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1장 개방적인 성, 혼인의 폐쇄성
  • 1. 개방적인 성과 사랑
  •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
김선주

단군 신화에 의하면 단군왕검은 원래 곰이었다가 인간이 된 웅녀와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 사이에서 났다고 한다. 웅녀는 신단수 아래에서 임신할 수 있기를 기도했고, 이에 환웅이 잠시 형체를 바꾸어 웅녀와 혼인하였다고 한다.1)『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고조선. 고구려의 주몽(朱蒙) 설화에서도 하백(河伯)의 딸 유화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사통(私通)을 하였으며, 햇빛에 감응(感應)되어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2)『삼국사기(三國史記)』 권13,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가야에서도 가야산신 정견모주(貞見母主)가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되어 대가야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고 하는 건국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3)『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고령현(古靈縣) 건치 연혁(建置沿革).

이들 건국 설화에는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잠시 형체를 바꾸었다거나, 사통·감응 등으로 표현되는 일시적인 관계만 보인다. 아버지는 임신시키는 데만 의미가 있는 존재일 뿐이다. 아이를 임신하여 낳고, 양육하는 일은 어머니만 할 뿐이었다. 물론 건국 시조를 인간의 아들이 아닌 하늘의 자손으로 미화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중국의 경우 복희(伏羲)는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둘러 태어 났다고 하였으며, 설(契)은 간적(簡狄)이 알을 삼킨 결과 태어났으며, 기(弃)는 강원이 거인의 발자취를 밟은 결과 태어났다고 하여 남녀 관계가 생략되어 있다. 이러한 중국의 신화는 ‘어머니만 알고 아버지는 모르는 사회’의 반영으로 해석되어 왔다.4)유달림(劉達林), 강영매 옮김, 『중국(中國)의 성문화(性文化)』 상, 범우사, 2000, 159쪽. 그에 반해 우리의 건국 설화에는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나,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 등과 같이 대부분 남녀 관계가 상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건국 설화에는 남녀 관계가 일시적이고, 임신 후 아버지의 존재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부분 역시 일시적인 남녀 관계와 임신 후 아버지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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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저총의 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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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임신에만 관여할 뿐 실생활에서 가족을 형성하지 못하는 사례는 삼국시대 관련 문헌에도 종종 등장한다. 신라에 불교를 전해 주었던 아도(阿道) 역시 정상적인 부부 관계로 태어나지 않았다. 아도는 어머니 고도령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던 조위(曹魏) 사람 아굴마와 사통하여 임신하였다. 아굴마는 그 뒤 자기 나라로 돌아갔고, 고도령이 혼자 아도를 낳아 길렀다. 아도는 16세가 되어서야 위나라에 가서 아버지 아굴마를 만나게 된 다. 아도는 그 후 다시 고구려로 돌아왔다가 어머니의 권유로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신라로 갔다.5)『삼국유사』 권3, 흥법(興法), 아도기라(阿道基羅). 아도에게 아버지인 아굴마는 생명의 원천으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 가족으로 보기는 어렵다.

신라의 명현 중의 한 사람인 설총(薛聰) 역시 정상적인 부부 관계에서 출생하지 않았다. 원효가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면, 하늘을 버틸 기둥을 만들어 보겠다.”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당시 이 노래의 의미를 해석한 태종무열왕이 원효를 과부가 되어 요석궁에 홀로 있던 공주에게 인도하여 유숙(留宿)하게 하였으며, 이에 공주가 임신하여 설총을 낳았다고 한다.6)『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 원효불기(元曉不羈). 이러한 원효와 요석공주의 관계를 부부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유숙이라는 표현에서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는 일시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아버지 원효는 설총에게 함께 생활하는 가족으로서 의미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같이 고대에서 아이가 일시적인 관계로 태어나거나, 아버지가 실제 함께 생활하는 가족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도나 설총은 아버지와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아도가 위나라에 가서 아버지인 아굴마를 만난 것이나, 설총이 원효가 죽자 그 유해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던 사례들은 실제로 함께 생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와 연결된 아버지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존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원효와 친하게 지냈던 사복(蛇福)은 과부가 남편 없이 임신하여 태어난 아이였다.7)『삼국유사』 권4, 의해, 사복불언(蛇福不言).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인 서동 역시 과부가 된 어머니가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용과 교통(交通)하여 낳았다고 한다.8)『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武王). 이는 사복이나 서동이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아닌 남녀 사이에서 출생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 역시 명확하게 묘사되지 않아 실제 가족 관계로서 의미를 가졌는지 알 수 없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도 지렁이로 밝혀진, 자줏빛 옷을 입은 남 자가 매일 밤 어머니의 처소에 와서 자고 갔는데, 이에 임신이 되어 탄생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여기에서도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형성하지 않은 남녀가 일시적으로 동침하였는데, 임신이 되어 아이가 탄생하였음을 보여 준다.9)『삼국유사』 권2, 기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그 뒤의 이야기는 생략되어 알 수 없지만, 지렁이로 묘사된 남자와 광주 북촌의 딸이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어머니만이 가족으로서 의미가 있었을 것이며, 아버지가 누구인지 인식을 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아버지가 표면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고대 문헌에서 계보에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에 대해 다양한 계보가 전승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할아버지는 습보 갈문왕의 아들인 아진종(阿珍宗)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는 미상이라고 표현하였다.10)『삼국유사』 권3, 흥법,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猒觸滅身). 아진종의 아버지인 습보 갈문왕은 내물마립간의 아들이라고 했으므로, 결국 이차돈에게는 내물마립간에서부터 습보 갈문왕, 아진종으로 내려오는 고조·증조·조부까지의 계보가 있는 셈이다. 또한 신인종(神印宗) 승려인 광학과 대연의 출계(出系)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경주 호장(慶州戶長) 거천의 어머니는 아지녀인데, 그 어머니는 명주녀이며, 그녀의 어머니 적리녀의 아들이 광학 대덕(大德)과 대연 삼중(三重)이라고 하였다.11)『삼국유사』 권5, 신주(神呪), 명랑신인(明朗神印). 가계가 여성에서 여성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만 나타나고 아버지는 아예 언급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어머니가 민장사(敏藏寺) 관음보살 앞에서 7일 동안 기도하였더니 돌아왔다고 하는 장춘(長春)은 응심리의 보개(寶開)라는 가난한 여자의 아들로 표기되어 있다.12)『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민장사(敏藏寺). 또한 경덕왕 때에 한기리의 여인 희명(希明)의 아이가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자, 그 어머니가 분황사에 있는 천수대비 앞에 가서 노래를 지어 빌어 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고 한다.13)『삼국유사』 권3, 탑상, 분황사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여기서도 아이의 가족 관계는 ‘한기리에 사는 희명’이라는 어머니의 이름만 표현되어 있다. 또한 승려인 혜공(惠空)은 천진공 집에 고용살이하던 노파의 아 들이라고 하였으며,14)『삼국유사』 권4, 의해, 이혜동진(二惠同塵). 불국사 창건과 관련된 김대성(金大成) 역시 모량리의 가난한 여자 경조의 아들로 표현되어 있다.15)『삼국유사』 권5, 효선(孝善),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신문대(神文代). 이들은 대부분 일반인이나 하층민으로 여겨지는데, 가족 관계에 어머니의 이름만 표기되어 있다. 물론 아버지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어머니만 표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계보는 살아 있는 사람만 연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현존 여부를 떠나서 아버지를 굳이 제외할 필요는 없다. 계보는 주인공의 혈연관계를 표시하거나, 주인공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는 인물과의 연결 고리를 주로 표시하는데, 아버지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계보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그만큼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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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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