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1장 개방적인 성, 혼인의 폐쇄성
  • 3. 부부 관계
  • 투기와 간통 규제의 이중성
김선주

혼인 관계는 혈연과 더불어 집단 사이의 결속과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맥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 맥락을 유지하고 질서를 잡는 사회적 규범이나 금기는 엄격한 면이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배우자의 성에 대한 엄격한 규제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고조선의 ‘팔조법금(八條法禁)’과 함께 부인들의 몸가짐이 깨끗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고조선의 팔조법금 가운데 살인·절도·상해 세 개의 금기 조항만 전해 오지만, 나머지 조항 중에 간음에 대한 규제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60)이병도, 「기자 조선의 정체와 소위 기자 팔조교(八條敎)에 대한 신고찰」, 『한국 고대사 연구』, 박영사, 1985, 61쪽. 『삼국지』 「부여조」에는 “남녀가 음란하고,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인다.”고 하였으며, 백제에서도 “간통한 여성을 남편 집 종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61)『주서(周書)』 권49, 열전41, 이역 상(異域上), 백제. 부여와 백제에서 간통이나 간음에 대해 엄격히 규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간통은 반드시 남녀가 같이 하는 것인데도 규제 대상은 주로 여자였다. 남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와 간통할 때만 함께 처벌받았을 뿐 실제 혼외 성관계에 대해 모두 간통으로 처벌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로 써 배우자의 성에 대한 통제는 주로 여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가족의 질서를 깨지 않는다면 남자가 배우자 외의 여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비교적 관대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고대 부여나 고구려에서는 간통보다도 투기를 더 강하게 규제하였다. 부여에서는 남녀가 음란하고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이지만, 부인이 투기하는 것을 더욱 미워하여 시체를 남산 위에 버려두게 하였으며, 친정에서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내야 한다고 했다.62)『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부여조. 중국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고구려에서도 실제로 투기를 하다 죽임을 당한 사례가 있어 역시 투기를 강하게 규제했음을 알 수 있다. 중천왕 때에 관나부인은 왕후와 총애를 다투다가 가죽 부대에 넣어져 바다에 수장되었다.63)『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중천왕 4년. 바다에 던졌다는 것 역시 부여에서처럼 시체의 매장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장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죽어서도 영혼이 안식하지 못하게 하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투기한 여성은 가족 질서의 파괴자이기 때문에 영혼조차도 안식할 수 없게 중벌을 가한 것이다. 간통보다도 가혹하게 처벌한 투기죄는 투기할 대상이 있는 사회 구조에서 가능할 것이다. 부여의 경우 “간위거가 적자는 없고 서자 마여가 있었다.”64)『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왕에게는 부인이 여러 명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투기로 인해 실제 처형된 사례를 보여 주고 있는 고구려에서는 축첩 등 다처(多妻)인 경우가 여럿 보인다.

