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문 한국사
  • Ⅵ 조선 후기 사회 변화와 민중의 성장
  • ② 사회ㆍ경제의 변화와 사회 개혁론
  • 라. 실학자들이 사회 개혁을 주장하다

양란 이후 사회가 크게 달라지고 있는 가운데, 일부 학자들은 현실 사회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이 지나치게 형식과 이론 논쟁에 치우친 것을 반성하고, 현실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연구를 하였는데, 이를 실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회를 보는 관점이나 문제의 해결 방안에서는 실학자마다 서로 달랐다. 어떤 실학자들은 농업을 중시하여 농지를 농민들에게 합당하게 나누어 경작할 수 있도록 토지 제도를 개혁하자고 주장한 반면, 다른 실학자들은 상공업을 발달시켜 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생활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북쪽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밖에 한국의 역사나 지리, 국어 등 국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의학이나 농업 기술, 천문 등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한편, 예술이나 문학 등에서도 서민적 성향이 크게 발달하였다.

실학자들의 주장은 정부 정책에 크게 반영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이들의 주장은 새로운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였다.

인물탐구

실학자정약용, 18년의 유배 생활을 하다

실학자 가운데 다양한 방면에 탁월한 개혁 사상을 가진 사람이 정약용이다. 그는 정치 기구의 개혁과 행정 제도, 노비제, 교육 및 과거 제도의 개혁 등을 주장하였다. 특히 농민에게 토지를 경작하게 하고, 노동량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할 것을 제안하였다.
사회를 보는 시각이나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정약용은 개혁 정치를 추구하였던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반대파의 공격을 받았으나, 정조의 도움으로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죽은 직후 일어난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전남 강진에서 18 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에 정약용은 자신의 생각과 연구를 담은 유명한‘여유당전서’를 남겼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자신의 개혁 사상을 사회에 직접 적용할 기회를 끝내 갖지 못한 채, 실학기 최고의 사상가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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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초당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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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쇠로 만든 지구의(최한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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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들어가기
조선 후기
한국사 1708 대동법 실시 1712 백두산에 정계비 세움 1725 영조, 탕평책 실시 1750 균역법 실시 1776 정조 즉위, 규장각 설치 1796 수원 화성 완성 1811 홍경래의 난 1832 서양 배가 처음 통상 요구 1860 최제우, 동학 창시 세계사 1688 영국, 명예 혁명 1729 청, 아편 판매 금지 1765 제임스 와트, 증기 기관 완성 1776 미국 독립 1789 프랑스 대혁명 1840 아편 전쟁 1854 일본, 미국에 개항 1857 인도, 세포이 항쟁 1861 미국, 남북 전쟁(~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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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요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의 정치, 사회는 변하였다. 붕당들 사이의 대립이 심해지고, 하나의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정치적 폐단도 커져 갔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새로운 사상과 학문인 실학이 일어났다. 또한, 민간 상공업의 발달로 경제력이 중시되면서 신분 제도가 흔들린 한편, 서민적 사상과 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부도 혼란한 사회와 어려운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힘썼다. 정치·군사·조세 제도를 바꾸어 나라를 새롭게 하고,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붕당들 사이의 대립을 줄이기 위한 탕평책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나, 개혁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왕실 외척이 권력을 장악한 세도 정치가 진행되어, 정치 기강이 흔들리고 부정 부패가 크게 퍼졌다. 그 결과 정치가 더욱 혼란해지고, 농민에 대한 착취와 폭정이 심해졌다. 이에 맞서 농민들의 저항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어 국가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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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Following the two major wars of the Japanese and the Manchu invasion(Byeongja Horan), the politics and society of Joseon underwent significant changes. Factional strife deepened and as one single faction began to monopolize power, political abuses increased. This resulted in the emergence of Silhak, the School of Practical Learning, which advocated social reforms during the latter period of Joseon. Also, with the development of civilian commerce, greater importance was placed on economic power, which led to the crumbling of the social status system. The doctrines and cultures centered on the general populace also emerged. The government, for its part, exerted efforts to reinvigorate the society and the economy that had undergone many hardships. The government also strived to stabilize the livelihood of the peasants by revamping the political, military and tax systems. The government engaged in the‘ policy of impartiality’, known as tangpyeongchaek, to resolve confrontations among the differing factions, but to no avail. Rather, Sedo politics, a unique, abnormal style of politics, where the power was manipulated by members of the queen’s family, unfolded during this period, which led to the tumbling of the political hierarchy and widespread corruption. This resulted in further political disturbances, and the exploitation and tyrannic acts against the peasants worsened. The peasant rose in defiance and the state experienced further chaos nationw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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