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
  • 1. 설화를 통해 본 고려 건국 전후의 혼인
  • 왕건 선조들의 혼인
권순형

고려의 건국은 혼인 풍속이나 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혼인의 역사에서 볼 때 고려의 건국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여기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는 여러 설화이다. 『고려사』 왕실 세계(世系)에는 왕건 선조들의 혼인에 대한 다양한 일화가 나타나며, 『고려사』 「후비전」에는 왕건의 혼인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건국 이전 개성 지역의 혼인 풍속은 물론, 이후의 변화상을 추적할 수 있다. 우선 『고려사』 왕실 세계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왕건의 선조로, 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호경(虎景)이다. 그는 백두산으로부터 와서 부소산 골짜기에 정착했으며, 자칭 ‘성골 장군(聖骨將軍)’이라 했다. 어느 날 그는 마을 사람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산속에서 자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머문 굴 밖에서 호랑이가 으르렁거렸고, 호경은 호랑이밥으로 뽑혀 굴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굴을 나서자마자 굴이 무너지면서 오히려 굴 안의 사람들이 생매장되었다. 호경과 마 을 사람들은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산신(호랑이)은 자신이 과부라며 호경을 산의 대왕으로 봉해 남편으로 삼겠다고 했다. 이와 동시에 호경은 사라졌다. 그러나 호경은 옛 처를 잊지 못해, 밤이면 밤마다 꿈처럼 와서 부인과 동침해 아들 강충(康忠)을 낳았다.

강충은 서강 영안촌의 부잣집 딸 구치의(具置義)와 혼인했다. 그는 삼한을 통일할 자가 태어날 거라는 지관(地官)의 충고에 따라 산에 소나무를 심고, 지역 이름도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 그는 군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었고, 수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두 아들을 낳았다. 이 가운데 둘째 아들이 보육(寶育, 이전 이름 손호술(損乎述))인데, 어느 날 꿈에 곡령재에 올라 오줌을 누자 그 오줌이 천지에 가득 차 산천이 은 바다로 변했다. 이튿날 형 이제건(伊帝建)에게 꿈 이야기를 하자 이제건은 네가 반드시 하늘을 버티는 기둥(비상한 인물)을 낳을 것이라며, 자기 딸 덕주(德周)와 혼인시켰다.

보육은 두 딸을 낳았는데, 둘째 딸 이름이 진의(辰義)였다. 진의가 막 성년이 되었을 때에 그의 언니가 꿈을 꾸었는데, 오관산 마루턱에 올라앉아 오줌을 누었더니 그 오줌이 흘러 천하에 가득 찼다. 그가 깨어나서 진의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진의가 비단 치마를 가지고 와서 그 꿈을 사겠다고 하기에 언니는 꿈을 진의에게 팔았다.

한편 당나라 숙종이 아직 즉위하기 전에 천하 산천을 두루 유람하는데, 753년 봄에 바다를 건너 패강 서쪽 나루에 도착하여 보육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다. 숙종은 두 처녀를 보고 기뻐하여 자기의 터진 옷을 꿰매 달라고 하였다. 맏딸을 들여보냈더니 겨우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피가 터져 되돌아 나와 진의를 들여보내 모시게 했다. 숙종은 머무른 지 한 달 만에(민지의 『편년강목』에는 1년 동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의에게 태기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별할 때에 자기가 당나라 귀족이라는 것을 밝히고 진의에게 활과 화살을 주면서 만일 아들을 낳거든 그것을 주라 고 하였다. 그 뒤 진의는 아들을 낳았으며, 이름을 작제건(作帝建)이라고 했다.

작제건은 활을 잘 쏴 신궁이라 불렸다. 작제건이 아버지를 찾으려고 상선을 타고 중국으로 떠났는데, 바다 복판쯤 와서 구름과 안개로 배가 사흘 동안 가지 못했다. 뱃사람들이 점을 치자 함께 탄 고려인을 내려놓고 가야 한다고 했다. 작제건은 활과 화살을 잡고 바다로 뛰어내렸는데, 마침 밑에는 암석이 깔려 있어 그 위에 서게 되었다. 조금 뒤에 서해 용왕이 나타나 작제건에게 자신이 늙은 여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며, 활로 여우를 쏴 줄 것을 요청했다. 작제건은 여우를 처치하고 그 보답으로 용왕의 딸 저민의(翥旻義)와 혼인했으며, 칠보(七寶)와 버드나무 지팡이·돼지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개주·정주·염주·백주의 네 개 주와 강화·교동·하음의 세 개 현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영안성을 쌓고 궁실을 건축하여 주었다. 1년 뒤 어느 날 돼지가 우리로 들어가지 않아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하자 돼지는 강충이 살던 송악산 옛 터로 갔다. 작제건은 그곳에 새 집을 짓고 살면서 영안성을 왕래했다. 한편 용녀(龍女)는 송악산 집의 창 밖에 우물을 파고 그 속으로 들어가 서해 용궁을 다녔는데 작제건에게 자신을 엿보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작제건이 자신을 엿보자 용녀는 부부간의 신의를 저버렸다며, 딸과 함께 용으로 변해 우물로 들어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용녀는 네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용건(龍健, 뒤에 융(隆)으로 개명)이다. 일찍이 용건의 꿈에 한 미인이 나타나 그의 부인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뒤에 그가 송악산에서 영안성으로 가는 길에 한 여자를 만났는데, 꿈에 본 여자와 용모가 똑같았으므로 그녀와 혼인했다.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몽부인(夢夫人)이라 했다. 몽부인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王建)이다.

