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1장 개방적인 성, 혼인의 폐쇄성
  • 1. 개방적인 성과 사랑
  • 연애와 혼인 사이
김선주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의 특징적인 혼속(婚俗)으로 이른바 ‘서옥제(婿屋制)’를 소개하였다.

그 풍속에 혼인을 할 때 구두로 이미 정하면 여자의 집에는 대옥(大屋) 뒤에 소옥(小屋)을 만드는데, 서옥(婿屋)이라고 한다. 저녁에 사위가 여가(女家)에 이르러 문 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꿇어앉아 절하면서 여자와 동숙하게 해 줄 것을 애걸한다. 이렇게 두세 차례 하면 여자의 부모가 듣고는 소옥에 나아가 자게 한다. 그리고 옆에는 전백(錢帛)을 놓아둔다. 여자가 낳은 아이가 장성하면, 비로소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서옥제는 고구려의 특징적인 혼인 풍속일 뿐 아니라, 후대 고려나 조선시대의 남귀여가(男歸女家)의 시원(始原)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16)김선주, 「고구려 서옥제의 혼인 형태」, 『고구려 연구』 13, 2003, 62∼65쪽. 서옥제 관련 기술을 좀 더 세분하면 구두로 약속, 여자 집에서 사위가 머물 장소를 준비, 남자의 내방(來訪)과 동숙(同宿) 간청, 신부 부모의 승낙, 동숙, 아이가 태어나 장성하면 남자가 아이와 여자를 남자의 집으로 데리고 가는 과정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혼인 관련 글에서 이와 같은 서옥제를 연상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면, 유화와 해모수가 먼저 만나 사사로이 정을 통하면서 혼인을 약속하고, 그 후 해모수는 유화의 집으로 찾아간다. 유화의 부모는 해모수의 권능을 실험한 후 해모수를 사위로 받아들인다. 그 뒤 해모수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고 유화는 친정에 남아 있다가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운다. 아이가 태어나 장성하면 함께 본가로 돌아간다는 서옥제의 마지막 과정 이전까지가 여기에도 그대로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17)『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즉위조.

유리왕 설화에도 주몽과 예씨의 결합, 예씨의 임신과 주몽의 남하, 예씨 집에서 유리의 탄생과 성장, 장성하여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서옥제의 과정이 나타난다.18)『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즉위조. 주몽이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국하는 동안 예씨는 혼자 친정에 남아 유리를 낳고 길렀음을 알 수 있다. 대무신왕 때의 호동(好童)과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설화에서도 서옥제를 확인할 수 있다. 옥저에 놀러간 호동은 그곳에 온 낙랑왕 최리를 만나, 둘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자 최리를 따라 낙랑에 가서 그의 딸과 혼인을 한다.19)『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그런 뒤 호동은 낙랑공주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혼자 고구려로 돌아오고 낙랑공주는 친정에 남아 있는다.

취수혼(娶嫂婚)으로 잘 알려진 산상왕이 아들인 동천왕을 얻게 되는 과정에도 서옥제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산상왕은 돼지가 달아난 것이 계기가 되어 주통촌녀(酒桶村女)의 존재를 알게 되고, 밤이 되자 여자의 집을 찾아간다. 여자의 집으로 간 산상왕은 시종을 시켜 여자를 달랬으며, 그 집에서는 왕이 온 것을 알고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여자 부모의 승낙을 받고 왕은 비로소 여자의 방으로 들어가 동숙할 수 있었다. 동숙한 후 바로 왕은 환궁을 하고, 역시 여자만 혼자 자신의 집에 남아 있다가 아이를 낳는다. 아이가 태어나자 왕은 아이에게 이름을 내리고 그 어미를 소후(小后)로 세웠다고 한다.20)『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 산상왕 7년.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서 자신의 존재를 알림, 여자 부모의 허락, 동숙, 아이의 탄생, 남자가 아이와 여자를 자신의 친가로 데리고 가는 것이 서옥제와 비슷한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들 사례를 보면서 중국 사료에서 설명한 서옥제가 실제 고구려 사회에서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 간단한 합의로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동숙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삼국지』에는 동숙한 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는데, 실제로 남자는 돌아오고 여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후 아이가 태어나 장성하거나, 기타 요건이 발생하면 남자는 여자와 아이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러한 서옥제는 신라의 혼인 관련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소지왕은 날이군에 사는 파로(波路)라는 사람의 주선으로 그의 딸을 만나게 된다. 이후 자신의 궁과 여자의 집을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여자와 동숙하고, 마침내 여자를 자신이 사는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아들을 낳았다.21)『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22년. 아들을 낳기 전에 여자를 궁중으로 데리고 갔다는 시기적인 차이가 있을 뿐 남자가 여자의 집을 왕래하며 동숙하고, 나중에 남자가 여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오는 과정은 서옥제와 같다.

