기록되었다. 화성의 건축에는 정약용이 설계한 거중기라는 새로운 건축 장비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화성은 역사와 전란 속에서 파손이 많았다.
그리하여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으며, 성의 아름다움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1997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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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수원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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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비
탕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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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창덕궁)
규장각(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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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들어가기
조선 후기
한국사 1708 대동법 실시 1712 백두산에 정계비 세움 1725 영조, 탕평책 실시 1750 균역법 실시 1776 정조 즉위, 규장각 설치 1796 수원 화성 완성 1811 홍경래의 난 1832 서양 배가 처음 통상 요구 1860 최제우, 동학 창시 세계사 1688 영국, 명예 혁명 1729 청, 아편 판매 금지 1765 제임스 와트, 증기 기관 완성 1776 미국 독립 1789 프랑스 대혁명 1840 아편 전쟁 1854 일본, 미국에 개항 1857 인도, 세포이 항쟁 1861 미국, 남북 전쟁(~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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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요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의 정치, 사회는 변하였다. 붕당들 사이의 대립이 심해지고, 하나의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정치적 폐단도 커져 갔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새로운 사상과 학문인 실학이 일어났다. 또한, 민간 상공업의 발달로 경제력이 중시되면서 신분 제도가 흔들린 한편, 서민적 사상과 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부도 혼란한 사회와 어려운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힘썼다. 정치·군사·조세 제도를 바꾸어 나라를 새롭게 하고,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붕당들 사이의 대립을 줄이기 위한 탕평책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나, 개혁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왕실 외척이 권력을 장악한 세도 정치가 진행되어, 정치 기강이 흔들리고 부정 부패가 크게 퍼졌다. 그 결과 정치가 더욱 혼란해지고, 농민에 대한 착취와 폭정이 심해졌다. 이에 맞서 농민들의 저항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어 국가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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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Following the two major wars of the Japanese and the Manchu invasion(Byeongja Horan), the politics and society of Joseon underwent significant changes. Factional strife deepened and as one single faction began to monopolize power, political abuses increased. This resulted in the emergence of Silhak, the School of Practical Learning, which advocated social reforms during the latter period of Joseon. Also, with the development of civilian commerce, greater importance was placed on economic power, which led to the crumbling of the social status system. The doctrines and cultures centered on the general populace also emerged. The government, for its part, exerted efforts to reinvigorate the society and the economy that had undergone many hardships. The government also strived to stabilize the livelihood of the peasants by revamping the political, military and tax systems. The government engaged in the‘ policy of impartiality’, known as tangpyeongchaek, to resolve confrontations among the differing factions, but to no avail. Rather, Sedo politics, a unique, abnormal style of politics, where the power was manipulated by members of the queen’s family, unfolded during this period, which led to the tumbling of the political hierarchy and widespread corruption. This resulted in further political disturbances, and the exploitation and tyrannic acts against the peasants worsened. The peasant rose in defiance and the state experienced further chaos nationw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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