유리왕은 왕비 송씨가 죽은 뒤 화희와 치희라는 두 여자를 계실(繼室)로 삼았으며,65)『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3년. 대무신왕도 원비와 차비가 있었다.66)『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산상왕에게는 왕비 우씨 외에 소후로 주통촌녀가 있었다.67)『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 산상왕 13년. 고구려에서 투기하다 처형된 관나부인은 중천왕이 왕비 연씨가 있는데도 소후로 삼으려 한 여자였다.68)『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중천왕 4년. 또한 『일본서기』에는 안원왕에게 정부인·중부인·소부인 등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69)『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7년. 이들 가운데 부인으로서 지위가 차이가 있는 처첩(妻妾) 관계인 경우도 있었지만, 위치가 동등한 다처인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다처제 풍습은 고분 벽화에도 나타난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있는 각저총(角抵塚)에는, 큰 커튼 안쪽에 있는 무대 중앙에 주인공인 한 남자가 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오른편으로 부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여자가 평상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벽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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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저총 부인도
각저총 부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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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평안남도 남포시에 있는 수렵총 북벽에는 간소하게 그려진 장방(帳房) 안에 끝이 올라가고 목이 긴 가죽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평상에 올라앉은 네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맨 오른쪽에 묘주(墓主)인 남편이, 그 왼쪽으로 부인으로 보이는 세 여인이 나란히 앉아 있다. 그런데 묘의 주인 바로 옆의 여인은 독립된 평상에 앉은 반면, 왼편의 두 여인은 그보다 약간 낮은 단의 한 평상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부인 사이의 위계를 보여 준다. 그렇지만 세 여인 모두 크기가 엇비슷하고, 주황색 바탕에 물방울무늬가 장식된 두루마기를 똑같이 입고 있어, 대등한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다처 사회에서는 당연히 부인들끼리 긴장 관계가 유지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다처나 축첩제가 행해진 사회에서는 가족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투기를 통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실제 다처제 사회인 고구려에서는 처벌된 관나부인 외에도 유리왕 때의 화희나 치희, 산상왕 때의 왕후 우씨와 주통촌녀 등 여자들끼리 남편의 사랑을 독점하기 위해 서로 투기한 사례가 보인다. 백제에서는 다처제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왕의 계보에서 ‘동모형제(同母兄弟)’나 ‘이복형제(異腹兄弟)’ 등의 용어가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서자(庶子)70)『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비유왕 즉위조.나 서제(庶弟)71)『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비류왕 18년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아신왕 3년. 등의 용어도 보여 다처제 내지 처첩제(妻妾制)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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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총 부부도
수렵총 부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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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고구려·백제에서는 다처나 축첩을 통해 한 남자가 여러 명의 여자와 성관계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지만 부인들에게는 간통을 규제함으로 배우자 이외의 남자와 성관계를 맺지 못하게 규제하는 한편, 투기를 규제해 남편이 다른 여자와 성관계하는 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도록 법제화했다. 남자의 성은 배우자 한 명에 한정하지 않으면서, 상대 배우자의 성은 규제하는 이중적인 장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간통과 투기에 대한 처벌이나 규제가 문헌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배우자 이외에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간통이나, 배우자와 성관계를 독점하려는 투기는 보편적인 현상이므로 신라에서만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여성에 대한 기록이 풍부한 신라에서 투기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신라에서 중대 말기인 혜공왕 이전에는 왕들의 다처 사례를 찾을 수 없다. 물론 진흥왕이 왕비 사도부인 외에 백제 성왕의 딸을 소비로 삼았고,72)『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즉위조 및 14년 . 태종무열왕이나 김유신에게 서자가 있던 것으로 보아 한 명의 부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왕이나 귀족들은 여러 여성을 아내로 거느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여성에게 특별히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그 소생을 적자로 보며 이하 여성들을 첩으로, 그리고 그 자식들을 서자로 본다면 그것은 설사 여러 여성을 거느렸다 해도 축첩을 포함하는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이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왕들에게도 정식 왕비는 한 명만 있었다. 중대까지 신라 왕들은 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왕후를 출궁시키고 다른 여자와 재혼을 하였다. 또한 자식들도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였다. 이는 신라가 축첩을 포함하는 일부일처제 사회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처첩제에서는 처와 첩의 사회적 신분이 확실히 구분될 뿐 아니라 정처(正妻)의 지위가 안정적인 편이다. 인간적인 투기야 없을 수 없겠지만, 사회적으로 정처로서 지위가 위협받지 않는 상황에서 부여나 고구려에서처럼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규제할 만큼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구려와 같이 부인 사이의 위계에 큰 차이가 없고 신분이 대등한 다처제 사회에서는 남편하고 관계가 불안정하여 여자들끼리 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투기를 막아야 했으며, 따라서 투기를 가혹하게 처벌한 것이다.

신라에서는 투기에 대한 규제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성에 대해서도 부여나 백제에 비해서는 사회적으로 강하게 규제하지 않는다. 처용(處容)은 아내가 외간 남자와 동침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간단히 체념한다. 아내와 동침한 사내가 처용이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신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본래는 내 것이었지만 빼앗긴 걸 어찌 하리.”라며 간단히 체념하는 처용의 행동은 남녀가 음란하면 죽이는 부여나, 간통한 여성을 남편 집의 종으로 삼는 백제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헌화가(獻花歌)」의 주인공인 수로부인 역시 남편이 옆에 있는데도 바닷가 절벽에 피어 있는 꽃을 탐내고, 이에 지나가던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치면서 헌화가를 불렀다.73)『삼국유사』 권2, 기이, 수로부인(水路夫人). 여기서 남자를 ‘노인’으로 표현하였지만, 헌화가를 부르며 꽃을 주고받는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분위기가 엿보인다. 사료에 투기죄가 나타나지 않는 신라에서는 배우자의 성에 대해 사회적으로 처벌하거나 강하게 규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예외적으로 소지왕 때에 간통하는 궁주(宮主)와 분수(焚修)하는 중을 처벌한 예가 있지만, 간통이 처벌의 계기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오히려 정치적인 사건으로 해석하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비교적 자유로운 남녀 관계가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간음이나 투기가 그다지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피차의 관계가 서로 억압적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황에서는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74)김영심, 앞의 글,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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