진지왕과 도화녀(桃花女)의 결합에도 진지왕이 도화녀의 집 방문, 동숙 간청, 여자 부모의 허락, 동숙하는 등 서옥제 과정이 그대로 보인다.22)『삼국유사』 권1, 기이, 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荊郞). 진지왕은 생시에 도화녀를 만나 남편이 없을 경우 관계가 가능하다는 약속을 도화녀로부터 구두로 받아 둔다. 그 후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은 혼령이지만 한밤중에 도화녀의 집에 찾아온다. 이어 진지왕의 혼령은 자신의 존재를 밝히며 동숙할 것을 청한다. 이에 도화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는데, 도화녀의 부모가 “임금의 말씀을 어찌 어기겠느냐.”고 허락한다. 이에 진지왕과 도화녀의 동숙이 이루어진다. 7일 후에 왕은 없어지고 도화녀가 혼자 남아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된다. 그 후 남자 측 집안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진평왕에게 아이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아이는 왕궁으로 가는데,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라다가 장성한 뒤 아버지의 집으로 간다는 내용과 맥락이 같다.

김춘추(金春秋)와 문희(文姬)의 결합 역시 서옥제와 같은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여자의 오빠인 김유신(金庾信)의 계략에 의해 김춘추는 문희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그 후 김유신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김춘추는 문희와 동숙하게 된다. 이후 김춘추는 돌아가고 문희는 자기 집에 남아 있게 되는데, 김춘추가 문희의 집을 여러 차례 왕래하다가 마침내 문희가 임신하게 된다. 그런데 이를 알고 김춘추가 발길을 끊자 김유신이 선덕여왕을 움직였고 마침내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명령으로 아이를 가진 문희와 정식 부부가 되었다.23)『삼국유사』 권1, 기이,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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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례를 보면 『삼국지』에 서술된 서옥제는 고구려에서 실제 행해졌을 뿐 아니라 신라에도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실제 서옥제의 형태를 보이는 결합 사례는, 대부분 사회적으로 공인된 혼인의 의미보다는 실질적인 남녀의 결합에 비중이 두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혼인은 두 사람의 결합을 주위에 알려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서옥제에는 이러한 의례적이고 공식적인 면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남녀의 실질적인 결합인 동숙이 더 부각되었다. 신랑이 해질 녘에 온다는 것과 신랑이 신부 부모에게 동숙을 애걸한다는 점이 서옥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것 같다.

또한 동숙한 뒤 남녀가 동거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여자만 친정에 남아 있고 남자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아이나 다른 계기가 생기면 남자가 와서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데, 이 단계에 이르러 남녀는 동거하는 실질적인 부부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 사이에 남자는 소지왕이나 김춘추처럼 자기 집과 여자의 집을 왕래하였을 수도 있고, 호동처럼 일정 기간 여자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산상왕이나 진지왕처럼 1회 동숙에 그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시점은 ‘아이가 장성하면’이라는 표현이나 유리왕의 사례에서처럼 아이가 장성한 때인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산상왕의 경우처럼 아이가 절실하거나, 김춘추의 사례에서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기면, 그 시기는 좀 더 빨라질 수도 있었다. 또는 호동의 사례에서처럼 서로 이해관계가 얽히면 아이와 상관없이 여자를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숙하고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공식적인 부부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때에 따라서는 정식 부부가 되지 못하고 두 사람의 관계가 청산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서옥제의 상황에서는 종종 여자 쪽에서는 동숙만 이루어지고 실제 부부가 되지 못할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유화의 아버지 하백은 해모수를 사위로 인정한 뒤 딸을 데려가지 않을까 봐 두려워 술자리를 베풀어 해모수를 만취하게 한 다음 딸과 해모수를 가죽 부대에 넣어 용거(龍車)에 실어 보냈다고 한다. 호동은 낙랑공주와 결합한 상태인데도 낙랑공주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요구, 즉 낙랑의 무기고에 있는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지 않으면 예로써 맞이하지 않겠다고 했다. 효보다 사랑을 택해 자명고(自鳴鼓)를 찢어버린 것으로 알려진 낙랑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뒤에는 서옥제에 따른 불안한 결합이 있었던 것이다. 주통촌녀도 산상왕과 동숙하기 전에 아이를 낳으면 저버리지 말라는 다짐을 먼저 받았다.

이러한 사례들은 동숙만으로는 남자와 여자의 지속적인 결합을 확실하게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동숙하였더라도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남녀의 결합 관계는 바뀔 수 있었다. 특히 남자 집안에서 여자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여자는 남자의 집으로 가지 못하고 두 사람은 동숙 관계로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유리왕은 장성한 뒤에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갔는데도 정표를 인정받은 뒤에야 아들로 받아들여졌다. 만약 유리왕이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해 정표를 찾지 못했다면 그와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문희 역시 김춘추와 관계를 맺어 아이까지 임신하였지만, 김유신이 중간에 개입하여 계략을 쓰지 않았다면 실질적인 부부 관계에 이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동숙하여 실질적인 부부 관계를 맺었다 하더라도 관계를 지속할 필요가 없다면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 정식 부부로 인정받기 전에 관계가 해소될 수도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일회적인 남녀 관계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동숙해서 아이가 생겼지만,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할 경우 여자는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이는 어머니 쪽에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족 관계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아도와 설총과 같이 아버지의 존재가 아이에게 인식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예 아버지의 존재를 나타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고대 문헌자료에서 어머니만이 표시되거나 계보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동숙이 있었지만 혼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관계가 해소될 수도 있는 ‘서옥제’와 같은 풍습을 배경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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