이것은 몇 대에 걸친 왕건 가문의 출자(出自)와 내력을 신비하게 윤색한 설화이다. 이를 역사적으로 해석해 보면, 왕건의 선조들은 북쪽에서 내려와 송악에 정착한 사람들로서 ‘성골 장군’이나 ‘상사찬’ 등의 호칭에서 볼 때 송악 지역의 촌주(村主)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수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서강 영안촌 부잣집 딸’이나 ‘서해 용왕의 딸’과 혼인했다는 데서 해상 무역에 종사하거나 해상 무역가의 딸과 혼인해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개주·정주·염주 등 인근의 군민을 축성에 동원할 정도로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으며, 후손 가운데 삼한을 통일할 왕이 나오기를 기대할 만큼 만만치 않은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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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실 세계도
고려 왕실 세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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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특기할 점은 이야기가 하나같이 낯설지 않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신라의 유명 설화들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즉, 보육과 진의의 이야기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희와 보희의 일화 그대로이며, 작제건 부분은 거타지(居陀知) 설화89)『삼국유사』 권2, 기이2, 진성여대왕과 거타지.에서 따왔다. 이제건이 동생 보육에게 ‘하늘을 버틸 기 둥’ 운운한 것은 원효와 요석 공주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고려사』의 왕실 세계는 신라의 왕이나 김유신, 원효 같은 유명 인사의 설화를 주인공만 바꾼 채 그대로 이용하였다. 왜 이야기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왕실 세계의 이야기는 고려 건국을 전후해 만들어서 건국 뒤에 더욱 열심히 유포하였을 것이다. 즉, 신라 변방에 살던 한낱 지방 촌주인 왕건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자 자신들의 선조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몄는데, 신라 왕실과 유명 인사의 일화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연고지와 관계있는 고구려의 신화나 인물 설화를 빌리지 않았다는 데서 당시 신라가 한반도의 유일무이한 정통 국가로 군림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국가적 권위와 문화적 선진성은 이 지역에서도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줄곧 주인공들이 활을 잘 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서,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주몽(朱蒙) 설화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처럼 왕실 세계는 고구려와 신라적인 것이 합해져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고려의 건국으로 신라의 문화가 지역적으로 더욱 확산되고, 한반도의 통합도 한 차원 더 진전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왕실 세계를 통해 원래 고구려 영토인 개성 지역 촌주 계층의 일반적인 혼인 풍속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났지만 이 지역은 신라의 문화 중심권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며, 또 관혼상제(冠婚喪祭) 같은 것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곳의 혼인 풍속은 고구려의 전통을 많이 간직하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의 혼인 풍속이 건국 후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핌으로써 혼인사에서 고려 건국의 의미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실 세계를 통해 추출할 수 있는 혼인 풍속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민간의 혼인 풍속이 대체로 일부일처였으리라는 점이다. 왕건 선조가 모두 일처를 취하고 있고, 산신(호랑이)이 호경을 남편으로 삼으 려 한 것은 자신이 과부였기 때문이다. 또 호경이 옛 부인을 잊지 못하면서도 낮에 떳떳이 만나지 못하고 밤에만 꿈처럼 나타나 동침하는 것 역시 당시 일부일처가 일반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남편의 행동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산신이 이를 묵인했다는 점은, 당시에 일부일처 원칙이 그렇게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음도 동시에 보여 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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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전경(松都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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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동성 근친혼(同姓近親婚) 풍속이라는 점이다. 보육은 형 이제건의 딸과, 즉 삼촌과 조카 사이에 혼인했다. 동성 근친혼은 특히 신라에서 성행했다지만, 신라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옛 고구려 지역인 이곳에서도 행해진 것이다.

셋째, 자유혼과 중매혼이 모두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딸의 혼인에 아버지의 결정이 절대적이었음을 보육과 이제건 딸의 혼인, 작제건과 용왕 딸 의 혼인 사례에서 잘 볼 수 있다. 한편 왕건의 아버지 융과 몽 부인의 혼인을 보면 자유혼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도 김유신 부모나 강수와 대장장이 딸의 사례에서 보듯 자유혼이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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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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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당시에 이혼도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용왕의 딸은 자신이 우물을 통해 용궁으로 오갈 때 남편에게 보지 말라고 했지만 작제건이 이를 어기자 부부간의 신의가 깨졌다며 딸을 데리고 용궁으로 가 버린다. 여기에서 이혼이 허용되었고, 이혼할 때 자식을 여성이 데려가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사회가 엄격한 부계 친족 중심의 사회가 아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이 지역의 혼인 풍속은 동성 근친혼, 만남과 헤어짐이 비교적 자유로운 혼인, 대체적인 일부일처제, 엄격한 부계 중심 사회가 아닌 점 등이 특징이다. 이는 고대 이래 내려오던 풍속으로 신라와의 공통점이 엿보인다. 백제 역시 비슷한 요소가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90)백제의 사례는 사료 부족으로 찾기가 어렵지만 중국 사서에 그 풍속이 고구려와 같았음이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다. 『구당서』 권199, 동이열전, 백제와 『신당서』 권220, 동이열전, 백제 참조. 삼국의 혼인이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는 더 천착(穿鑿)해야 할 문제이겠지만 삼국 간에는 이같이 문화적 동질성도 적지 않게 있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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