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1장 개방적인 성, 혼인의 폐쇄성
  • 2. 혼인 관계의 사회화
  • 부부 관계의 공표, 혼인 의식
김선주

인간 외의 동물도 짝을 중심으로 집단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지속성이 적으며, 사회와 법제의 틀 안에서 존재하지 않으므로 혼인이라 하지 않는다.32)허흥식, 「고려시대의 근친혼과 일부일처제」, 『역사비평』 25, 1994, 80쪽. 혼인이라는 것은 특정 남녀의 영속적인 결합을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하나의 사회적인 의식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특정한 남녀의 결합이 사회적으로 지속적인 부부 관계로 인정받는 과정에는 일정한 의식이 따라야 했다. 우리 고대 사회에서는 남녀가 비교적 자유롭게 결합했으며, 이러한 과정에는 특별한 의식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사회적으로 공인된 혼인 관계에는 신분내혼 등의 사회적 원칙이 있었으며, 혼인의 결정권은 절대적으로 부모가 쥐고 있었다. 또한 부부 관계를 부모를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일정 정도의 의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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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주몽 설화에서 유화의 아버지인 하백은 딸과 해모수의 관계를 알고 처음에는 화를 내지만, 해모수의 능력을 시험한 뒤 사위로 인정하면서 잔치를 베풀었다. 하백은 해모수가 유화를 데려가지 않을까 봐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혼인 의식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남녀 결합을 사회화하면서 좀 더 공고하게 하는 과정에서 필요했을 것이다. 김춘추 역시 문희와 사실혼 관계였지만, 선덕여왕의 권고를 듣고 말을 달려 문희를 구하고 혼례를 치렀다고 한다. 이는 둘만의 잠정적이고 가변적인 관계가 혼례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공인을 받은 부부 관계로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

『주서(周書)』 「백제조」에는 “시집가지 않은 여자는 머리를 묶은 다음 머리 위로 똬리를 틀고, 뒤로 한 가닥 늘어뜨리는 것으로 꾸밈을 삼았고, 시집간 여자는 이를 두 가닥으로 늘어뜨렸다.”고 하여 혼인에 따른 외형적인 변화를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혼인하지 않은 처녀가 혼인한 부인이 되는 경계가 되는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북사』 「신라조」에도 “부인들은 머리를 위로 감아올려 갖가지 비단 및 구슬로 장식한다. 혼인 의식에는 술과 음식뿐인데, 잘 차리고 못 차리는 것은 빈부에 따라 다르다. 신혼 첫날 저녁에 신부는 먼저 시부모에게 절을 올린 다음 대형(大兄)과 남편에게 절한다.”고 하여 역시 혼인한 부인은 머리 모양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특정한 혼례 절차는 보이지 않지만 혼인 관계를 사회적으로 알리는 과정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축하연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혼인 의식이 중국 풍습과 대략 같았다.”33)『주서(周書)』 권49, 열전, 이역(異域), 백제 ; 『수서(隋書)』 권81, 열전, 동이, 백제 ; 『북사』 권94, 열전, 백제.라고 하므로 중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속적인 부부 관계를 형성하는 통과 의례로 나타나는 혼인 의식은 각 시대나 지역에 따라 특징이 있었다. 『진서(晋書)』 「숙신조(肅愼條)」에는 “혼인하러 갈 때에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에 깃털을 꽂아 주는데, 여자가 결혼을 승낙하면 그 깃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음에 예를 갖추어 맞이하여 온다.”고 하였다. 또한 『북사』 「물길조(勿吉條)」에는 “결혼할 적에 신부는 베로 만든 치마를 입으며, 신랑은 돼지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고, 머리에는 용맹스러움을 상징하는 표범의 꼬리를 꽂았다. 결혼 첫날밤에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여자의 유방을 만져보는 것으로 끝낸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개념으로 보면 약간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회적인 부부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 특징적인 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기이편」에는 음경(陰莖)이 커서 배우자를 찾을 수 없었던 지철로왕이 사방으로 사자(使者)를 보내어 배우자를 찾는 이야기가 수록되 어 있다.34)『삼국유사』 권1, 기이, 지철로왕(智哲老王). 그런데 배우자를 찾을 때 당사자가 직접 하지 않고 중개인이 끼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침내 조건에 맞는 여자가 나타나자 왕이 수레를 보내어 그 여자를 궁으로 맞아들여 왕후를 삼으니 여러 신하가 하례하였다고 한다. 지철로왕이 왕비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혼인 관계를 형성하는 동시에 왕후로서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공표하는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통일신라시대 신문왕은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이찬 문영, 파진찬 삼광을 보내어 기일을 정하게 하고, 대아찬 지상을 시켜 납채(納采)를 하게 하였는데, 폐백 15수레, 쌀·술·기름·간장·된장·포·식혜 135수레, 벼 150수레를 보냈다고 하니 혼례가 성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35)『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신문왕 3년. 당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첫 왕비를 출궁시킨 뒤였기 때문에, 이러한 혼인 의례에는 왕의 권위와 위엄을 사회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왕을 비롯한 상류층의 부부 관계는 사회적으로 공인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둘의 관계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성대한 의식이 필요하였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일반인은 특별한 예식 없이 동거하며 부부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남녀의 사실혼 관계가 바로 사회적인 부부 관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혼례는 생략되거나, 한다고 하더라도 아주 간단했다. 『북사』 「고구려전」에는 “결혼함에 있어서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킨다. 남자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만 보낼 뿐이지 재물을 보내는 예는 없었다. 여자 집에서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수치스럽게 여겨 딸을 계집종으로 팔아먹었다고 한다.”라고 하여 혼인 의례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소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맹자』에 나오는 “예를 갖추었으면 처가 되고 임의로 관계를 맺었으면 첩이 된다.”는 말은 예식 없이 결합한 남녀 관계를 혼인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에서는 결혼이 반드시 중매로 이루 어져야 했다. 그런데 우리 고대 사회에서는 부모가 결정권을 쥐고 있지 중매인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반드시 혼례를 치러야만 부부로 인정된다는 의식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왕을 비롯한 상류층에서는 성대한 의식을 치러 사회적으로 부부 관계를 공표하는 혼인 예식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반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혼인 의식이 보편화되었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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